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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25화 (125/147)

125화

“프레이 영식.”

정확히 내뱉은 말에 디에리안이 소름 끼친다는 얼굴을 했다.

황후는 지그시 그를 응시했다. 그만 놀고 적당히 말하라는 의미였다.

“기분을 시궁창에 처박는 방법도 참 여러 가지…… 뭐, 됐습니다. 아무튼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그건 기후 조절 마법이 핵심입니다.”

“기후 조절 마법?”

“예. 근데.”

디에리안이 입술을 꿈틀거렸다. 웃으려는 것 같았다.

“저도 다 까먹었습니다.”

“뭐?”

그가 참았던 걸 터뜨리듯 와다다 지껄였다.

“제가 하루에 얼마나 많은 마법을 만들고 실험하는 줄 아십니까? 썼다, 지웠다, 썼다, 지웠다. 신전 그 멍청이들이 조금만 더 도움이 됐어도! 하여튼 그딴 낡은 수식까지 모조리 기억하려면 머리가 터져 버릴 겁니다.”

“대마법사!”

“그러니까 대마법사 아니라고 말씀드렸습니다만, 카벤 백작님.”

그러나 아까보다 표정은 한결 나아진 상태였다.

카벤 백작을 돌아보며, 그가 지나가는 투로 덧붙였다.

“아, 기록은 남아 있을 겁니다. 전하께서 연구서로 남기셨거든요.”

“기록이 남아 있다고? 어디에?”

백작이 덥석 물었다. 잘 나불대던 디에리안이 갑자기 침묵했다.

“어디 있냐고!”

냉랭하기 그지없던 마법사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걸 왜 저에게 물으십니까?”

“응?”

“쓴 사람에게 물어보십시오. 전 그게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데요.”

“아!”

카벤 백작은 새삼 깨달은 표정을 지었다. 그녀는 잽싸게 황후를 돌아보았다.

“폐하!”

톡, 톡. 황후가 팔걸이를 두드렸다. 생각에 잠긴 표정이었다.

수십 쌍의 눈동자가 황후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톡, 톡. 카벤 백작만 괜히 애가 탔다. 이러고 있는 동안에도 남부 상황은 나빠지고 있을 것이다. 그녀는 이제 정말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었다.

‘빨리, 빨리 불러오라고 하십시오!’

그때 황후의 움직임이 멈추었다. 무겁던 입술이 열렸다.

“리페리우스 공작저에 다시 연락을 넣어라.”

기다리던 말이 흘러나왔다.

“지금 당장 그 아일 데려오라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말이야.”

“그 여자가 연구서의 행방을 알고 있다는 말씀이십니까?”

누군가 소리쳤다. 황후가 그쪽으로 싸늘한 시선을 던졌다.

“차라리 잘된 일이지 않은가.”

“무엇이 말입니까?”

“다들 그동안 궁금했던 거 아닌가?”

황후는 냉정한 얼굴로 입술을 비틀었다.

“그 아이가 정말 황녀인지, 아닌지.”

“그, 그건…….”

“이건 좋은 기회겠지. 그 애가 크세로이츠인들이 원하는 것을 내놓는다면, 우린 치료법은 물론.”

“…….”

“그 아이에 대한 일차적인 검증도 할 수 있을 테니 말이야.”

황녀밖에 모르는 연구 기록.

그 행방을 안다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옷깃이 바스락거리는 소리조차 나지 않았다.

그 침묵을 깬 건 다시 황후였다. 그녀는 근처에 황망히 선 시종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시종은 무엇을 하는가?”

“예?”

“그 앨 당장 가서 데려오지 않고.”

“하, 하지만…….”

시종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말을 잇지 못했다. 그는 요 며칠간 리페리우스 공작저를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아시잖습니까. 공작저에서 꼼짝도 하지 않는데, 과연 이번에라도 나올지…….”

나오라고 불렀더니 편지가 나왔다.

얼굴만이라도 비쳐 달라고 했더니 애꿎은 이가 대신 얼굴을 비쳤다.

이번이라고 다를까? 갈 때마다 리페리우스 공작이 시퍼렇게 눈을 뜨고 지켜보는데?

첨예한 화살촉 같은 시선이 꽂혔다. 제 무능을 주인께서 탓하시는 것 같아 시종은 손이 다 저렸다. 아니 근데 그게 진짜 쉬운 일이 아니란 말입니다…….

휴, 황후가 긴 한숨을 내쉬었다.

“어쩔 수 없군. 그대들 중 몇몇이 가서 데려오도록 해.”

“예?”

귀족들은 얼빠진 표정을 했다.

데려오라고? 자신들이 직접?

말이 데려오라지, 사실상 모셔 오라는 뜻과 같았다. 귀족을 보낸다는 건 그런 의미였다.

“어쩔 수 없지 않은가?”

“하지만! 폐하!”

“지금 체면이 중요한가? 사정해서라도 데려오란 소리야.”

황후는 청천벽력 같은 소리를 아무렇지 않게 했다.

“베르타니아 남부가 달린 중요한 일이지 않은가.”

“알겠습니다!”

대뜸 대답한 건 카벤 백작이었다. 그녀의 얼굴은 아까부터 결의로 가득 차 있었다.

“알겠습니다.”

모리어스 후작도 슥 몸을 일으켰다. 그러자 그를 따르는 귀족들이 어쩔 수 없다는 듯 슬금슬금 일어섰다.

이 모든 걸 지켜보던 디에리안의 입매가 찔끔 떨렸다.

‘잘들 움직이는군?’

마치 한 편의 마리오네트 연극을 보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 줄을 쥐고 있는 사람은 지금쯤…….

* * *

에슬린은 지루한 듯 하품했다.

쭉 기지개를 켰다. 창문을 열자 상쾌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나른하던 정신이 확 깨어났다.

아마 지금쯤이려나?

에슬린은 천천히 책상 위를 정리했다. 어차피 특별히 챙길 건 없었다.

“으음…….”

마법 종이를 내려다보는 에슬린의 미간이 살짝 구겨졌다.

남부의 마법사는 참 글씨가 악필이었다.

“암호 해독 수준이야, 진짜.”

나이가 많아 팔에 힘이 떨어졌기 때문이라거나, 눈이 잘 보이지 않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성질이 급한 거다.

하고 싶은 말을 다 적기에, 문자는 그녀에게 너무 불편한 소통 수단인 것이다.

‘그 스승에 그 제자라고나 할까.’

에슬린은 레비브에서 만난 노인의 얼굴을 떠올렸다.

어쨌든 이렇게 남부 소식을 전해 주고 있으니 그것만으로 고마운 일이다.

켈라가 아니었다면 아마 미리 준비하지 못했으리라.

“에슬린 님.”

문이 열렸다. 에슬린은 그때 마지막 남은 가방의 입구를 닫고 있었다.

“황궁에서 또 시종이 왔습니다.”

“시종?”

하녀가 고개를 끄덕였다.

밖이 소란스러웠다.

“이번엔 귀족님들께서 함께 오셨습니다. 반드시 입궁하라는 폐하의 엄명 때문인데…….”

단조롭게 말을 잇던 하녀가 갑자기 에슬린과 그 주변을 훑는다.

“준비를 이미 마치신 겁니까?”

“그래. 그보다 하인들을 불러 주겠어? 내가 떠나고 잠시 뒤에 이 짐들을 보내도록 해.”

“네? 네…….”

에슬린은 잊은 게 없는지 한 번 더 확인했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가방에는 거의 서류뿐이었다.

그녀가 직접 챙긴 거라곤 테베트가 준 귀걸이 한 짝 정도일까.

귀걸이 상자가 든 주머니를 툭툭 두드리며 에슬린은 방을 나섰다.

“아, 침실 화로들은 잘 닦아 넣어 두는 게 좋겠어.”

문을 넘던 그녀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말했다.

“화로요?”

“오랫동안 켤 일이 없을 테니 말이야.”

하녀는 잠시 그 말뜻을 헤아렸다.

“먼지 끼고 녹슨 화로만큼 나중에 골치 아픈 게 없거든.”

그건 진짜 힘들어. 에슬린이 어제 꾼 악몽을 복기하듯 중얼거렸다.

하녀는 멍한 얼굴로 서 있다가 그녀의 뒤를 한발 늦게 쫓았다.

계단을 내려가니 사람들이 바글거렸다.

“모시러 왔습니다.”

모리어스 후작이 말했다.

에슬린은 별채 현관에 모인 이들을 응시했다. 일부러 아주 천천히, 신중하게 계단을 밟았다.

그 꾸물거림을 참지 못한 어떤 이가 계단을 뛰어올라 왔다.

“저, 황궁에서 급하게 모셔 오라고 하셔서……!”

에슬린은 그녀를 알았다. 남부 대귀족 중 하나인 카벤가의 가주였다.

살이 조금 빠졌군. 에슬린이 카벤 백작을 보며 생각했다.

모리어스 후작 뒤에 몰려 있는 건 그의 추종자들이자, 한때 에슬린의 세력 중 일부였던 이들이었다.

탁탁탁! 이번에 참지 못하고 계단을 오른 건 황후궁의 시종이었다.

“이번에도 편지만 주시는 건 안 됩니다!”

그가 절망적으로 소리쳤다.

겉옷을 입고 나오지 않은 에슬린을 봤을 때부터 시종은 이미 세상이 무너진 것 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제발!”

시종의 간절함에 카벤 백작은 괜스레 초조해졌다.

설상가상으로 에슬린이 계단 손잡이를 쥔 채 층계참에서 멈추었다.

이번에도 움직이지 않겠다는 건가?

아니, 안 된다.

이제 더는 시간이 없다.

해결책이 코앞에 있었다. 불쌍한 남부인들이 하루라도 덜 고통받을 수 있었다.

카벤 백작은 망설이지 않았다.

그녀는 정말이지, 이제 지푸라기라도 붙잡고 싶은 심정이었다.

“전하!”

털썩, 백작이 에슬린 앞에 무릎을 꿇었다.

“함께 황궁으로 가 주십시오!”

누구든, 우리 남부를 위해 뭐라도 해 주십시오!

그녀는 울컥 뜨거운 것이 치고 올라옴을 느꼈다.

불현듯 깨달았다. 지금 이 여자가 정말 황녀인지는 제게 중요하지 않음을.

제 어려움을 해결해 주는 자가 황녀다.

제 고통을 외면하지 않는 자가 황족이다.

부들부들 떨리는 카벤 백작의 어깨에 누군가의 손이 내려앉았다. 백작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깊고 푸른 눈동자가 저를 똑바로 내려다보고 있었다.

“당연히 그럴 생각이었습니다, 카벤 백작.”

단단한 심이 느껴지는 목소리.

카벤 백작은 꿀렁꿀렁 넘어오는 뭔가를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겉옷을 가져와라.”

에슬린이 명령했다.

겉옷, 겉옷! 시종이 허겁지겁 저택 하녀들에게 외쳤다.

에슬린은 카벤 백작을 일으켜 밖으로 나갔다.

별채 앞엔 그야말로 화려하기 그지없는 황궁 마차가 기다리고 있었다.

귀족들이 그녀가 걷는 길을 따라 늘어서 있었다.

몇몇은 긴가민가한 얼굴로, 몇몇은 얼떨떨한 얼굴로, 몇몇은 여전히 불신에 찬 얼굴이었다.

이젠 딱히 상관없었다.

“마차 문을 열어라.”

모리어스 후작의 말에 발판이 놓이고, 마차 문이 열렸다.

오르려는데, 문득 에슬린의 시야에 저 멀리 본채가 걸렸다.

“…….”

창가에 선 여인.

거리가 멀어 그녀는 아주 흐릿하게 보였다. 하지만 에슬린은 알 수 있었다.

사티나와 정확하게 눈이 마주쳤다는 것을.

에슬린은 차갑게 미소 지었다. 더 시선을 주지 않고 마차에 올랐다.

“공작님께선 안 계신가 보군요.”

모리어스 후작의 말에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테베트는 황궁에 있었다. 기사단에 볼일이 있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에슬린을 배웅하고 싶지 않아 했다.

‘차라리 황궁에서 당신을 마중하죠.’

멀어지는 모습을 보는 건 참을 수 없는 일이라고 그는 속삭였다.

“황궁으로 출발하겠습니다!”

티 나게 혈색이 좋아진 시종이 외쳤다.

마차가 움직였다. 리페리우스 공작저가 멀어졌다.

에슬린은 천천히 황궁으로 향했다.

모리어스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을 줄줄이 단 채로.

그건 본의 아니게 수도를 가로지르는 행렬이 되었다.

백성이 그 행렬을 보며 뭐라고 쑥덕거렸을지는.

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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