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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24화 (124/147)

124화

베르타니아는 아주 오래전 크세로이츠 대륙에 닿았다.

두 나라 간 이렇다 할 교류는 없었다.

대륙을 잇는 바닷길이 몹시 험하기도 했거니와, 베르타니아인들은 다른 대륙에 썩 관심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들은 슐든 대륙의 오랜 지배자였다. 위험을 무릅쓰고 미지의 것을 추구할 이유가 없었다.

그마저도 성배가 사라지고, 베르타니아 내부의 후계자 전쟁이 치열해지면서 황실의 관심은 더욱 내부로 집중되었다.

크세로이츠와의 교류가 수년에 한 번, 가뭄에 콩 나듯 이루어지게 된 건 당연한 수순이었다.

그마저도 민간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크세로이츠의 일방적인 방문이었을 뿐이다.

그런 그들에게 남부 문제에 대한 해답이 있다니.

사람들은 그야말로 예상치 못한 곳에서 뺨을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이 문제의 화두가 이국으로 뻗어 나갈 줄은,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으리라.

황후는 그 즉시 리페리우스 공작저에 사람을 보내라고 명했다.

에슬린을 입궁시키라는 것이었다.

“말도 안 됩니다.”

프레이 백작은 거세게 반대했다.

하지만 카벤 백작을 비롯한 대다수의 남부 귀족들이 찬성했다. 특히 모리어스 후작을 따르는 중소 귀족들의 입김이 거셌다.

“확인해볼 가치는 있습니다.”

작은 실마리라도 붙잡아 남부 사태 해결에 힘을 모아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다음 날, 귀족들은 다시 회의장에 모였다. 프레이 백작은 카르단과 함께 반발하듯 참석하지 않았다.

귀족들은 조금 날 선 얼굴로 에슬린을 기다렸다.

에슬린을 데리러 갔던 시종이 돌아왔다.

“뭐라고? 편지이?”

회의장에 커다란 동요가 일었다.

“건방지군! 분명 황궁에 출석하라고 하지 않았어?”

“했, 했습니다만.”

“근데 편지 쪼가리를 보내?”

시종이 땀을 뻘뻘 흘렸다.

귀족들은 못마땅한 얼굴로 눈썹을 씰룩였다.

“가져오너라.”

황후만이 차분한 얼굴로 편지를 향해 손을 뻗었다. 이번엔 그녀가 직접 봉투를 뜯었다.

“뭐라 적혀 있습니까?”

모리어스 후작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젝스 에티우드의 행방은 모른다고 하는군.”

나직한 대답에 여기저기서 분개한 목소리가 터져 나왔다.

“하! 거 보십시오! 역시 가짜인 겁니다.”

“속을 뻔했군…….”

“기사단장이 괜한 소릴 해서!”

귀족들은 잔뜩 역정을 내며 그것 보라며 소리쳤다.

카벤 백작은 물론 당황스러웠지만, 그 모습이 조금 웃겼다.

일말의 기대가 있었으니, 다들 이 자리에 온 게 아닌가?

황후가 편지를 내려놓았다.

“하지만 크세로이츠인들이 원하는 것은 알겠다고 하는군.”

“예?”

항의하던 귀족들이 일시에 말을 멈추었다.

“예전에 젝스 에티우드에게 들은 적이 있다고 해.”

카벤 백작은 냉큼 나섰다.

“그게 뭐랍니까?”

황후는 입을 다물고 카벤 백작을 응시했다. 눈동자를 움직여 멍하게 저를 올려다보는 다른 귀족들도 바라보았다.

“그건…….”

제 입이 열리기만을 기다리는 표정을 지그시 내려다보았다.

황후는 어쩐지 조금 에슬린이 이해되는 기분이었다.

이래서 그 아이가 이럴 때 웃는 거군.

“그건?”

꿀꺽, 누군가 궁금해 죽을 것 같다는 얼굴로 침을 삼켰다.

그들은 어느새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였다.

긴 정적. 느리게 열리는 입술.

“그건 다음 회의 때 밝히겠다는군.”

“하!”

참았던 호흡이 여기저기서 터졌다.

“연락은? 그 여자에게 연락은 왔답니까?”

귀족들이 체통도 지키지 않은 채 성급하게 들어왔다. 회의가 시작되기 한참 전이었다.

그들은 저들끼리 모여 정답을 추측했다.

너도 궁금하고, 나도 궁금하고, 모두가 궁금해하니 왠지 더 맹렬히 궁금해지는 기분이었다.

황후가 등장했다. 그녀가 자리에 앉기도 전, 그들은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물었다.

“폐하, 연락이 왔습니까?”

“곧 약속한 시각이니 기다려 보지.”

이번에야말로 시종과 함께 그 모습을 드러내리라.

귀족들은 기대에 찬 얼굴로 출입구를 응시했다.

곧 누군가의 발소리가 들렸다.

드디어!

“아, 추워.”

하지만 등장한 건 에슬린이 아니었다.

엣취! 남자는 잔뜩 귀찮은 얼굴로 코를 마셨다. 익숙한 얼굴이었다.

“대마법사……?”

카벤 백작이 중얼거렸다. 디에리안이 그녀를 흘끗 보았다.

“지금은 그냥 마법사입니다만.”

자박, 자박 걸어 들어온 그에게서 매캐한 탄내가 났다. 신전에서 뭔가를 지지고 볶다 온 듯했다.

프레이 백작이 없는 게 다행이었다. 저런 후줄근한 장남을 봤다면 수치심에 견딜 수 없었으리라.

“자네가 여긴 어쩐 일이지?”

황후의 물음에 디에리안이 입술을 구겼다.

“황녀 전하의 전언을 전하러 왔습니다.”

“전언?”

큼, 디에리안이 과장한 동작으로 목을 가다듬었다.

곧 쩌렁쩌렁한 목소리가 울렸다.

“아직도 정답을 모르고 있는 그대들이 실망스럽기 이를 데 없소! 힌트를 주지!”

그러곤 휙, 손가락을 움직여 회의실의 모든 창문을 열어 버렸다.

밖은 거센 눈발이 한창 날리고 있었다.

“악, 차거!”

“뭐 하는 짓이야!”

귀족들이 몸을 움츠리며 반발했다. 눈보라가 몰아닥쳐 실내 온도가 급격히 낮아졌다.

디에리안은 그 꼴이 우습다는 듯 얼굴을 비틀어 웃을 뿐이었다. 그러는 본인도 이를 닥닥 부딪치고 있었다.

“느끼셨습니까? 겨울의 낭만. 그럼, 이만.”

하나도 낭만적이지 않은 얼굴로 마법사가 사라졌다.

하녀들이 기겁하며 창문을 닫고 화로를 들였다. 귀족들은 겉옷을 입으며 달달 떨었다.

더는 참을 수 없었다.

“폐하! 이대로 보고만 계실 겁니까!”

“놀리는 것도 아니고! 이게 무슨 행패죠?”

“그 여자를 당장 강제로라도 끌고 오십시오!”

누군가가 그렇게 소리쳤다.

“어떻게?”

“예?”

“그 애는 황궁에 없지 않나?”

황후는 마지막으로 소리친 귀족의 얼굴을 냉랭히 응시했다.

“리페리우스 공작저는 황제 폐하께서도 함부로 하실 수 없는 불가침 영역인데.”

휘오오-.

다 닫지 못한 창문으로 눈보라가 들이쳤다.

“대체 어떻게?”

그다음 날에는 더 기묘한 일이 일어났다.

회의에 참석한 귀족 모두에게 알 수 없는 선물이 도착한 탓이었다.

“…….”

카벤 백작은 멍하게 제게 온 푸른 알맹이를 바라보았다.

“포도…….”

겨울에 재배한 바로 그 품종.

카벤 백작은 영지를 잘 떠나지 않는 인물이었지만, 이 포도에 대해선 얼추 알고 있었다.

한때 수도 과일 상점에서 유행처럼 번졌다고 했다. 그것도 물론 황녀가 죽은 뒤로는 서서히 사라져 버렸지만.

근데 이걸 누가 보낸 거지?

어제 일도 그렇고, 참 알 수 없는……

“아!”

문득 깨달음이 스쳤다.

“책…… 책을 찾아와!”

카벤 백작은 벌떡 몸을 일으켰다.

사용인들을 닦달해 저택 내 서재를 모두 뒤졌다. 잠시 머무는 타운 하우스라 책이 많진 않았다.

하지만…….

‘그래, 황녀가 대놓고 정답을 알려 준 거였군!’

크세로이츠인들이 원하는 것!

그녀는 황후에게 달려가기 전, 한 번 더 제 가정을 책으로 확인했다.

아주 오래전에 쓰인 역사서의 몇 줄이면 충분했다.

〔어느 한계선을 넘자, 바다 기온이 급속도로 떨어졌다. 그렇게 항해해 도착한 곳은 봄과 여름이 없는 영원한 겨울 대륙이었다.〕

탁, 책을 덮은 그녀가 몸을 일으켰다.

그길로 마차를 불러 황궁으로 향했다.

황후는 응접실에 있었다. 이미 다른 귀족들이 황후에게 알현을 청한 상태였다.

“카벤 백작.”

“알았습니다! 폐하!”

백작은 다소 성급하게 말했다. 그러다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황후의 응접실에 앉은 인물들이 익숙했던 탓이다.

그들은 모두 어제 회의장에 있던 자들이었다.

“백작도 받았나 보군.”

모리어스 후작이 말했다.

턱짓으로 테이블 위를 가리키는데, 그 위에는 보기에도 탐스러운 포도송이가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그럼 다들……?”

카벤 백작은 실내를 쭉 훑어보았다.

책을 찾아본다고 자신이 가장 늦은 것 같았다.

카벤 백작은 순간 묘한 기분이 들었다. 어쩐지…….

그녀는 손에 든 포도를 내려다보았다.

어쩐지 놀아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그럼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지.”

황후가 근엄한 얼굴로 팔걸이에 손을 얹었다.

하녀 하나가 의자를 준비해 왔고, 카벤 백작은 얼떨떨한 얼굴로 거기에 앉았다.

“크세로이츠는 계절 변화가 거의 없는 추운 대륙이라고 들었네. 그렇다면 농작물을 키우는 데에도 많은 어려움이 따를 터.”

“맞습니다.”

모리어스 후작이 맞장구쳤다.

“계절에 영향을 받지 않는 작물의 재배법이야말로 그들에게 필요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그래. 한겨울에 나무에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는 그 기적 같은 기술. 하지만…….”

거침없이 말을 잇던 황후가 어느 순간 입술을 다물었다. 그 침묵의 이유를 이 자리에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다.

“그 기술의 핵심을 아는 건.”

“…….”

“에슬린 황녀뿐이지.”

내부에 짧은 침음성이 터졌다.

웃기게도, 황녀라는 말에 모두가 한 하녀를 떠올렸다.

“황녀뿐이라고 단정하기엔 이르지 않겠습니까?”

누군가 조심스레 반론을 제기했다.

“신전에 한 사람 더 있을 텐데요…….”

황후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그와 같은 반응을 예상한 사람 같았다.

“디에리안 프레이를 불러와라.”

시종이 재빨리 모습을 감췄고, 정신없이 황후궁을 떠났다.

디에리안 프레이가 모습을 드러낸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그는 여전히 몹시 피로하고도 추레한 행색으로 황후궁 응접실을 밟았다. 헝클어진 녹색 머리가 바람에 휘날려 더 엉망이 되어 있었다.

“왔습니다.”

그가 심드렁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황후가 디에리안을 슥 보며 말했다.

“겨울 포도 재배법에 대해 말하라.”

“네?”

“예전에 네가 황녀와 함께 개발한 겨울 포도 재배 기술에 대해 말이다.”

디에리안은 쩝, 입맛을 한 번 다셨다.

테이블 위에 놓인 풍성한 포도 더미로 마법사의 시선이 닿았다.

“그거 몇몇 귀족령에 전파된 걸로 아는데요. 그치들에게 물어보심이 어떻습니까?”

“리페리우스 공작령과 젤킨스 자작령이 전부 아니냐!”

귀족 중 한 명이 소리쳤다.

“게다가 그들에게도 모든 걸 다 전달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다.”

황후의 말이 맞았다.

재배법은 에슬린의 영지와 일부 귀족령에 전파되었다.

하지만 완전한 공개는 아니었다. 종자를 제공하고, 이를 키워 내는 방법만 배포했을 뿐이다.

사실 그것 또한 에슬린의 실험에 불과했는데, 최대한 다양한 지역에서 재배 경험을 쌓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당시엔 괴짜 연구라고 다들 관심조차 두지 않던 일이다.

베르타니아는 굳이 겨울에까지 포도를 생산하지 않아도 이미 포도가 충분했기 때문이었다.

에슬린의 포도가 잠깐 인기를 끈 건, 처음엔 신기함 때문이었고 이후엔 색다른 맛 때문이었다.

“결국 핵심 기술을 알고 있는 건 너와, 에슬린 베르타니아뿐이야. 그러니 말해.”

“아하. 결국 만만한 게 저였단 말이군요? 아이고, 서러워라.”

디에리안이 몸을 움츠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황후가 긴 숨을 내쉬었다. 하여튼 변한 거라곤 하나도 없는 마법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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