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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28화 (128/147)

128화

에슬린은 고개를 위로 젖혔다.

부드럽게 웃는 낯과 눈이 부딪쳤다. 테베트가 그대로 허리를 굽혀 매끈한 이마에 키스했다.

테베트는 에슬린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기사단에 다녀왔어요?”

“쓸모 있는 놈들이 딱히 없더군요.”

“그래요?”

“기사단장을 쥐어짜 고르고 골라 오긴 했습니다. 당신 호위라고 하니, 그놈들 얼굴이 얼마나 환해지던지.”

그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속삭였다.

“그대로 내던질 뻔한 걸 억지로 참았죠.”

에슬린은 웃음을 터뜨렸다.

고작 호위 역할일 뿐이다. 그저 일일 뿐인데, 어떤 기사가 그렇게까지 반기겠는가?

애초에 테베트가 굳이 가서 선발해 올 만한 일도 아니었다.

“농담은.”

“농담 아닙니다만.”

“그래요?”

고개를 돌려 그를 응시했다.

테베트는 에슬린의 뺨을 더듬었다.

“돌아온 기분이 어때요?”

그가 문득 떠올렸다는 듯 덧붙였다.

“날 공작저에 혼자 버려두고.”

저절로 헛웃음이 터졌다.

“누가 버려둬요?”

“당신 없는 별채가 벌써부터 썰렁해 죽을 것 같습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러고 보니?”

“화로 청소 잘했나 모르겠네요.”

테베트가 짙은 눈썹을 꿈틀 움직였다.

“지금 저보다 화로를 더 걱정하는 겁니까?”

에슬린은 쿡쿡 웃으며 가볍게 테베트에게 몸을 붙였다.

그가 피식 웃으며 겉옷을 입혀 주었다. 어깨를 끌어당기자 에슬린이 머리를 기댔다.

“돌아온 기분은 글쎄요. 딱히 완전히 돌아온 것 같진 않아서.”

에슬린은 소란스러운 황녀궁을 슬쩍 돌아보았다.

“아직도 당신에게 반발하는 간 큰 놈들이 있더군요.”

“어쩔 수 없죠.”

여전히 에슬린에게 더 확실한 증거를 내놓으라며 주장하는 이들이 있었다.

황후를 비롯한 그녀의 지지 세력들이 이에 맞서는 듯했지만, 글쎄.

에슬린이 에슬린이라는 증명이란, 과연 무엇일까?

그녀는 종종 생각하게 되었다.

내가 나라는 것을 대체 어떻게 증명해야 하지?

타툴란처럼 흑마법으로 영혼을 들여다봐 줬으면 차라리 편했을지도 모른다. 그녀는 속으로 웃었다. 그야말로 실없는 생각이다.

“아마 계속 증명해야 하지 않을까요?”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젠 증명의 연속인 삶이 되리라는 걸.

“……성배를 찾아서 돌아왔으면 더 확실했을 겁니다.”

테베트가 근심 어린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는 애초에 에슬린이 이런 식으로 황궁으로 돌아가기를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그 성배를 찾기에 황궁이 가장 적합한걸요.”

게다가 에슬린은 이제 제가 해야 할 일들을 하고 싶었다.

스스로 황녀임을 증명하려면, 어쨌든 황녀로 있어야만 하는 것이다.

“여하튼 당신에게 성배를 바치는 건 접니다.”

“물론이에요, 리페리우스 공작.”

“또.”

테베트가 응징하듯 에슬린의 어깨를 가볍게 쥐었다 놓았다.

문득 그녀의 체온이 너무 차가운 것 같았다. 그가 미간을 구기며 제 겉옷을 벗어 입혔다.

“답답해요. 오늘은 별로 춥지도 않은데.”

에슬린이 옷을 밀어냈다.

“감기 걸리는 것보단 낫습니다.”

테베트는 종종 에슬린을 과하게 걱정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 걱정의 근원을 모르는 바는 아니기에, 에슬린은 밀어내던 손길을 멈추었다.

그러자 신이 난 그가 겉옷을 꽁꽁 두르고 장갑도 끼우고 목도리도…….

“……지금 이름 안 불렀다고 시위하는 거죠?”

퉁명스럽게 묻는 얼굴.

“어떻게 알았을까.”

눈사람처럼 동글동글해진 에슬린을 테베트가 못 견디고 꽉 끌어안았다.

두 사람은 연못을 떠나 정원을 산책했다. 관리가 되지 않아 엉망인 정원이었으나, 숲길을 걷는다고 생각하면 썩 나쁘진 않았다.

“근데 그놈은 어디 갔죠? 그나마 이 황궁에서 쓸 만한 기사라곤 그놈뿐이었는데.”

“그놈?”

“당신 호위 말입니다. 개처럼 당신 뒤를 졸졸 쫓던.”

“아, 젝스 경.”

에슬린에게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신전에서 로하르트는 어느샌가 모습을 감춘 채였다.

“그러게요. 젝스 경부터 돌아오라고 해야 하는데.”

젝스가 베르타니아를 떠났다고 하는 로하르트의 말은 믿지 않았다.

그가 함부로 저를 떠났을 리 없었을뿐더러, 에슬린은 그의 행방을 얼추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테베트가 에슬린의 손을 감싸 쥐었다.

“아무튼 오늘처럼 혼자 있지 말아요. 이제 정말 카르단이 앞뒤 재지 않고 달려들 겁니다.”

“그러겠죠.”

“제가 당신에게 붙어 있다는 걸 아니 쉽게 손대진 않겠지만, 조심해서 나쁠 건 없습니다.”

“알겠어요. 늘 호위를 데리고 다닐게요.”

에슬린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테베트가 입술을 끌어 올리며 피식 웃었다.

강인하고 단단한 그 얼굴이 부드럽게 풀어지는 모습을 보는 건, 늘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당신이 착한 말을 했으니.”

그가 나무 앞에 멈춰 섰다. 따스한 겨울 태양이 두 사람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제가 상을 받아야겠습니다.”

“그러니까 그 말 이상하다니까요.”

에슬린은 슬쩍 눈썹을 찌푸리며 몸을 물렸다. 테베트가 어림도 없다는 듯 그녀를 나무와 제 몸 사이에 가두어 버렸다.

맹렬히 쏟아지던 태양 빛이 하나도 닿지 않았다.

입술 끝이 아슬아슬하게 닿았다.

그는 에슬린이 더는 도망갈 수 없도록 그녀의 뒤통수에 손을 넣었다. 다른 한 손은 에슬린의 아랫입술을 문질렀다. 초조한 손길이었다.

“누가 보면 어쩌려고요?”

“아무도 없습니다. 어차피 곧 당신 호위들이 몰려오겠지만…… 아, 젠장.”

그가 낭패한 듯 눈매를 찡그렸다.

“왜요?”

“그냥 지금 당장 카르단의 목을 비틀고 오면 안 되겠습니까?”

빌어먹을 호위 같은 거 없으면 좋을 텐데.

그의 생각이 뚜렷이 읽혔지만, 에슬린은 짐짓 모르는 척했다. 카르단이 아니어도 사실 호위는 늘 있어야 했다.

“대체 어디로 생각이 튀는지 모르겠네.”

“모르겠어요?”

테베트는 윗입술을 붙이며 쓱 웃었다. 간지러운 감각이 피어올랐다.

“지금 당장 입 맞추겠다는 소리를 정성 들여 하는 거잖아요.”

그가 고개를 기울이며 속삭였다.

에슬린은 그 능청에 웃고 말았다.

그 순간 인내심을 끌어모으고 있던 테베트의 얼굴에 무언가가 뚝 끊어지는 게 보였다.

나무에 거칠게 등이 닿았다. 입술이 벌어졌다.

강인한 턱 근육이 꿈틀거리며 따뜻하고도 사나운 숨결이 얽혔다. 더, 더. 그가 안달하듯 에슬린의 뒤통수에 얽힌 손에 힘을 주었다.

에슬린은 호흡 하나까지 모두 잡아먹혀 버렸다.

* * *

“저어…….”

에슬린은 고개를 들었다. 그러자 어색한 표정을 한 하녀가 보였다.

“전하……?”

아주 조그마한 목소리였다.

꼼질거리는 손가락. 노골적으로 에슬린을 훑는 눈동자.

호기심과 탐구심, 경계심 등이 뒤섞인 오묘한 표정.

집무실에 앉아 있던 에슬린은 속으로 웃었다.

“무슨 일이야?”

“마, 마법사님께서 오셨습니다.”

“들어오라고 해.”

“네에…….”

하녀가 주춤주춤 물러섰다.

에슬린은 다시 책상 위로 시선을 던졌다. 써 내려가던 문장이 도중에 끊겨 있었다.

에슬린은 펜대를 굴렸다.

베르타니아의 문장이 새겨진 펜.

황가의 인장이 찍힌 서류들.

황녀궁으로 돌아온 지 벌써 이틀째였다.

밖에서 부산스러운 인기척이 느껴지기 무섭게 벌컥 문이 열렸다.

“아니, 무슨 궁이 이렇게 썰렁합……”

투덜거리던 디에리안의 동작이 우뚝 멈추었다.

그는 문가에 선 채 딱딱하게 굳었다. 예기치 못한 뭔가를 맞이한 사람 같았다.

“…….”

침묵이 길어지자 에슬린이 눈을 들었다.

“왜 그래? 안 들어오고.”

“아뇨, 뭐…… 그냥.”

디에리안은 심장께를 문지르며 문을 닫았다. 어라, 뭐지 이 기분……?

다시 돌아서자 햇살을 받으며 집무실 책상에 앉은 에슬린이 보였다. 무언가에 몰두한 듯 턱을 괸 채 펜을 굴리고 있었다.

어쩐지 눈알이 화끈거렸다.

……아무래도 방금까지 젓던 마법약이 눈에 튄 게 분명하다.

“휴고와 헤즐턴은 잘 갔어?”

에슬린이 물었다.

디에리안은 두어 번 눈을 깜빡이더니 평소의 얼굴을 되찾았다.

“네. 아주 극진히 모셨습죠. 금화 주머니 받아 들고 눈이 휘둥그레져서 나가던데요.”

“돌아오면 잘 살펴 줘.”

휴고와 헤즐턴은 긴 휴가를 떠났다.

황녀궁으로 돌아와, 에슬린이 가장 먼저 한 일이었다.

그들에겐 에슬린을 도운 대가라고 둘러댔지만 사실 잠시 황궁에서 떨어뜨려 놓기 위함이었다.

신전에서 정원사를 들먹였다. 비록 사건은 일단락되었으나, 카르단이 어떻게 손을 뻗칠지 모를 일이었다.

“뭘 살펴요? 제가 마법사지 정원삽니까?”

“네 마법을 도운 일등 공신이잖아. 안 그랬음 너 황궁에 라일락나무 씨앗 심고 돌아다녀야 했을걸.”

디에리안은 잠시 생각하는 듯 입을 다물었다. 그의 입술이 비틀렸다.

“……맛집이라도 더 짚어 줄 걸 그랬나?”

에슬린은 피식 웃으며 다시 펜을 움직였다.

무언가를 쭉쭉 써 내려가는데, 길고 마른 손이 불쑥 종이 위에 난입했다.

까맣게 타들어 간 소매 끝이 보였다.

“왜? 나 바빠.”

“근데 제가 그깟 정원사들 휴가 보고나 하러 온 줄 아십니까?”

“그럼?”

“저 지금 따지러 온 겁니다!”

대체 또 뭘.

에슬린은 펜을 내려놓고 마법사를 응시했다.

“따지러 오다니?”

에슬린이 그렇게 묻기 무섭게 디에리안이 눈을 희번덕였다.

그가 가볍게 책상을 두드렸다.

“그 돌아 버린 각하와 함께 출정하라뇨? 이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아, 그 얘기. 안 그래도 말하려고 했는데, 벌써 들었어?”

“신전 대마법사 그 머저리가 말하는데 어찌나 기가 차던지!”

에슬린은 가볍게 웃었다.

디에리안은 대마법사를 비롯한 신전 마법사들을 멍청이 취급하곤 했다.

대부분이 한때 제 밑에 있던 마법사들이니 그 태도를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 작자랑 가기 싫습니다!”

“이번 포털에 타툴란이 나타날 확률이 높다며? 테베트 경이 강하긴 하지만, 마법에 대해선 네가 더 낫잖아.”

디에리안은 감히 누굴 갖다 대냐는 표정이었다.

“그냥 나은 정도가 아니라 제가 훨씬, 훠어얼씬 더 낫죠. 개미 다리와 태산 정도의 차이랄까?”

에슬린은 빙긋 웃었다.

“그것 봐.”

“…….”

디에리안은 입을 꾹 다물었다.

“네가 정 싫으면 신전 마법사들을 보낼까? 대마법사는 어때?”

“하! 신전 그 얼간이들이 뭘 안다고?”

“그것 보라니까.”

“…….”

젠장, 또 낚여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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