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하.”
프레이 백작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그런 거였군. 그는 짓씹듯 말하곤 휙 몸을 돌렸다.
“가시죠, 카르단 전하.”
“백작?”
더 볼 필요도 없다는 듯한 몸짓이었다. 카르단이 허둥지둥 백작의 뒤를 쫓았다.
사각, 사각.
실내엔 아주 많은 사람이 있었는데, 들리는 거라곤 오직 그 소리뿐이었다.
책상 앞에 선 에슬린의 얼굴은 평소와 다를 바 없었다. 미간이 살짝 좁아져 있는 정도일까.
그러나 무언가를 적어 내려가는 손은 평소보다 빠르게 움직였다.
단 한순간도 망설일 틈이 없다는 듯이.
사각, 사각.
어느새 주위도 잊고 집중한 모습에 사람들은 어쩐지 숨소리 하나 제대로 낼 수 없었다.
빽빽한 글씨와 도형과 숫자와 수식이 적힌 종이가 아무렇게나 바닥 위로 떨어졌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책상 위에 남은 종이보다 바닥에 떨어진 종이가 더 많아졌을 때쯤.
탁.
에슬린이 펜을 내려놓았다. 검은 잉크가 묻어 손이 온통 엉망이었다.
“…….”
에슬린은 뻑뻑한 눈을 깜빡였다. 집중한 탓인지 볼이 살짝 상기해 있었다.
막힌 숨을 토해 내듯 몰아쉬곤, 그녀는 천천히 바닥에 떨어진 종이를 그러모았다.
어느새 도착한 신전 대마법사가 한쪽 벽에 서 있었다.
툭.
그녀가 대마법사의 발치에 종이 뭉치를 떨어뜨렸다.
“증명해.”
“…….”
대마법사는 무슨 말인지 몰라 한참을 눈만 깜빡이다 이내 깨달았다.
그가 몸을 굽혀 에슬린이 쓴 자료를 집어 들었다.
종이를 훑는 마법사의 호흡이 서서히 거칠어졌다.
“어떤가, 대마법사?”
“이…… 이건.”
그는 빠르게 자료를 넘기며 숨을 헐떡였다.
“실제로 구현해 봐야 알겠지만…… 이론만으로는 확실한……!”
대마법사가 손을 떨며 간신히 말했다.
그 또한 마법사이니, 이 연구의 진위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으리라.
“확실한 기후 조절 마법인 것 같습니다! 이걸 이런 식으로 풀어낼 줄이야! 하…….”
에슬린은 다른 마법에 대해선 잘 알지 못했지만, 이 마법에 대해선 예외였다.
그야, 모르는 게 더 이상했다.
애초에 이건 에슬린이 설계한 연구였으니까. 그 기술의 전반에 대해선 아마 디에리안보다 에슬린이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조건이 조금 따르지만, 이 정도면 마력 사용도 나쁘지 않고…… 대단하십니다, 전하!”
대마법사가 계속해서 감탄했다. 카벤 백작이 그 자료를 옆에서 흘끔거렸다.
황후가 대마법사에게 자료를 넘겨받았다. 그녀는 대충 눈으로 그것을 훑고, 다시 대마법사에게 넘겼다.
“신전으로 돌아가 이 연구서의 최종 검증을 마치게. 그리고 최대한 빨리, 남부로 이것을 보내.”
“예, 예!”
대마법사가 연구서를 쥐고 헐레벌떡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자리에 어색한 침묵만이 흘렀다.
에슬린은 손수건에 대충 손을 닦고, 실내에 모인 이들을 응시했다.
복잡한 시선들이 그녀를 향해 있었다.
“자, 이제 제가 드릴 수 있는 모든 증거는 다 드린 것 같은데.”
“…….”
“이제 어떡할까요?”
황후는 에슬린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활짝 열린 황녀궁.
에슬린은 그 한가운데를 보란 듯이 밟고 서 있었다.
그 모습이 몇몇 사람들에겐 아주 불만스럽게 느껴졌지만.
“제 발로 나갈까요?”
그 물음에 반박할 수 있는 언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 * *
황녀궁이 열렸다.
어떤 연구서의 수색을 위해 열린 것이었지만, 다시 닫히는 법은 없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궁의 주인이 돌아온 것 같으니, 문을 닫는 것 또한 그 주인이 결정해야겠지.’
황후가 그렇게 선언했기 때문이었다.
몇몇 귀족들이 반발하고 나섰으나, 황후는 명령을 거두지 않았다.
모두가 보는 앞에서 일필휘지로 써 내려간 연구서의 파괴력이 황후에게 몹시 강력히 작용한 것 같았다.
비단 황후뿐만이 아니었다.
그때의 그 강렬함을, 그 자리에 있던 사람들 대부분이 기억하고 있었다.
소식을 전해 들은 프레이 백작은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진심으로 묻겠습니다.”
날카로운 시선이 카르단을 찔렀다.
“정말, 황녀가 맞습니까?”
백작은 얼음처럼 차가운 얼굴이었다.
그 또한 에슬린이 연구서를 적어 내려가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비록 도중에 자리를 떴지만.
사실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저 하녀가 황녀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건 덜떨어진 제 첫째 아들이 순종적으로 구는 게 오직 그 황녀뿐이기 때문이기도 했고, 무엇보다…… 카르단의 이 반응.
“……그래. 맞는 거 같아.”
“진작 알고 계셨던 거군요. 왜 저와 상의하지 않으셨습니까?”
“나는, 내 손으로 빠르게 정리하려고 했을 뿐이야.”
카르단은 우물쭈물 말했다.
여긴 분명 제 궁의 응접실인데, 가시방석에 앉은 듯 영 불편했다.
“성배만 해도 그렇습니다. 진작 알았다면 임명식에서 그딴 수치는……. 전하께선 제 힘이 필요 없으신 겁니까?”
“아니야. 아니야, 백작. 그럴 리가 있어?”
혼나는 아이처럼 카르단이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프레이 백작의 서릿발 같은 시선 아래에 서면, 저절로 그렇게 되곤 했다.
“혹시 제게 더 숨기는 게 있으십니까?”
카르단은 잠시 말을 골랐다.
흑마법사에 관한 얘기를 해야 할까……?
안 된다.
프레이 백작의 마법 혐오는 아주 유명했다. 친아들을 내버릴 정도인데, 카르단이라고 봐줄 리 없었다.
“……이제 정말 없어!”
모리어스를 잃었다. 프레이 백작의 세력마저 잃을 수는 없다.
“난 그만 추궁하고, 빨리 에슬린을 궁 밖으로 내쫓을 방법을 말해 봐! 이대로 저 계집이 황녀궁을 차지하고 있는 꼴을 봐야 한단 말이야?”
카르단은 일부러 큰 소리로 외쳤다. 생각해 보니 다시 분노가 차올랐다.
“그래, 예전 의혹! 예전 의혹을 다시 내세우는 건 어때!”
꼿꼿한 자세로 앉아 있던 프레이 백작은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 모습마저 한 치의 흐트러짐조차 없었다.
“황녀는 전하께 항복하고 명예 죽음을 받았습니다. 공개 처형이 아니었단 말입니다.”
“…….”
“그 의미를 모르시겠습니까? 황녀가 왜 죽게 되었는지 사람들은 모르고 있단 말입니다.”
에슬린은 그저 후계자 전쟁에서 모종의 이유로 패배해 죽은 비운의 황녀일 뿐이었다.
황위를 둘러싼 다툼이란 게 늘 그렇듯, 석연치 않은 구석이 많은 법이었다. 사람들은 차마 궁금해할 수조차 없었다.
살아남은 자가 다음 황제.
그 깔끔하고도 잔혹한 인과 속에 과정은 중요치 않았다.
카르단이 살아남았다는 결과만이 중요할 뿐. 패자의 이야기는 묻히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그러니까 다시 공론화하자고! 그 애의 측근들이 저지른 죄를……!”
그녀의 죄목을 아는 건 몇몇 측근, 그리고 황족들뿐이었다.
“그걸로 다시 죽이면 되지!”
카르단이 바락바락 소리쳤다.
프레이 백작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전하, 그건 저희가 조작한 누명이었지 않습니까.”
카르단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그래, 그때 제대로 죽였어야 했어…….
당시 온갖 죄를 조작해 황녀의 측근들을 잡아들였다. 운이 좋게 그때 황녀는 황궁을 비운 상태였다.
부랴부랴 돌아온 황녀를 측근들의 목숨으로 협박했다.
‘네가 죽지 않으면 측근들을 모두 죽이겠다.’
함정에 빠진 황녀가 도망칠 곳은 없었다.
그녀는 결국 무릎을 꿇었다.
고고하기 짝이 없던 고개를 조아리고, 측근들을 살려 달라고 빌었다.
‘에슬린이 카르단에게 항복했으니 명예 죽음을 내릴 것이다.’
황후가 그런 태도로 나온 건 조금 의아했지만 그땐 상관없었다.
어쨌든 에슬린을 죽일 수 있었으니까.
“그때처럼 다시 증거를 만들어서……”
“황녀가 아무런 대비도 없이 돌아왔다고 생각하십니까? 신전에서, 그리고 황녀궁에서 대체 뭘 보신 겁니까?”
카르단은 꾹 입을 다물었다.
황후는 황녀궁에 주인이 돌아왔다고 말했다.
그녀를 인정한 것이다. 과거의 일은 다시 들추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도 아니면, 그게 누명이었다는 걸 눈치챈 걸까……?
“그 일은 다시 들추는 게 저희 손해입니다.”
프레이 백작이 냉정하게 덧붙였다.
“게다가 황녀에겐 리페리우스와 모리어스가 붙어 있습니다. 이미 칼과 방패를 모두 손에 넣었단 말입니다.”
“…….”
“특히 리페리우스는, 아주 치명타입니다. 아주 크나큰…… 손실이죠.”
프레이 백작이 미간을 구겼다.
웬만해선 동요하지 않는 인물이 그렇게 말하니, 카르단은 갑자기 불안해졌다.
“그럼, 그럼 어떡하란 말이야……?”
“인정하십시오. 이번엔 전하께서 지셨습니다.”
그는 냉혹하게 말했다.
“저 꼴을 그냥 지켜보라고?”
“황녀는 약점이 많은 인물이니 기회는 올 겁니다.”
“약점?”
“그 주변에 바글거리는 벌레들이 많지 않습니까. 제 벌레들을 지키겠다고 한 번 죽었는데, 두 번이라고 어려울까.”
프레이 백작이 턱을 쓰다듬었다.
무언가를 가늠하듯 그의 시선이 멀어졌다.
“이제 황녀를 이길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번득이는 눈동자가 휙 카르단에게 꽂혔다.
“성배.”
카르단은 입술을 물었다.
두려워서가 아니었다. 올라가는 입꼬리를 숨기기 위해서였다.
“성배를 찾으셔야 합니다만…… 왜 웃고 계신 겁니까?”
“아니, 그게 사실은…….”
제게 충성하던 흑마법사의 얼굴.
그게 떠올라서라고는 차마 말할 수 없었다.
“다 방법이 있거든.”
타툴란과는 그의 ‘인형’을 통해 조금 전에도 접촉한 참이었다.
흑마법은 정말, 최고의 무기였다.
‘그래, 좋아…… 지금은 봐주지.’
성배가 코앞에 있다. 타툴란이 그것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니 에슬린 목에 들이밀 칼자루를 쥔 것 또한 바로 저였다.
‘몇 번이고 다시 죽여 주면 돼.’
다신 되살아날 생각 같은 거 못 하게.
카르단은 눈을 빛내며 웃었다.
* * *
에슬린은 피곤한 듯 눈가를 문질렀다.
“대체 뭐 하는 건지…….”
황녀궁 내부가 어수선했다.
디에리안이 곳곳에 청소와 보호 마법을 걸겠다고 궁을 한바탕 뒤집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에슬린은 이것저것 훈수를 두다 방해된다고 쫓겨났다.
‘그러고 보니 내 궁인데……?’
어쨌든 먼지 가득한 곳에 있느니 밖을 산책하는 게 더 나았다.
내친김에 황녀궁 뒷길을 걸었다. 황녀궁 뒤편 깊숙한 곳에 근사한 연못이 있다는 걸 아는 사람은 많지 않았다.
에슬린은 그래서 이곳을 좋아했다.
“여전하네.”
연못 앞 벤치에 앉자 좋아하는 광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이맘때쯤이었다. 이 연못의 얼음이 녹기 시작하는 것은.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면 당연하다는 듯 연꽃 또한 피겠지.
많은 게 변한 것 같지만, 이렇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왜 이런 곳에 혼자 있죠?”
제 어깨를 휘감는 이 손길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