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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20화 (120/147)

120화

썩은 맛 운운하며 자리를 떠난 로하르트가 십분 이해되는 순간이었다.

황자비를 배신한 일을, 그들은 별일이 아니라고 말한다. 대수롭지 않다고 여긴다.

만약 레실리아와 카르단의 입장이 반대였다면 어땠을까?

그때도 그들은 저렇게 심드렁한 얼굴로, 별일이 아니라고 말했을까? 한때의 치기 어린 실수로 치부했을까?

“대체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지?”

에슬린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냉랭한 목소리에 귀족들의 수군거림이 뚝 멎었다.

“내가 언제 카르단의 의혹이 그것뿐이라고 했어?”

“……무슨 뜻이냐?”

“프레이 백작. 늘 생각하지만, 그대의 유일한 장점은 그대의 우수한 장남뿐이야.”

명백히 비웃는 어조였다. 프레이 백작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건방지긴. 그건 가문의 수치일 뿐이야.”

“글쎄…….”

황녀는 말끝을 흐리며 싸늘하게 웃었다.

“누가 가문의 수치일지는, 두고 봐야 알겠지.”

“…….”

백작의 볼이 바르르 떨렸다. 그는 디에리안을 언급한 것만으로도 큰 모욕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에슬린은 프레이 백작을 더 바라보지 않았다. 고개를 돌려 멍청한 얼굴을 한 카르단을 보았다.

“카르단, 뭘 조용히 있어? 난 지금 네 다른 의혹에 대해 말하고 있는 거야.”

“……뭐, 무슨……?”

카르단이 눈알을 데굴데굴 굴려 대며 웅얼거렸다.

대체 뭔 수작이지?

“정말 짚이는 데가 없어?”

에슬린이 일부러 디에리안 쪽을 흘끔 보았다. 싸늘한 표정을 한 마법사가 눈썹을 들썩였다.

카르단의 시선 또한 에슬린을 따라 움직였다.

마법사……?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카르단의 미간이 한껏 구겨졌다. 그러길 잠시.

“……!”

그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흑마법사……!’

카르단의 호흡이 순식간에 거칠어졌다.

‘설마 흑마법사가 모습을 감춘 것도 다 에슬린 때문이란 말인가!’

아니, 아니다. 그럴 리 없다. 타툴란의 수족이라는 기사가 그 독약을 건네주지 않았나.

카르단은 휙휙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흑마법사와 엮였다는 의혹만큼은…… 받을 수 없어. 그것만큼은 안 돼. 절대 안 돼!’

흑마법사가 궁 밖에서 피를 모은다고 했다.

그 의미를 카르단 또한 모르지는 않았다.

과연 그것까지 에슬린이 파악한 것인가?

“카르단 전하? 괜찮으십니까?”

“……빌어먹을. 빌어먹을. 빌어먹을.”

음흉한 계집이었다.

에슬린이 괜히 이 타이밍에 디에리안을 본 게 아닐 것이다.

프레이 백작을 긁어 디에리안을 화두에 올린 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일 거다.

“카르단, 어때?”

“그만. 그만해!”

카르단은 포효하듯 소리쳤다. 모든 이들의 시선이 그를 향해 꽂혔다.

“…….”

에슬린 또한 말없이 카르단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꿰뚫릴 것 같았다. 그녀의 입꼬리가 희미하게 올라갔다.

‘협박하는 거야. 이 임명식을 중지하라고! 그러지 않으면 흑마법에 손댄 것을 폭로하겠다고!’

제 곁엔 지금 흑마법사가 없고, 에슬린 옆엔 저 빌어먹을 디에리안 프레이가 있다.

그 사실을 주지시킨 것이다.

흑마법에 대한 공방으로 접어들면, 지금은 제 손해였다.

디에리안과 이미 판을 다 짜 두었을 테니까!

‘그래서였나!’

저 되지 않는 독약 병을 증거랍시고 내놓은 게?

황제 시해 미수는 핑계에 불과하고, 사실은 흑마법에 대한 증거로 삼으려고?

카르단은 이를 갈았다. 눈알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씨근덕대는 숨이 조절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 검을 뽑아 들고, 저 목을 자르며 난도질하고 싶었다.

“집행관.”

지켜보던 에슬린이 입을 열었다. 전혀 크지 않은 목소리였음에도, 카르단의 몸이 벌떡 경련했다.

별안간 불린 집행관이 재빨리 나아갔다.

“예? 예…….”

그는 제가 존댓말을 하고 있다는 것도 인지하지 못했다.

“황태자 임명식 자체에 중요한 흠결이 있으면 어떻게 되지?”

“예? 흠결……이요?”

“그래. 예를 들어…….”

매끄러운 입술이 치켜 올라갔다. 그녀는 눈동자만 움직여 카르단을 응시했다.

‘이번엔 내가 이겼어, 카르단.’

그 미소가 꼭 그렇게 말하는 것만 같았다.

카르단은 눈앞이 핑 돌았다. 옆 시야로 에슬린의 마법사가 움직이는 것도 같았다. 숨이 찼다. 에슬린의 입술이 느리게 움직였다.

그는 참지 못하고 울컥 소리쳤다.

“알겠다고! 그만둔다고! 그러니 그만 말해……!”

“성배가 모습을 드러냈다든가.”

“…….”

“…….”

주위가 쥐 죽은 듯 고요해졌다.

그들 모두 아주 생소한 것을 들었다는 표정이었다.

카르단은 잔뜩 얼이 빠진 얼굴로 에슬린을 응시했다.

“서, 성배라니요? 전하…….”

집행관이 잔뜩 당황한 얼굴로 횡설수설했다.

“성배가 나타났습니까?”

“성배라고?”

“100년 전에 사라진 그 성물?”

“맙소사! 이건 또 무슨 소리란 말인가!”

지금껏 없던 강도로 내부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에슬린은 그들이 충분히 이 충격을 만끽할 수 있도록 입을 다물었다.

황후는 질끈 눈을 감았다.

쿵쿵! 그들을 진정시키고자 누군가가 뭔가를 두드렸으나, 이미 소란은 걷잡을 수 없었다.

“당신 말 하나에 그야말로 쑥대밭이군요.”

테베트가 몸을 기울여 속삭였다. 어차피 주변 소음이 거세 그의 목소리는 파묻힐 터였다.

“뭐, 그렇겠죠. 100년 만에 드러난 성물이니.”

“카르단의 낯짝을 보니 흑마법에 대해서만 전전긍긍한 것 같은데.”

그가 나직하게 웃음을 흘렸다.

“얼간이가 따로 없어 보입니다.”

넋 빠진 모습이 성배는 생각조차 하지 못한 얼굴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몰아가기도 했지만.

에슬린은 싸늘하게 웃었다.

“켕기는 게 많은 사람일수록 궁지에 몰기 쉬운 법이죠.”

그런 에슬린을 테베트가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그의 눈동자에 알 수 없는 빛이 일렁였다.

“아까부터 참고 있는데, 지금 당장 입 맞춰도 됩니까?”

“되겠어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보자 그는 천연덕스럽게 눈썹을 으쓱일 뿐이었다.

그사이 뜨겁게 달아올랐던 내부가 잦아들기 시작했다.

에슬린은 테베트를 밀어 두고 앞으로 나섰다.

“집행관, 이제 대답해 주겠어? 성배가 나타났다면 어떻게 되는 거지?”

집행관은 흘끔 카르단을 보았다. 황자는 영혼까지 탈탈 나간 듯한 표정이었다.

“다, 다, 당연히…… 성배 없이 이루어진 중간 절차는 무효입니다. 왜냐면……”

“성배를 가진 자가 베르타니아의 진정한 후계자이기 때문이지.”

말을 끝맺은 건 여태껏 사태를 관망하던 황후였다.

타아앙! 타아앙!

황후가 거세게 황금 홀을 내리쳤다.

묵직한 소리가 신전 전체를 메우며 남은 수군거림까지 모두 먹어 치웠다.

“정말 성배가 모습을 드러냈느냐?”

황후는 에슬린을 똑바로 내려다보았다.

“네. 여기 있는 리페리우스 공작에게 확인했습니다.”

“공작.”

“…….”

“사실인가?”

테베트가 에슬린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고 황후를 바라보았다.

모양 좋은 입술은 아주 느리게 움직였다.

“전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마물과의 전쟁 중, 그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

말도 안 돼. 누군가 그렇게 중얼거렸다.

황후는 길게 눈을 감았다 떴다.

“카르단.”

“……예, 예……?”

“아까 왜 저 아이의 입을 막으려 했지?”

카르단은 넋 나간 표정으로 황후를 응시했다.

왜 입을 막으려 했냐고? 그건…….

“설마.”

“…….”

“성배가 나타났다는 걸 알고 있었느냐?”

“아닙, 아닙니다. 그런 게 아니라.”

“그런 게 아니라면?”

“그, 그건…….”

카르단은 더 답하지 못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그는 기어코 비틀거리다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황후는 아주 긴 숨을 내쉬었다. 다시 고개를 돌려 에슬린을 보았다.

이것이었구나.

네가 원하는 것. 네가 계획한 방식.

“성배를 찾겠습니다.”

에슬린이 충성스러운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그들 모두 잘 알고 있었다.

오직 베르타니아의 황족만이 성배의 선택을 받는다는 것을.

그리고 그건 바꿔 말하자면…….

“성배의 선택을 받는다면, 제가 에슬린 베르타니아라는 것 또한 자연히 증명되겠죠.”

에슬린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안 그런가? 백작.”

오만한 자신감이 느껴지는 얼굴이었다.

프레이 백작이 분한 표정을 숨기지 못했다. 에슬린은 비웃듯 입술을 말아 올리며 웃었다. 그 미소마저 계산된 것이었다.

황후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한 손에 든 홀을 꽈악 움켜쥐었다.

스윽, 탁.

붉은 벨벳 망토가 바닥에 끌렸다.

중앙에 선 여인이 신전 구석구석을 응시했다.

“성배는 절대적인 것.”

준엄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넓게 퍼져 나갔다.

“누구도 거스를 수 없는 신의 뜻이다.”

때마침 이곳은 신전이었다.

그 사실은 사람들로 하여금 거스를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를 마주한 것처럼 느끼게 했다.

“성배가 나타났다면, 그에 순응하는 것 또한 베르타니아 황족에게 당연한 일이지.”

황후의 눈동자가 신전 벽을 더듬었다.

교차된 검, 그 앞에 보호받듯 새겨진 고블릿 잔.

그녀는 이번엔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리페리우스와 모리어스의 주장이 있으니 네 말을 마냥 무시할 수만은 없구나.”

“…….”

“그러니 어디 증명해 보거라. 네 정체를. 네 손으로 직접.”

에슬린은 순응하듯 황후 앞에 몸을 낮추었다. 군더더기 없는 반듯한 동작. 그건 오랜 시간 몸에 밴 습관 같은 것이었다.

“모, 모후…… 그 말씀은……?”

냉철한 여인의 시선이 이번엔 멍하게 앉은 카르단을 향했다.

“아쉽게 되었구나, 카르단.”

“…….”

“원점이다.”

그가 작살에 꽂힌 물고기처럼 파르르 몸을 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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