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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22화 (122/147)

122화

한편 테베트가 황후를 부축해 나간 뒤, 신전에 남은 이는 에슬린과 디에리안, 모리어스 후작을 비롯한 몇몇 시종들뿐이었다.

“로하르트는 어디 갔지?”

가까이에 온 디에리안에게 에슬린이 물었다.

“글쎄요. 부리나케 사라지던데요. 아까 그 바보가 무슨 일을 벌였는지 아십니까? 뒤에서 보는데 얼마나 조마조마했는지…….”

디에리안이 뭐라고 더 조잘거렸다.

에슬린은 가볍게 흘려들으며 고개를 저었다. 귀걸이를 돌려받는 건 아무래도 좀 더 나중이 될 것 같았다.

그때 신전 옆문에서 우당탕탕! 하는 큰 소리가 들렸다.

카르단 전하!

하는 외마디 소리도 들린 것 같았다.

“에슬린!”

씩씩대는 카르단이 신전 옆문으로 등장했다.

“돌아간 게 아니었나?”

“그러게요. 분을 못 이겨서 되돌아온 것 같은데, 어떻게, 날려 버릴까요? 훨훨?”

디에리안이 이죽거리며 물었고, 에슬린은 픽 웃으며 그를 저지했다.

“놔둬 봐. 뭐라고 하는지 들어나 보게.”

카르단이 거칠게 걸음을 옮겼다.

아래턱이 바들바들 떨리고 있었다. 에슬린을 노려보는 눈동자가 광기로 가득 찼다.

“감히 네가 날 우습게 만들어?”

“그러게 처신을 똑바로 했어야지.”

“후회하게 만들어 주마.”

그가 짓씹듯 말했다. 빨간 진물이 흐를 것 같은 벌건 눈이 서서히 가까워졌다.

“돌아온 걸, 반드시, 후회하게 만들어 주겠어.”

“…….”

“그리고 내 손으로 반드시 네 사지를 비틀어 버릴 거다. 머리는 황궁 문 앞에 걸어 새가 쪼아 먹게 하고, 팔다리는 제국 전체에 각각 보내…… 으윽!”

저주를 내뱉던 입이 강제로 틀어 막혔다.

옆에서 불쑥 튀어나온 건 커다란 손이었다. 으드득. 턱을 빠개 버릴 것 같은 거센 악력이 그를 덮쳤다.

“황자 전하.”

소름 끼치는 저음이 귓가에 흘러들었다.

카르단은 눈동자만 겨우 굴려 제 하관을 틀어쥔 인물을 바라보았다.

살기 어린 붉은 눈동자와 마주쳤다.

공작이 언제 온 거지? 분명 없었는데.

“뚫린 입도 언제든 막힐 수 있다는 거 아십니까?”

꽈아악. 손의 힘이 더욱 강해졌다.

정작 남자는 평온한 표정이었다. 그 얼굴만 보면 한 손으로 이런 힘을 주고 있다는 게 거짓말 같았다.

“으으! 읍!”

“공작, 공작 각하! 그만두십시오!”

팔다리를 버둥거리자 그의 시종들이 기함하며 달려왔다. 생리적인 눈물이 맺혔다.

“뭘 그런 눈으로 보죠? 실수하시지 않게 도와드린 겁니다.”

“으읍!”

“방금 지껄인 말이 너무 탁월해 그대로 실행할 뻔했으니까.”

“리페리우스 각하!”

그는 한 손으로 정말 카르단의 턱을 빠그라뜨릴 기세였다. 보다 못한 모리어스 후작마저 말릴 정도였다.

그때 테베트의 굵은 팔 위로 흰 손이 놓였다.

“테베트 경.”

“…….”

“그쯤 해요.”

그는 에슬린을 흘끔 보더니 팔을 물렸다.

“헉, 헉…….”

카르단이 숨을 헐떡였다. 시종들이 달려와 그를 살폈다. 벌겋게 손자국이 남아 있었다.

믿을 수 없었다. 저 손에 턱이 가루처럼 으스러질 뻔했다.

“미친…… 미친 게 분명해! 마물 피에 중독이라도 된 거 아닌가? 감히!”

“마물 피에 중독된 게 누군데?”

에슬린이 차갑게 일갈했다.

카르단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다물었다. 씨근덕대던 그가 테베트에게 삿대질했다.

“공작, 지금 아주 큰일 저지르는 거야……. 감히 리페리우스의 천칭을 기울게 만들어? 중립이라는 말이 웃겠군!”

테베트는 별소릴 다 듣는다는 듯 소맷자락만 툭툭 털 뿐이었다.

“리페리우스 가문에 망조가 들었어! 공작가도 이제 끝이야!”

카르단이 고함쳤다.

테베트가 슬쩍 에슬린에게 몸을 기울였다.

“저걸 협박이라고 하는 겁니까? 무서운 표정이라도 지어요?”

속삭이는 척 다 들리는 목소리였다. 카르단의 얼굴이 또다시 벌겋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 그대로 충분히 열 받은 거 같으니까 가만있어요.”

“네.”

그는 순한 양처럼 대답하며 물러섰다. 그러나 살기 어린 시선은 여전히 카르단에게 박혀 있었다.

“제기랄! 지금 단단히 착각하나 본데, 그딴 세 치 혀와 사술만으로 사람들이 널 황녀라고 인정할 거라고 생각해?”

카르단이 왁 고함을 내질렀다. 그러면서도 테베트의 주먹을 살피며 주춤주춤 물러섰다.

에슬린은 재미있는 농담을 들은 사람처럼 웃었다.

“당연히 아니지, 무슨 소리야?”

“뭐?”

“잘 생각해 봐. 난 딱히 잃은 게 없어. 근데…….”

그녀의 시선이 엉망이 된 신전을 크게 훑고, 카르단의 얼굴에서 멈추었다.

“넌 오늘 많은 걸 잃었네.”

이곳에 승리자는 없었다.

하지만 패배자는 명확했다.

그 사실을 깨달은 카르단의 얼굴이 화르륵 달아올랐다.

“에슬린……!”

절절 끓는 목소리로 그가 다시 덤벼들려 했다. 이번엔 그의 시종들이 가로막았다.

“전하, 가시…… 가시지요.”

카르단은 이를 아득바득 갈며 시종들을 사납게 뿌리쳤다.

“두고 봐. 반드시 처참하게 죽여 줄 테니.”

카르단이 휙 등을 돌렸다.

쾅쾅대며 신전 계단을 내려가는데, 별안간 눈에 보이지 않는 바람이 그의 등짝을 후려갈겼다.

“으억!”

데굴데굴. 그는 굴러서 계단을 내려가야만 했다.

“왜요? 저 아닌데요? 제가 감히 황자 전하를?”

옆에 선 디에리안이 시치미 떼며 말했다.

결백하다는 듯 양손까지 들어 올렸지만, 그 손끝에 매달린 푸른 마력을 에슬린은 정확히 보았다.

“제기랄…….”

등허리를 문지르던 카르단이 거칠게 욕을 내뱉었다.

“갑자기 거기서 웬 바람이야!”

진짜 최악의 하루군!

짜증스럽게 몸을 일으키려 하는데, 누군가의 신발 앞코가 보였다.

레실리아였다.

“…….”

카르단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만족하시오?”

가볍게 빈정댔다. 무언가가 불쑥 들이밀어졌다.

익숙한 종이.

“하…… 그놈의 이혼장.”

레실리아는 감정을 읽을 수 없는 표정이었다.

“모리어스를 따르는 귀족들이 모두 그 자리에 있었다는 걸 잊지 마세요.”

서명하지 않으면 귀족들이 들고 일어설 거라는 말이었다.

카르단은 레실리아의 손에서 사납게 펜을 낚아챘다.

“그래! 빌어먹을! 꺼져 버려, 다!”

그렇게 길 한가운데에 서서 그는 이혼장에 서명했다.

정말 최악의 하루군. 이것마저 최악의 방식이야!

“레실리아!”

망설임 없이 돌아서려는 레실리아를 카르단이 붙들었다. 그제야 그녀의 얼굴에 표정이란 게 떠올랐다.

카르단은 처음으로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귀찮음. 방해물을 보는 듯한 짜증스러운 시선.

레실리아가 내비친 감정은 오직 그뿐이었다. 그리고 그건 카르단이 종종 레실리아에게 보이던 것이었다.

‘넌 오늘 많은 걸 잃었네.’

뒤늦게 그 말의 다른 의미를 실감했다.

“……기어코 가겠다고?”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정말 날 버리겠다고?”

레실리아는 보란 듯이 눈썹을 찌푸렸다.

가볍게 그의 손을 털어 냈다. 오물이라도 닿았다는 듯한 태도에 카르단은 더 붙잡을 수 없었다.

“별.”

짧은 비웃음과 함께 레실리아가 떠났다.

그 자리를 황량한 바람이 대신했다.

* * *

신전에서의 일이 일단락되었다.

에슬린은 테베트와 함께 리페리우스 공작저로 돌아왔다.

별채로 돌아오자마자,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깊은 잠을 잤다.

꿈조차 꾸지 않은 그야말로 짧고도 깊은 잠이었다.

다시 눈을 뜬 건 누군가의 종이 넘기는 소리가 들려서였다.

“…….”

에슬린은 눈꺼풀을 열고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커다란 소파에 앉은 남자가 무언가에 몰두한 듯 자료를 넘겨 보고 있었다.

그 모습이 더없이 근사한 명화 속 한 장면 같아, 에슬린은 잠시 그를 구경했다.

황궁에서 본 빈틈없이 각 잡힌 모습이 마치 아주 오래전 일 같았다.

편안하고 나른한 그를 보고 있자 어쩐지 다시 잠들고 싶어졌다. 그 감각이 왠지 모르게 좋았다.

“일어났군요.”

시선을 느낀 테베트가 고개를 돌렸다. 망설임 없이 몸을 일으켜 다가온다.

따듯하고도 단단한 질감의 손이 이마를 짚었다.

“왜요?”

“혹시 열이 나나 싶어서.”

에슬린은 픽 웃었다.

“그거 알아요? 나 사실 되게 센데.”

“압니다. 당신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 가장 강하죠.”

그런 의미 아닌데. 에슬린은 작게 중얼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테베트가 베개를 정리해 주었다.

“식사를 준비하라고 하겠습니다.”

“딱히 먹고 싶은 생각은……”

“있어야죠. 낮에 그 난리를 쳤는데.”

슬쩍 돌아보자 창밖이 어두컴컴해져 있었다.

분명 해가 쨍쨍할 때 잠든 것 같은데……. 테베트는 언제부터 제 곁에 있었던 걸까?

“가 봐야 하지 않아요?”

그러자 테베트가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됐어요. 어차피 오늘 황궁에 일할 사람이라곤 아무도 없을 겁니다.”

그는 설렁줄을 흔들어 하녀를 부른 뒤 간단한 식사를 준비하라고 일렀다.

하녀가 테베트의 몫까지 준비하느냐고 묻는 걸 보면, 그 또한 여태까지 아무것도 먹지 않은 듯했다.

“그보다 아쉽진 않습니까?”

“뭐가요?”

에슬린이 침대에서 나서며 어깨에 숄을 걸쳤다.

테베트는 뒤에서 그녀의 머리카락을 가지런히 빼 주었다. 살짝 드러난 하얀 뒷목에 충동적으로 입을 맞추었다.

“이곳으로 돌아온 것이.”

“…….”

에슬린은 살짝 몸을 틀어 테베트를 보았다. 아무런 의도 없는 눈빛이 저를 직시했다.

“황녀궁으로 돌아가고 싶었던 게 아닌가 해서 말입니다.”

황후는 에슬린에게 성배를 찾으라고 했다. 그렇다고 에슬린을 황녀로 인정하겠다는 뜻은 아니었다.

그 예로, 에슬린은 이렇게 황녀궁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괜찮아요.”

에슬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어차피 돌아가게 될 테니까.”

황후는 철두철미한 여인이다.

임명식에서 에슬린이 의도한 것을, 황후가 모르지 않았을 것이다.

에슬린은 일부러 카르단을 몰아붙였다.

황녀로 등장했지만, 에슬린은 그 자리의 쟁점이 제 정체에 대한 것으로 흘러가게 두지 않았다.

카르단에 대한 온갖 의혹을 들먹이며 저와 관련한 의혹은 교묘히 피했다.

애초에 카르단을 뒤흔들고자 향한 자리였다.

‘그걸 모후께서 모르시지 않았을 거야.’

하지만 황후는 입을 다물었다. 침묵으로 에슬린을 인정했다.

그건 에슬린의 정체를 알고 있었다는 말과도 같았다.

의문을 갖지 않을 수 없다.

왜? 언제부터?

에슬린은 제 어깨를 감싼 테베트를 응시했다. 테베트는 줄곧 황후를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그렇다는 건…… 테베트 경과 관련이 있다는 건데.’

하지만 에슬린이 정말 알아야 하는 일이라면, 테베트가 먼저 털어놓았을 것이다.

그녀는 누구보다 테베트를 믿었다.

그래서 더 묻지 않기로 했다. 때가 온다면, 정말 필요하다면, 테베트는 말하지 말라고 해도 스스로 입을 열 테다.

“정말 돌아갈 겁니까?”

테베트가 물었다.

“그래야죠.”

“음.”

그는 딱히 내키는 기색이 아니었다.

“성배 없이 황녀궁을 열기란 쉽지 않을 겁니다.”

“아, 그건…….”

그 순간, 에슬린은 제 손끝에서 따끔거리는 감각을 느꼈다.

물끄러미 내려다보자, 검지와 중지 언저리에 빛나는 푸른 마력이 맴돌았다.

이건 신호였다. 마법 종이를 뒤집을 때가 된 것이다.

“예언 하나 할까요, 테베트 경?”

에슬린이 가뿐한 어투로 말했다.

“예언?”

“조만간.”

에슬린이 문손잡이를 잡은 채 몸을 틀었다. 테베트는 영문 모르겠다는 표정이었다.

“저들이 먼저 제게 돌아와 달라고 사정하게 될 거예요.”

천기를 누설한 예언자의 입술만이 유쾌한 호선을 그릴 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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