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뭐라는 거야?”
에르단은 책자를 대충 덮었다.
뭔 소린지 하나도 알아먹을 수가 없었다.
“이런 걸 어떻게 연구한 거야?”
그는 떨떠름하게 내뱉었다.
제 쌍둥이지만, 가끔 질릴 정도다.
“전하, 정말 크세로이츠인들을 만나실 겁니까? 방금 도착하셨는데 좀 쉬심이…….”
에볼튼 자작가의 시종이 물었다.
“내가 쉬고 있으면 걔가 날 잡아먹을걸.”
“네?”
에르단은 훌쩍 몸을 일으켰다. 옆구리에 에슬린의 연구서를 끼고 걸음을 옮겼다.
《이걸 가지고 서둘러 남부로 가, 에르단. 크세로이츠인들과 협상하는 데 도움이 될 거야.》
떠나기 바로 직전, 에슬린은 이 연구서와 함께 그런 내용의 쪽지를 보내왔다.
‘그나저나 크세로이츠인들이 치료법을 가지고 있는 줄 어떻게 알았지?’
남부에 그 애의 소식통이 있나?
걸음을 서두르자, 연구서가 옆구리에서 주륵 미끄러지려 했다. 그는 소중한 자료를 손에 쥐었다.
“근데 얜 이거 없이 어떻게 할 셈인 거지?”
“예?”
“아니야.”
절레절레, 그는 길게 고개를 흔들었다. 골똘히 생각할수록 머리만 아플 뿐이다.
그냥 에슬린이 말한 대로 움직이기나 하자.
‘황궁 사람들은 알려나? 내가 이걸 진작 갖고 왔다는 걸…….’
모르겠지.
“에휴.”
에르단은 에슬린 손바닥 위에서 신나게 춤추게 될 인물들을 떠올렸다.
살살 해, 살살.
어쩐지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 * *
에슬린은 황궁 회의장으로 향했다.
모리어스 후작과 카벤 백작이 그녀의 양옆에 섰다. 과거 추종자들이 쭈뼛쭈뼛 그 뒤를 따랐다.
“나 참, 별 광경을 다 보는군.”
미리 모여 있던 귀족들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혀를 찼다. 해괴하기 그지없는 모습이다.
소문을 들었는지, 프레이 백작과 카르단의 모습도 보였다.
“저, 저……!”
카르단이 허공에 삿대질하며 날뛰었으나, 에슬린은 그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았다.
저 위 단상에 앉은 황후와 눈이 마주쳤다.
“부르심을 받고 왔습니다.”
에슬린이 입을 떼자 신경에 거슬리던 소음들이 일시에 멎었다.
에슬린은 이전 임명식 때처럼 치장한 모습이 아니었다.
옷은 깔끔하지만 소박했으며 흔한 장신구 하나 매달지 않았다. 머리는 단정하게 빗어 내렸을 뿐이었다.
그 때문인지 그녀의 형형한 눈빛이 더욱 두드러지는 것 같았다. 흐트러짐 없는 자세와 여유로운 걸음걸이가 더해져 어쩐지 시선을 뗄 수 없었다.
카벤 백작은 문득 한 사람을 그 사람으로 보이게 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외모는 그 사람의 구성 요소 중 어느 정도로 중요할까?
“널 부른 이유를 알 것이다.”
“압니다.”
“크세로이츠인들과의 협상에 쓸 만한 것을 내줄 수 있겠느냐?”
황후가 냉엄한 얼굴로 물었다.
에슬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매끈한 입술에 살짝 미소가 떠올랐다 사라졌다.
“그것은 어떤 자격으로 드려야 합니까?”
“저 건방진……!”
카르단이 이를 갈았다.
황후는 그를 손 표시만으로 조용히 시킨 뒤, 다시 에슬린을 바라보았다.
“네가 해결책을 내놓는다면, 그게 곧 네 자격에 대한 증명이 되겠지.”
그 말이면 충분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인 뒤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겨울 작물 재배는 기후 조절 기술이 핵심입니다.”
기후 조절! 마법사와 동일한 말이었다. 카벤 백작이 긴장한 얼굴로 침을 삼켰다.
“저는 그 연구 자료를 모두 기록해 두었으며, 그 자료는 저기…….”
슥, 에슬린의 곧은 손가락이 창문 너머 어딘가를 향했다.
“황녀궁에 있습니다.”
사방이 막힌 실내에서도 그녀는 정확히 황녀궁이 있는 방향을 가리켰다.
“물론 저밖에 모르는 비밀 장소에 말입니다.”
“…….”
“그 자료를 내드리죠.”
황후는 지그시 그녀를 응시했다.
한시가 급한 카벤 백작이 발을 동동 굴렀다.
“폐하!”
황후는 깊게 숨을 들이마신 뒤, 지체 없이 내뱉었다.
“황녀궁을 열……”
“폐하, 기다려 주십시오.”
그때 잠자코 있던 프레이 백작이 나섰다.
탁, 탁. 지팡이를 내리누르며 백작이 황후 앞에 섰다.
“무슨 수작을 부려 놨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먼저 수색하게 해 주십시오.”
그는 날카로운 눈빛으로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정말 비밀 장소가 있는지 없는지 어떻게 압니까? 아무래도 황녀궁에 있는 연구서를 집어 온 뒤, 자기만 아는 비밀 장소였다고 우길 셈인 것 같은데.”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사실은 누구나 찾아올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럴 수도 있겠군, 귀족들이 수군거렸다.
황후는 일순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지독한 무표정은 무슨 생각인지 짐작할 수조차 없게 했다.
프레이 백작이 탁! 바닥을 내리치며 시선을 집중시켰다.
“그러니 먼저 조사하게 해 주십시오.”
황후는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그리고 덧붙였다.
“그 누구도 찾지 못한 걸 저 아이가 찾아낸다면, 더 확실한 증명이 되겠어.”
예리한 시선에 프레이 백작이 입매를 단단히 굳혔다.
그 또한 알고 있는 것이다. 이건 제게도 양날의 검이 되리라는 것을.
“뭐가 됐든…… 지금 황녀궁을 열어야 하는 건 맞겠군. 그렇지, 프레이 백작?”
“그렇……습니다.”
프레이 백작이 떨떠름하게 대꾸했다.
황후의 냉랭한 눈동자가 저 멀리 황궁 기사들을 향해 움직였다. 공교롭게도 그들이 선 곳은 황녀궁이 있는 방향과도 일치했다.
“여봐라.”
황후는 사실 아주 오랫동안 이 말을 하고 싶었는지도 모른다.
“당장 황녀궁을 열어라.”
* * *
황후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이 황녀궁으로 향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회의장에 있던 이들도 그 뒤를 따랐다.
‘황녀궁을 수색하는 걸 제 눈으로 보게 해 주십시오.’
에슬린이 그렇게 말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황녀궁에 도착한 사람들은 의외의 인물을 맞닥뜨렸다.
“……리페리우스 공작?”
황녀궁 정문을 지키듯 선 남자가 황후에게 짧게 인사했다. 기사의 망토가 위세 있게 펄럭였다.
“기사와 병사들을 부르셨다길래 대령했습니다.”
딱딱하지만 정중한 말투였다.
그 말대로 테베트 뒤엔 수많은 병사와 기사들이 있었다.
“…….”
에슬린은 테베트와 짧게 눈이 마주쳤다. 찰나의 순간 그 얼굴에 스친 다정함을 에슬린은 놓치지 않았다.
‘마중 나온다더니.’
이보다 더 확실한 마중은 없었다.
에슬린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황녀궁 문을 열게.”
황후가 간단하게 명령했다.
“예.”
철컥, 철컥!
녹슨 쇠사슬이 지저분한 소리를 내며 거둬졌다. 자물쇠가 풀리고, 테베트가 직접 거대한 문을 밀었다.
끼이익, 쿵!
굳게 닫혀 있던 황녀궁 정문이 비로소 활짝 열렸다.
황량한 정원을 지나 들어선 건물 내부는 한낮에도 어두침침하고 음습하기 그지없었다.
써늘한 공기와 함께 건조한 먼지 냄새가 났다.
척, 척, 척! 그곳을 병사들이 난입했다. 그들은 망설임 없이 황녀궁을 들쑤시기 시작했다.
“더! 더 꼼꼼히 살펴라! 구석구석!”
카르단이 모처럼 신이 난 얼굴로 외쳤다.
에슬린은 그저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그녀의 옆을 은근슬쩍 다가온 테베트가 지켰다.
“정말 전하만 아시는 비밀 장소에 잘 숨겨 두신 거 맞습니까?”
모리어스 후작이 옆에서 비밀스럽게 물었다. 병사들이 무언가를 툭툭 발견해 올수록, 그는 더 초조한 얼굴이 되었다.
에슬린은 조용히 웃었다.
수색은 한참 동안 이어졌다.
짧은 오전과 긴 오후가 지나고, 해가 넘어가기 시작할 무렵.
“어, 어디에도 없습니다, 각하…….”
기사 하나가 헐떡헐떡 달려와 테베트에게 말했다.
테베트는 그 즉시 황후에게 몸을 돌렸다.
“발견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한참을 신나게 날뛰던 카르단이 슬금슬금 눈치를 살폈다.
“그렇다는군, 프레이 백작.”
“…….”
황후의 말에 프레이 백작은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평연한 얼굴이었지만, 그의 두 주먹이 거세게 쥐어져 있는 것을 에슬린은 보았다.
“너는 찾을 수 있겠느냐?”
황후가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황후뿐 아니라 그 자리에 있던 귀족들, 기사들, 병사들, 시종, 시녀, 하녀, 하인의 시선이 에슬린에게 모여들었다.
공손히 허리를 굽힌 그녀가 입을 열었다.
“물론입니다. ……아, 그 전에.”
“그 전에?”
“마법사를 불러 주십시오. 수석 이상의…… 지금 대마법사 정도가 좋겠군요.”
“뭐?”
에슬린은 짤막하게 덧붙였다.
“디에리안 프레이만 아니면 됩니다. 그래야 공평할 테죠.”
의미를 알 수 없는 말이었으나, 일단 시종은 신전으로 달려갔다.
“그럼 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에슬린이 여유로운 몸짓으로 제안했다. 그러곤 엉망이 된 황녀궁 안으로 발을 들였다.
궁금증을 참지 못한 사람들이 줄줄이 그녀를 따랐다.
가장 궁금해하는 사람은 하루 종일 황녀궁을 들쑤신 기사들이었다.
정말 아무 데도 없었는데?
에슬린은 현관을 지나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걸어 집무실 앞에 섰다.
“거긴 이미 샅샅이 뒤졌는데…….”
기사 중 한 명이 중얼거렸다.
황녀의 집무실이야말로, 바닥재 하나, 액자 뒤 작은 틈까지 철저히 뒤진 곳이다.
물론,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나 에슬린은 거침없이 집무실 문턱을 넘을 뿐이었다.
과연 저 발걸음이 멈추는 곳은 어디인가?
모두의 눈동자가 호기심으로 물들었다. 허무하게도 그녀는 널따란 집무 책상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드르륵. 책상의 가장 마지막 서랍이 열렸다.
에슬린은 그 안에 든 종이 뭉치를 꺼내 서랍을 비우기 시작했다.
서랍에 어떤 장치가 되어 있는 것인가?
그러나 에슬린은 종이를 모두 책상 위에 올린 뒤 아무렇게나 굴러다니는 펜을 잡고는 그저,
“뭐 하는…….”
무언가를 휘갈기기 시작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