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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23화 (123/147)

123화

베르타니아 황궁, 귀족 회의장.

젊은 귀족이 몸을 기울였다. 살금살금 눈치를 살피며, 제 옆에 선 인물에게 속삭였다.

“지금 뭐 하고 있는지 들었나?”

“누가?”

“황녀 말이야.”

하. 옆자리 귀족이 어처구니없다는 소리를 냈다.

“황녀라니. 그걸 믿어?”

“그럼 자네는 안 믿나?”

젊은 귀족이 눈을 깜빡였다.

“황후 폐하께서 은근슬쩍 인정하는 눈치셨지 않은가.”

“흐음. 황후께서 언제나 옳으신 건 아니지 않나.”

심드렁한 목소리가 젊은 귀족을 깔보는 듯했다. 발끈한 젊은 귀족은 어쩐지 따지고 싶어졌다.

“하지만 보게. 리페리우스 공작과 저기, 저, 모리어스 후작까지 다 인정한……”

그 순간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그들은 일시에 자세를 가다듬었다.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위엄 있는 모습으로 황후가 회의장에 모습을 드러냈다.

이번엔 옆자리 귀족이 젊은 귀족에게 몸을 기울였다.

“자네 말이야, 눈이 있다면 줄 제대로 타게.”

“응?”

무슨 소리냐며 되물으려는데, 다시 우렁찬 문지기의 소리가 들렸다.

“카르단 황자 전하께서 드십니다!”

카르단 베르타니아가 퉁명스러운 얼굴로 걸어왔다. 그는 도열한 귀족들 사이를 지나 가장 앞줄에 섰다.

“이것 봐.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게 누군가?”

“아.”

“알겠지? 함부로 그 입 놀리지 않는 게 좋아. 카르단 전하께서 두 눈 시퍼렇게 뜨고 계시지 않나.”

“하지만…….”

“그 여자가 만약 진짜 황녀라면 황후 폐하께서 황녀궁을 여셨겠지. 폐하께서도 떨떠름하시니 가만 계시는 거 아니겠는가?”

그런가? 젊은 귀족은 조금 민망한 얼굴로 몸을 사렸다.

“하긴…… 카르단 전하께서 성배만 찾으시면 다시 황태자가 되시겠지.”

잠시 흔들렸던 카르단의 지지층은 프레이 백작을 중심으로 재결집했다.

그의 여러 논란 중, 황제 시해 미수 사건이 강도 높은 수사에도 불구하고 오리무중에 빠졌기 때문이었다.

아무런 증거가 없었다.

카르단은 소리 높여 누명이라고 주장했고,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이를 강하게 밀어붙였다.

모리어스 후작을 비롯한 반대파들이 어쩐지 잠잠했기에 카르단의 주장은 더 힘을 얻었다. 후작 일행이 내밀었던 유리병에선 아무것도 검출되지 않았다. 증인으로 언급된 정원사들도 행방불명이었다.

신전 마법사를 비롯한 의원 스무 명이 황제를 다시 진료했다.

그들은 최종적으로 황제가 지병으로 쓰러진 것이 맞는다고 결론 내렸다.

결국 황후는 증거 불충분으로 사건을 일단락해야 했다.

‘뭔가 더 있는 게 아니었던 건가?’

젊은 귀족은 폭풍 같았던 며칠을 떠올렸다. 마지막으로 황녀라 주장하던 여자의 얼굴이 생각났다.

‘떠들썩하던 등장치곤 조용한 퇴장이군.’

쩝, 입소리를 내는데 옆자리 귀족이 툭 쳤다.

“거, 쓸데없는 생각 말고 앞이나 보게.”

“그래…….”

그는 몸가짐을 바로 했다. 끝자리에 겨우 선 소귀족이지만, 이제 회의에 집중해야 했다.

황후가 입을 열었다.

“오늘 자리를 마련한 건, 남부 일에 대해 의논하고자 함이네.”

그녀는 높다란 단상의 두 번째로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다. 가장 높은 자리는 물론 황좌였다.

“카벤 백작, 남부 상황은 어떻지?”

이름을 불린 자가 앞으로 나섰다.

“포탈 예정지로 알려진 루트비아 주변은 모두 정리했습니다.”

격무에 시달린 듯 카벤 백작의 얼굴이 피로해 보였다.

그녀는 남부에서도 남동부 지역 대부분을 영지로 가지고 있었다.

“솔직히 루트비아 평야에서 두 번이나 대규모 전쟁이 일어나게 되는 것이니…… 썩 좋은 상황은 아닙니다.”

여기저기서 안타까운 탄식이 흘러나왔다.

루트비아에는 2년 전에도 대규모 마물 서식지가 나타난 적이 있었다.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이 8개월 동안 지휘해야 했을 만큼, 치열한 전투였다.

“큰일이군……. 기사단장, 전쟁 준비에 문제는 없는가?”

“예? 예예. 리페리우스 각하께서 워낙 철저하신 탓에, 준비에 차질은 없습니다.”

테베트는 이곳에 없었다. 군사 회의를 제외하고, 리페리우스가 이런 귀족 회의에 참석하는 일은 거의 없었다.

황후가 다시 내부를 훑었다.

“에볼튼 자작은?”

“임명식…… 큼. 며칠 전 신전 행사가 끝난 뒤 바로 남부로 돌아갔습니다.”

카벤 백작이 임명식을 신전 행사 따위로 치부하자, 카르단의 입매가 꿈틀 움직였다.

“열병 때문에 여전히 큰일인가 보군.”

“모두 임시 방책뿐이고, 딱히 명확한 치료법이 없으니 말입니다. 생활고를 견디다 못한 백성이 남부로 가는 길목을 막고 도적질을 한다는 이야기도 있습니다.”

휴, 그녀가 수심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열병 때문에 모든 교류가 줄어, 남부 전체에 타격이 큽니다.”

그러자 남부의 일부 중소 귀족들이 동의한다는 듯 격렬히 고개를 끄덕였다.

황후의 미간이 깊게 팼다.

“어떻게 생각하느냐, 카르단?”

제일 앞줄에서 카벤 백작을 노려보고 있던 카르단이 휙 고개를 돌렸다.

“예?”

“남부 상황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물었다. 설마,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야?”

“아뇨, 아닙니다. 그 뭐냐, 남부는 그러니까…… 뭐냐면.”

입 안에서 말들이 제멋대로 맴돌았다. 황후의 시린 시선이 거침없이 내리박혔다.

카르단은 제 옆에 선 프레이 백작을 흘끔거렸다.

“에르단 전하께서 지원단을 이끌고 가 계시지 않습니까?”

결국 프레이 백작이 나섰다.

“여태껏 없던 대규모 황궁 지원이니, 아마 이번 겨울은 버틸 겁니다. 봄이 되면 상황은 더 나아지겠죠.”

“그렇습니다! 지원단을 보내시지 않으셨습니까!”

카르단이 냉큼 장단을 맞추었다.

황후는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전쟁에 전염병에…… 남부에 악재가 겹쳤어. 하나라도 마음을 놓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휴, 황후의 긴 한숨이 카르단은 왠지 저를 향하는 것만 같았다. 어쩐지 자꾸 눈치가 보였다.

제기랄. 그는 문득 황후의 눈치를 보지 않고 패악 부리던 때를 떠올렸다. 그때가 좋았지.

어쨌든 황태자 임명은 물 건너갔다. 그러니 어쩔 수 있나? 일단 엎드리는 수밖에.

“리……페리우스 공작이 출전하지 않습니까. 유달리 공들여 준비하는 것 같기도 하고, 그 공작이 지는 건 못 봤으니…… 괜찮지 않겠습니까?”

마른 입술을 축이며 말을 끝맺었다. 떠올리기만 해도 증오스러운 인간을 긍정적으로 말하는 것만으로 입에 가시가 돋는 느낌이었다.

황후의 표정은 딱히 나아지지 않았다.

“근본적인 해결책이 필요한데.”

“폐하!”

옆문을 통해 시종이 급히 들어섰다.

“무슨 일이냐?”

황후가 엄한 목소리로 물었다.

시종은 무언가를 받쳐 들고 황후 앞에 빠르게 와 섰다.

“남부에서 급보가 왔습니다.”

“누가 보낸 거지?”

“에르단 황자님이십니다.”

그 순간 짧은 정적이 맴돌았다.

“……에르단이?”

황후가 중얼거렸다.

손을 뻗은 건 카르단 맞은편에 서 있던 모리어스 후작이었다.

“먼저 살펴봐도 괜찮겠습니까, 폐하?”

몇 계단 위에 앉은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후작이 빠른 속도로 편지를 읽기 시작했다. 마법으로 급하게 보낸 것인지 종이가 조금 푸르렀다.

“이건……!”

모리어스 후작이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편지를 쥔 손이 미세하게 떨렸다.

황후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일이지, 후작?”

“폐하.”

모리어스 후작은 황후와 주변 귀족들을 넓게 훑어보았다. 그러곤 울림 있는 목소리로 정확하게 말했다.

“남부 열병에 대한 치료법을 알고 있는 이들이 있다고 합니다.”

“뭐라고?”

귀족들이 놀란 얼굴을 감추지 못했다.

가장 흥분한 건 남부 대귀족 중 하나인 카벤 백작이었다.

“그게 대체 누굽니까! 후작님!”

“크세로이츠인들이다.”

“…….”

실내는 깊은 정적에 빠져들었다.

황후가 팔걸이를 조금 세게 움켜쥐었다.

“크세로이츠인?”

카르단이 멍하게 중얼거렸다. 아주 생소한 것을 들은 듯한 표정이었다.

황후는 손에 힘을 풀고, 모리어스 후작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그래서, 후작, 그 치료법은 무엇이라고 적혀 있지?”

후작은 몹시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게…… 알려 주지 않는다고 합니다.”

“뭐?”

“치료법을 알고 싶다면 정식으로 교역 협상을 해야 한다고…….”

“그런 건방진!”

귀족들이 거세게 반발했다.

모리어스 후작은 말해 놓고도 참담함을 감출 수 없어 질끈 눈을 감을 뿐이었다.

“에르단이…… 그래서 황궁에 도움을 요청한 거군.”

황후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교역이라뇨? 애초에 어떤 작자들인지도 모르는데!”

카벤 백작이 가슴을 쾅쾅 치며 말했다. 모리어스 후작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아마 평범한 인물들은 아닐 것이네. 치료법을 대가로 협상을 요청하는 솜씨가 말이야.”

“그럼 저흴 시험하고 있는 거란 말입니까?”

모리어스 후작은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카벤 백작은 더 참지 못했다. 전쟁 때문에 안 그래도 고단한 제 영지다. 여기에 열병까지 얹히는 건, 정말 사양이었다.

그녀뿐만이 아니었다.

남부 주변에 영지를 가지고 있는 모든 귀족들이 초조한 얼굴로 입술을 뜯었다.

“협상한다면 대체 뭘 제시해야 하죠? 크세로이츠인들이 원하는 것…… 그걸 누가 안단 말입니까?”

백작의 물음에, 쉽사리 답하는 이는 없었다.

“저…….”

그때 누군가의 손이 조심스럽게 올라갔다.

황후가 그 손의 주인공을 향해 시선을 주었다.

“뭐지, 기사단장?”

그는 조금 어리둥절한 표정이었다.

“이 황궁에 크세로이츠인이 한 명 있지 않습니까? 요즘 통 안 보이지만.”

벅벅, 기사단장이 거친 손을 들어 뒤통수를 긁었다.

“그러니 물어보면 되지 않겠습니까? 그놈 행방을.”

귀족들은 모두 멍청한 얼굴이 되어 그를 응시했다.

그러고 보니 그들은 모두, 이 황궁에서 크세로이츠인을 한 번씩 본 적이 있었다.

“누구에게?”

카벤 백작이 물었다.

“그 왜 있잖습니까.”

조금 말을 얼버무리던 기사단장이 한 단어만큼은 명확하게 발음했다.

“황녀.”

순간 사람들의 숨이 멈춘 것 같은 착각이 들었다.

그는 아차차, 눈치를 살피며 덧붙였다.

“……인 것 같은 여자?”

물론 너무 작아 잘 들리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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