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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21화 (121/147)

121화 [S공금]

타앙, 타앙, 타앙!

황후가 다시 바닥을 내리쳤다.

“황제 폐하의 대리인 자격으로 선포하노라.”

엄숙하고도 묵직한 명령이 황후의 입술을 타고 흘렀다.

그 목소리는 모든 이의 귓바퀴를 타고 들어가 혈관에 녹아들고, 뇌에 가 박혔다.

“리페리우스의 검증하에, 성배가 나타났다. 그러니 이제 성배의 선택을 받는 자가 다음 베르타니아의 황좌에 앉을 자다.”

황후는 찬찬히 실내를 응시했다. 마지막으로 그녀의 눈동자가 멈춘 곳은 저를 올려다보는 에슬린의 얼굴이었다.

“성배가 진짜 베르타니아의 피를 가려 주리라.”

아마 처음부터 이것을 바랐을 것이다.

카르단의 자리를 위협하고, 자연스레 제가 들어올 자리를 만드는 것.

기존 판을 뒤엎고, 황궁에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하는 것.

거칠지만 확실한 방법이다. 무모하지만 그래서 더 강력한 출사표다.

“폐하!”

프레이 백작이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소리쳤다.

“말도 안 됩니다! 자기가 황녀라는 저 정신 나간 주장을 받아들이시는 겁니까!”

“판단을 잠시 미루는 것뿐이네, 프레이 백작.”

“폐하!”

“혹시 모르는 일 아닌가?”

황후는 냉엄한 눈으로 백작을 응시했다.

“마우시스의 은총을 받아 정말 황녀가 돌아온 것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 말도 안 되는.”

“모든 가능성을 열어 두고, 신중히 접근하려는 것뿐이야.”

황후가 에슬린의 판에 남몰래 힘을 보탰다. 귀족들이 데굴데굴 눈알을 굴렸다.

그럴 수도…… 있는 건가?

프레이 백작이 뭐라고 더 덧붙이려는 찰나, 잠자코 있던 리페리우스 공작이 나섰다.

“지극히 옳은 판단이십니다.”

모리어스 후작 또한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카르단은 그저 혼이 빠진 얼굴로 부들거리고 있을 뿐이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정신없이 그들 사이를 오고 갔다.

모리어스 후작은 물론, ‘그’ 리페리우스 공작이 인정했다.

철저하기 이를 데 없는 황후마저 새로운 가능성을 받아들였다.

하물며 황녀의 적인 카르단 황자는 어떤가? 누구보다 저 여자를 황녀로 보는 것 같지 않았나?

꼴깍, 누군가 침을 삼켰다.

그렇게 될 수도, 있는 것인가?

“……저것 좀 봐.”

하늘에서 연보랏빛 꽃잎이 살랑살랑 휘날렸다.

갑자기 신전을 둘러싸고 만개한 라일락이었다.

진하고 매혹적인 향기.

그걸 맡자, 저절로 에슬린에게 시선이 갔다.

어떤 기적은 학습될 수 있었다.

비현실적으로 보이던 일이 사실은 완전한 불가능은 아니었다는 걸, 그들은 이미 경험해 보지 않았던가?

따라서 신전에 모인 사람들은 자기도 모르게 가능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했다.

죽은 사람이 살아 돌아오는 일.

황녀가 다시 돌아오는 일.

‘그럴 수도 있는 걸까……?’

괴담은 그렇게 진실이 될 준비를 마쳤다.

* * *

초유의 사태가 벌어졌다.

베르타니아 제국의 황태자 임명식이 돌연 취소된 것이었다.

그것도 임명식 한중간에.

새 후계자의 행진을 기다리던 백성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무슨 일인데요? 네?”

황태자 전하께 드리겠다며 붉은 꽃을 쥐고 있던 아이들이 물었다. 하지만 어른들이라고 알 리가 없었다.

이상한 소문이 돌았다.

죽은 줄 알았던 황녀가 돌아왔다는 소문이었다.

황녀가 사실은 죽지 않았고, 심지어 임명식에 난입했다고 했다.

“그런 일이 있을 수도 있어?”

“어떻게 알아? 하지만 여름에 그런 괴담이 돌긴 했지.”

“……정말 황녀님일까?”

“글쎄……. 어떻게 알겠어? 위에서 그렇다면 그냥 그런가 보다, 해야지 뭐.”

“쩝. 영 흉흉하구먼…….”

백성은 불안에 떨었다.

그들이 듣는 거라곤 오로지 소식지에 적힌 몇 줄 기사와 풍문으로 전해 듣는 소문뿐이었다.

그러는 동안 황제의 병환은 천천히 악화하고 있었다.

“다음 후계자는 그래서 어떻게 되는 거래?”

“황후 폐하께서 말씀하시기로, 성배의 인정을 받는 황족이 다음 후계자라고 선포하셨다던데.”

“성배라니……. 그게 진짜 실존하는 거란 말이야?”

“그런가 봐. 아유, 알 게 뭐야. 난 뭐가 됐든 그냥 큰 탈만 없었으면 좋겠어.”

“곧 큰 전쟁이 있다던데. 전쟁 준비는 잘되는 걸까……? 누굴 지지해야 하는 거야?”

“모르겠어.”

우릴 보호해 줄 사람은 누굴까?

우리에게 닥친 위험을 외면하지 않을 사람은 누구지?

황녀일지도 모르는 여자?

그래도 아직은 굳건한 황자?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다들 저 높은 담벼락 안에 꽁꽁 틀어박혀 있는데 어떻게 알겠어?”

“그러네…….”

한숨 소리가 동시에 높아졌다.

* * *

귀족들이 하나둘씩 돌아갔다.

바글바글하던 신전이 금세 휑뎅그렁해졌다.

“황후 폐하, 괜찮으십니까?”

황후는 아주 피곤한 얼굴로 단상 위 의자에 앉아 있었다. 돌아갈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 얼굴이었다.

“몹시 피곤하구나.”

“마차가 밖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황후는 부축을 받아 일어섰다.

단상을 내려서려는데, 아직 에슬린이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황후는 느리게 아래로 내려와 그 앞을 지나갔다. 에슬린도 황후도 별다른 말은 건네지 않았다.

“폐하.”

살짝 비틀거리는 황후를 테베트가 붙들었다.

“이런, 현기증이 이는군. 부축 좀 해 주겠나, 공작?”

테베트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황후가 물끄러미 그를 보았다.

짧은 숨을 내쉰 테베트는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잠시 계시겠습니까, 전하?”

에슬린은 담담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고, 테베트는 황후와 함께 신전을 나섰다.

제 팔뚝에 얹은 황후의 손에선 무게감이 거의 느껴지지 않았다.

그렇다는 건 비틀거린 것부터 의도한 것이라는 소리다.

‘능구렁이가 따로 없군.’

그는 속으로 웃었다.

황후의 마차가 신전 정문에 위용 있게 서 있었다. 잘 걷던 황후가 갑자기 걸음을 멈추었다.

“마차가 더러워 보이는구나. 가서 내부를 청소해라.”

뜬금없는 소리였다. 그러나 황후를 오래 모신 수석 시녀는 한 번에 그 말뜻을 알아차렸다.

“예, 폐하.”

시녀는 주변의 따르던 인물들을 모두 데리고 마차 쪽으로 사라졌다.

남은 건 그녀를 부축하고 선 테베트뿐이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네.”

정면에 시선을 둔 채 황후가 입을 열었다.

“압니다.”

테베트 또한 황후를 돌아보지 않았다. 은밀한 비밀을 공유하는 두 사람은, 맞닿은 손의 면적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것을 함께 해냈다.

“오늘까지 황태자 임명을 미루고, 에슬린을 기다려 주었지. 자네가 말한 대로.”

“네.”

“그러니 이제 자네 차례야.”

냉엄하게 번들거리는 눈동자가 그를 직시했다. 테베트는 입술을 말아 올렸다.

“자네가 선택한 이를 반드시.”

황후는 눈동자만 움직여 신전을 응시했다.

“저 자리에 세워.”

꽉, 테베트의 팔뚝에 얹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어느새 황후는 테베트를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약속을 완수해, 리페리우스 공작.”

“폐하께서 말씀하시지 않아도, 당연히 그럴 것입니다.”

테베트는 감정 한 줌 담지 않은 눈으로 황후를 응시했다.

휘이잉- 바람이 그들 사이의 정적을 메우듯 몰아쳤다.

황후는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그럼 됐네.”

여인은 이제 그 어떤 미련도 없어 보였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태도였다.

테베트는 문득 궁금해졌다.

“언제까지 도움을 숨길 생각이십니까?”

슥, 앞으로 나아가려던 황후가 동작을 멈추었다. 단호하게 가라앉은 눈동자는 그저 고집스러웠다.

“영원히.”

황후는 다시 높다란 신전을 응시했다. 아까와는 어쩐지 다른 눈빛이었다.

차갑기 그지없던 눈동자에 처음으로 어떤 감정이 스쳤다.

“어떤 도움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아야 하는 법이지.”

테베트는 황후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영원히라…….”

그가 말끝을 늘였다. 그 의도를 모르지 않을 텐데, 황후는 고집스럽게 웃었다.

“내가 뒤에서 에슬린을 도왔다는 사실이 밝혀지면, 분명 그걸로 꼬투리를 잡을 사람들이 생기겠지. 난 저 아이의 정당성에 흠이 되고 싶지 않아.”

“…….”

“에슬린이 내게 쓸데없는 부채감을 느끼는 것도 싫고 말이야.”

황후는 테베트가 해석할 수 없는 표정을 지었다.

“똑똑한 여인입니다. 폐하의 도움을 어렴풋이 눈치챘을 겁니다.”

“하지만 무슨 도움을 어떻게 줬는지까진 자세히 모르겠지.”

구름이 태양을 반쯤 가렸다.

황후의 얼굴이 그림자에 잠기자, 역설적으로 그녀의 진짜 얼굴이 드러나는 것만 같았다.

어둡고도 매서운, 권력자의 얼굴.

“리페리우스 공작 자네만 입 다문다면 말이야.”

황후야말로 오래 숨죽인 자였다.

황후는 에슬린에게 명예 죽음을 내려 그녀를 구할 기회를 만들었다. 그뿐일까. 테베트가 마법사와 함께 죽은 에슬린을 빼돌렸을 때도 그 뒤를 봐준 건 황후였다. 성배에 대한 자료는 또 어떤가.

오직 오늘을 위한 일이었다. 황후는 오직 오늘만을 생각하며 그 은밀한 숨을 삼켜왔다.

에슬린이 다시 돌아오는 모습을 보기 위해.

테베트는 피식 웃었다.

“뭐, 됐습니다.”

황후의 말이 맞았다. 어떤 도움은 영원히 드러나지 않아야 한다.

그녀는 처음부터 기울어진 저울이었다.

이 싸움에서 황후는 공정한 심판자 그 이상도 이하도 되어선 안 됐다. 그러니 이 비밀은 끝까지 지켜져야 하는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그게 에슬린을 위한 일이었다.

“내 도움은 여기까지네.”

황후가 말했다. 테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압니다.”

그녀는 제가 할 수 있는 것을 모두 했다.

성배를 찾아 저 위에 에슬린을 올리는 건, 이제 테베트와 다른 이들의 몫이었다.

“이로써 폐하와 독대할 일이 더는 없길 바랄 뿐입니다.”

그러자 황후의 입가에 비로소 웃음이 떠올랐다.

“듣던 중 반가운 소리군.”

그녀는 가볍게 손을 떼어 냈다. 저 멀리 시선을 주자 기다리고 있던 시녀가 냉큼 달려왔다.

“부축은 이만 됐네.”

테베트는 정중히 인사했다.

“살펴 가십시오.”

황후를 태운 마차가 멀어졌다.

잠시 지켜보던 그는 망설임 없이 몸을 돌렸다. 빠르게 신전 계단을 올랐다.

‘리페리우스 공작, 에슬린을 구하게.’

테베트는 모성애 같은 것을 믿지 않았다. 그건 그가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종류의 사랑이었다.

낳으면 부모가 된다. 하지만 정말 그것만으로 사랑이 생길까?

글쎄, 적어도 테베트의 부모는 아니었다.

그에게 사랑은 에슬린 그 자체였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제 존재를 긍정받는 느낌. 저를 이 세상에서 특별한 것으로 만들어 주는 경이로운 감각.

에슬린 이외의 사랑은, 정말로. 글쎄.

황후는 아픈 황제를 대신해 권력을 잡은 여인이었다. 그런 여인이 움직였다면 그건 제게 이득이 되는 일이기 때문일 것이다.

누구든 폭군보단 성군을 제 후계자로 세우고 싶지 않겠는가?

황후가 에슬린을 선택하는 건 당연한 결론이었다.

테베트는 그래서 황후를 믿었다. 그 어떤 것보다 확실한 이해관계가 그녀에게는 있었다. 하지만.

‘내 아이를 구해 줘.’

그 눈빛만큼은 테베트에게 해석 불가한 어떤 것이었다.

‘됐어.’

저벅, 저벅. 그는 생각을 떨치듯 거침없이 걸음을 옮겼다.

더는 고민할 필요 없는 일이다.

널따란 신전에 들어서자 에슬린의 옆모습이 보였다.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저것이다.

제가 아는 유일한 사랑의 세계.

그러니 제가 탐구해야 할 것 또한 오직 저 얼굴뿐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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