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대꾸할 말을 잃은 디에리안은 분한 듯 숨만 몰아쉬었다. 아무래도 또 에슬린의 페이스에 휘말려 버린 듯했다.
“너밖에 없어, 디엘. 가서 테베트 경을 도와줘.”
마물 전쟁에 마법사들이 동행하는 건 드문 일이 아니었다. 주변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한 결계를 치기 위해서였다.
하물며 이번 예측지는 남부였다.
안 그래도 시끄러운 남부가 더 쑥대밭이 되어서는 안 됐다.
“전하는요? 저랑 각하가 황궁을 떠나면 전하는 대체 누가 지킵니까?”
“저 밖에 줄줄이 늘어선 호위들이 지키겠지?”
에슬린이 턱 끝으로 문밖을 가리켰다. 가벼운 대꾸에 디에리안이 인상을 팍 구기며 툴툴거렸다.
“저것들 다 합쳐도 우리 젝스 경 발 언저리도 못 따라올 겁니다.”
“그건 맞는 말이지만…… 아무튼 됐어. 충분해.”
“하지만…….”
“지금 이곳만큼 안전한 덴 없을 거야. 황궁이야말로 내 영역이라는 걸 잊었어?”
에슬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부득불 황궁에 자리 잡은 이유가 이것이었다.
에슬린은 이곳에 대해 모르는 게 없었다. 어떤 사람을 만나야 할지, 어떤 장소에 가야 할지, 어떤 물건을 움직여야 할지.
황궁 생태계를 누구보다 잘 이해하고 활용할 줄 아는 게 바로 그녀였다.
“테베트 경과 함께 성배를 가지고 와, 디에리안.”
에슬린이 명령했다.
디에리안은 푸른 눈동자 속에 일렁이는 불꽃을 보았다.
짧은 전율이 일었다. 저 불꽃을 다시 보기 위해 여기까지 왔다.
“……젝스 경 엉덩이를 두들겨 패서라도 빨리 데려다 놔야겠군.”
그는 머리를 벅벅 긁으며 중얼거렸다.
긴 한숨을 내쉰 마법사가 문득 고개를 들었다.
“근데 제 걱정은 안 하십니까? 제가 못 돌아오면 어쩌죠?”
“타툴란에게 질 것 같아?”
“아뇨! 그게 아니라! 그 각하가 전쟁터에서 실수인 척, 절 꽥 죽여 버리면 어쩌냐는 겁니다!”
에슬린은 허탈한 듯 웃음을 흘렸다.
“테베트 경이 왜?”
“전하께선 모릅니다. 그 돌아 버린 인간이 얼마나 제 목을 호시탐탐 노리는지…….”
하여튼 호들갑도 심했다.
그녀는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다시 펜을 쥐었다.
“사이좋게 잘 지내봐.”
“사이……좋……?”
디에리안은 세상에서 가장 기괴한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굴었다. 타 버린 소매 사이로 드러난 팔뚝에 오소소 소름이 돋아 있었다.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렸다. 하녀가 우물쭈물 모습을 드러냈다.
“저어…… 전하……?”
“무슨 일이야?”
“황자비, 아니 레실리아 님께서 오셨습니다.”
레실리아가? 에슬린은 몸을 일으켰다.
하녀가 눈동자를 또르르 굴리며 그런 에슬린의 움직임을 좇았다.
“응접실로 모셔.”
“네에…….”
하녀는 쭈뼛쭈뼛 문을 닫고 사라졌다.
그 모습을 잠자코 지켜보던 디에리안이 빈정거렸다.
“저 참신한 반응은 뭡니까?”
“글쎄.”
정작 에슬린은 대수롭지 않은 얼굴로 몸을 일으킬 뿐이었다.
“유령이 여기 앉아 있는 게 어색한가 보지.”
레실리아는 반듯하게 앉아 차를 마시고 있었다. 말간 얼굴엔 그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그녀는 그저 평온해 보였다. 예민하던 주변 공기도 한결 부드럽게 느껴졌다.
“정리는 다 끝내셨나요?”
에슬린이 물었다. 레실리아가 빙긋 웃었다.
“네. 덕분에요.”
“언제 궁을 나가는 거죠?”
“내일이요.”
그녀는 카르단과 이혼했고 그 즉시 궁을 나가기로 결정했다.
아직 여러 절차가 남아 있었지만, 나머지는 모리어스 후작과 에슬린이 처리하면 될 뿐이었다.
달그락. 하얗고 고운 손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약지에 반지 자국이 흐리게 남아 있었다.
“그보다 말씀을 낮추세요. 전 더 이상 황자비도 아닌데요.”
“아뇨.”
에슬린은 작게 웃었다.
존댓말이 더없이 어색하던 때도 있었지만, 하녀로 지내며 이것 또한 익숙해져 버렸다.
“이미 이런 말투가 입에 붙어 버렸네요. 이젠 이게 편해요. 아, 모리어스 영애께서 불편하시려나요?”
모리어스.
레실리아는 옷자락을 꽉 움켜쥐었다.
눈앞의 황녀가 그 이름을 되찾아 주겠다고 말했을 때, 사실 레실리아는 거의 믿지 않았다.
카르단이 바람피운 목록이 워낙 충격적이라 대충 협조하겠노라, 말했지만 솔직히 확신은 없었다.
하지만 에슬린은 보란 듯이 약속을 지켰고 이렇게 황녀궁까지 차지했다.
“……대단하시네요, 전하께선.”
레실리아가 중얼거렸다.
“저라면 전하처럼 하지 못했을 거예요. 이렇게 제자리를 되찾으시다니 말이에요. 그동안 우여곡절이 많았겠죠? 그걸 다 견디신 게 정말 대단해요.”
“영애께서도 열심히 견디셨잖아요. 각자가 견딘 게 달랐을 뿐이죠.”
에슬린은 차로 입술을 한 번 축였다.
드레스 문제로 전전긍긍하면서도 레실리아는 이 황궁에 더 잘 적응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카르단의 부정을 알고도 적당한 때를 위해 입 안의 혀처럼 굴며 버텼다. 그 어느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그런 레실리아를 누구보다 에슬린이 가까이에서 지켜보았다.
“그럼 이제 후작령으로 돌아가시는 건가요?”
“네. 당분간은 어머니를 모시면서 좀 쉬려고요.”
“큰 결단을 내렸으니 그러셔야죠.”
“결단이라.”
레실리아가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께서 제게 그 목록을 주지 않으셨다면 과연, 어땠을지.”
카르단의 부정을 몰랐다면 어땠을까? 아마 지금도 황자비궁에서 숨죽여 살고 있지 않았을까?
에슬린은 고개를 저었다.
“전 선택지를 제시한 것뿐이에요. 선택한 건 모리어스 영애죠.”
“…….”
“그걸 외면하지 않은 것만으로도 대단한 거라고 생각해요.”
레실리아는 가만히 눈을 깜빡였다. 대단하다고 생각했던 황녀에게서 대단하다는 말을 돌려받으니 어쩐지 위로받은 기분이었다.
두 사람은 말없이 찻잔을 비웠다.
애초부터 친밀하게 이야기를 나눌 만한 사이는 아니었다.
차를 모두 마신 뒤 레실리아가 몸을 일으켰다. 에슬린이 황녀궁 정문에서 그녀를 배웅했다.
“그동안 감사했어요.”
마차에 오르려던 레실리아가 마지막으로 인사했다.
환한 태양 아래, 그녀는 그 어느 때보다 홀가분한 표정이었다.
“이상하게 끝이란 생각이 안 들어요. 무엇이든 다시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거든요.”
“실제로도 그렇죠.”
에슬린이 당연하다는 듯 대꾸했다.
그러자 레실리아가 눈매를 휘며 환하게 웃었다.
에슬린은 그녀가 진심으로 기쁠 땐 저렇게 웃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레실리아는 에슬린을 가볍게 끌어안았다.
“그럼 잘 지내세요, 황녀님. 원하는 바를 모두 이루시길.”
따뜻한 목소리가 귓가를 타고 흘렀다.
“잘 가요, 레실리아.”
몸을 돌리던 레실리아가 문득 멈칫했다.
“……아,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웃음기 머금은 눈매가 짓궂게 구겨졌다.
그녀가 가까이 얼굴을 붙이고 비밀처럼 속삭였다.
“그쪽 어머니께서는 정말 최악의 시어머니셨어요.”
그깟 드레스가 뭐라고?
에슬린은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리고야 말았다.
가뿐한 발걸음이 날 듯이 멀어졌다.
* * *
“황녀라뇨!”
귀족 하나가 분통을 터뜨렸다.
어두운 밤, 프레이 백작의 서재에 소수의 인원이 은밀하게 모여 있었다. 그들은 카르단을 지지하는 핵심 귀족들이었다.
가장 상석에는 프레이 백작이 앉았다.
백작보다 지위가 높은 이도 있었으나, 이곳의 생태계는 바깥과 달랐다.
그들의 우두머리는 프레이 백작이었고, 모두가 은연중에 이를 알고 있었다.
“죽은 황녀가 대체 어떻게 살아 돌아온단 말이오?”
한 귀족이 테이블을 두드렸다.
“황녀궁에 들어앉은 유령이 정말 황녀인 건 맞소?”
“레온 후작께서도 보지 않으셨습니까! 황녀밖에 모르는 걸 술술 써 내려가던 모습을요!”
“하지만 대체 어떻게! 정말 신의 선택이라도 받은 것이란 말인가?”
그들은 이 사태를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었다.
“신의 선택이란 건 없습니다.”
나지막이 말한 건 프레이 백작이었다.
“마법으로 얼굴을 바꾼 거겠죠.”
그는 제 아들이 얼마나 고집스러운지 잘 알고 있었다. 디에리안이 이번 일에 개입하지 않았을 리 없었다.
“아무리 마법이라지만 그런 게 가능한 겁니까? 분명 카르단 전하께서 시체를 확인했다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때 카르단 전하께선 기뻐서 거의 제정신이 아니셨습니다.”
“…….”
“한껏 방심하고 계셨겠죠.”
내부에 침묵이 흘렀다.
그들 모두 카르단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카르단을 따르는 건, 멍청한 황족만큼 굴리기 쉬운 것도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황궁에 보는 눈이 얼마인데…… 무덤에서 살아 돌아오기라도 했단 말입니까?”
“살린 게 아니라, 처음부터 죽은 게 아닌 걸지도 모릅니다.”
그렇게 말한 건 조용히 듣고 있던 한 귀족이었다.
그녀는 이중 마법에 가장 조예가 깊은 자였다.
“봉인된 옛 고대 마법 중…… 그런 마법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혼을 빼내는 마법 말입니다.”
“…….”
무거운 정적이 주변을 내리눌렀다.
“혼을 빼내 본래의 육신을 한 번 죽이고, 다시 혼을 정착시키는 거라고…….”
그녀는 프레이 백작의 매서운 눈빛을 보았다.
“확실치는 않습니다.”
재빨리 덧붙였으나 이미 주변 공기는 그녀의 말에 술렁이고 있었다.
“흑마법도 아니고, 그런 엄청난 마법을 몇 번이나 쓸 수 있는 건 아닐 겁니다. 고대 마법의 봉인을 푸는 것부터가 큰 대가가 따르는 일이라고 들었어요.”
“대가라……. 그 사술을 완성한 건 혼자가 아니란 말이군.”
프레이 백작이 중얼거렸다.
디에리안에게 다른 조력자가 있었단 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