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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30화 (130/147)

130화

“프레이 백작.”

마법에 대해 말하던 귀족이 그를 불렀다.

“말씀하십시오, 린든 백작.”

“황녀의 측근들은 역시 골칫덩이입니다. 처리할 방법을…….”

프레이 백작은 희미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아, 백작껜 미안한 말이군요.”

“미안해할 것 없습니다.”

“하지만 백작가의 영식께서…….”

“그건 진작부터 내 아들이 아니었습니다.”

린든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프레이 백작은 평연한 얼굴로 차를 마실 뿐이었다.

“근데 마법사가 어떻게 혼자 이 모든 일을 꾀한 거죠?”

누군가 그렇게 다시 물었다.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이 도왔을 겁니다.”

“…….”

“어떤 방법인진 모르겠으나, 중간에서 황녀의 시체를 빼돌렸겠죠.”

“하…….”

긴 탄식이 흘러나왔다.

그들이 가장 예상하지 못했던 건, 리페리우스가 스스로 천칭을 배신한 일이었다.

귀족들의 얼굴에 열패감이 스쳤다.

과연 리페리우스를 손에 넣은 황녀를 이길 수 있을 것인가.

하지만 이제 물러날 곳도 없었다.

“백작, 황녀는 정말 카르단 전하께 스스로 항복했던 게 맞소?”

조용히 있던 레온 후작이 물었다.

황녀가 죽을 당시 그는 후작령에 있어 상황을 전해 들었을 뿐이었다. 프레이 백작과 마찬가지였다.

“맞습니다. 그러니 죽음을 받아들였죠.”

“그렇다면 굳이 항복한 상대에게 맞서겠다고 황궁에 돌아오진 않았을 것 같은데……. 운 좋게 목숨을 건졌으면 조용히 살고 싶지 않겠소?”

“성배의 존재를 확인했으니, 돌아오고 싶어진 게 아닐까요?”

린든 백작의 말에 레온 후작이 그런가, 하며 미간을 찌푸렸다.

“하지만 황녀가 항복하는 과정이 좀 이상하긴 했습니다.”

“이상하다니?”

테이블 언저리를 응시하던 린든 백작의 뇌리에 문득 한 장면이 스쳤다.

“황녀가 죽을 당시, 기묘한 소문이 돌았죠.”

“무슨?”

“황녀의 측근들에게 여러 가지 의혹이 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프레이 백작은 덤덤한 얼굴이었다.

린든 백작이 과거를 더듬듯 가늘어진 눈으로 벽을 응시했다.

“그 의혹이 무엇인지는 자세히 알려지지 않았으나 하필이면 황녀가 황궁을 비웠을 때 측근들이 잡혀 들어갔고, 북부로 가고 있던 황녀가 부랴부랴 돌아왔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때 황녀가 왜 황궁을 비우고 홀로 북부로 향했는지, 알려진 바는 없었다.

“황녀는 돌아와 갑자기 항복을 선언했죠. 그 측근들의 의혹이 사실이기 때문인지, 아니면 다른 이유가 있었던 건진 모르겠지만…….”

“…….”

“항복이란 곧 죽음을 받아들이겠다는 말과 다름없었는데.”

프레이 백작은 말없이 찻잔을 기울였다.

린든 백작의 손이 둥글게 말려들어 갔다.

“왜 그랬을까요?”

“혹시…….”

누군가 작게 입을 열었다. 린든 백작의 시선이 그쪽으로 향했다.

“그때 에르단 전하께서 혼수상태였던 것과 관련이 있습니까?”

“…….”

린든 백작은 눈썹을 찌푸렸다.

그래, 그런 일도 있었다.

당시엔 모든 일이 한꺼번에 겹쳐 몹시 뒤죽박죽이었다.

“프레이 백작, 아는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시죠.”

프레이 백작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땐 저도 레온 후작님처럼 제 영지에 머물고 있었으니, 자세한 건 모릅니다.”

“…….”

당시 프레이 백작은 중요한 일 외에는 백작령에서 잘 나오지 않았다. 최근 타운 하우스로 거처를 옮긴 건 카르단의 임명식 때문이었다.

하지만 왜일까.

린든 백작은 프레이 백작이 그 전말을 모를 거라곤 생각되지 않았다.

“제가 추측하기론, 그때 황녀의 정신이 온전치 않았으리라 생각합니다.”

“정신이요?”

“막 어린 티를 벗은 황녀가 아닙니까. 미숙하고 불안정한…….”

“…….”

“측근들이 자신 때문에 위험에 빠진 걸 보았으니, 견디지 못한 게 아닐까 싶습니다.”

그런 것인가?

린든 백작은 납득이 될 것 같으면서 되지 않았다. 하지만 프레이 백작은 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었다.

“……아무튼 황녀가 스스로 항복했든 아니든 그건 중요치 않습니다.”

듣고 있던 다른 이들도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예전 의혹들을 들춰 황녀를 끌어내려야 합니다.”

“그건 어렵습니다, 린든 백작.”

린든 백작이 미간을 좁혔다.

“황녀가 죽은 후, 황후께선 측근들에게 걸린 의혹이 사실이 아니라고 말씀하셨죠.”

프레이 백작의 지시를 받아 카르단이 만든 증거는 조악했다. 그건 황제의 눈을 가려 측근들을 잡아들일 용도에 불과했다.

그러니 에슬린이 죽고 가장 먼저 파기했다. 황후가 그런 판단을 내린 건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다.

‘그런 조악한 증거로도 황제를 구슬릴 수 있었던 건, 그의 총기가 이미 흐려진 상태였기 때문이었지.’

게다가 황제는 황녀를 꺼리고 있었다.

부랴부랴 돌아온 황녀는 버텼다.

하지만 에르단 황자의 식사에 독이 섞이자 더는 버티지 못했다.

카르단은 해독제를 손에 쥐고 황녀를 다시 압박했다.

‘그들이 제 걸림돌이 될 줄은 몰랐겠지.’

수많은 목숨이 황녀의 어깨에 짐처럼 매달려 있었다. 결국 그녀는 무릎을 꿇었다.

카르단은 기쁨을 참지 못했다.

그게 황녀의 마지막 협상대인 줄도 모르고, 황녀가 빌자 측근들의 목숨을 살려 주겠다고 덜컥 약속했다.

동시에 비실대던 황제가 쓰러졌다.

황후는 대신 실권을 쥐었고, 그녀에게 죽음을 내림으로써 일을 마무리했다.

‘측근들을 살려 보낸 건 찜찜했으나 그땐 끝난 일이라고 생각했다.’

머리를 쳤다. 그 몸에 수족이 붙어 있다 한들, 다신 일어서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그 머리가 다시 붙을 줄은 몰랐지만.

“그럼 정말 이대로 황녀를 인정해야 합니까? 이렇게 아무것도 못 하고 간단히, 맥없이?”

린든 백작은 분하다는 듯 씨근덕댔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아직 황녀를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으니, 황궁 생활이 순탄치만은 않을 겁니다.”

혹은 그렇게 만들겠다는 말처럼 들렸다.

“하지만!”

“린든 백작.”

프레이 백작의 목소리가 나지막하게 울렸다. 그의 동공이 깊고 검었다.

“저는 제가 방심했다고 생각합니다.”

“예?”

그 어린 황녀를 백작령에서도 충분히 죽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프레이 백작은 그러나 그 말을 하지 않았다.

물론 그땐 성공한 계획이라고 여겼다.

“황녀가 죽은 걸 보고 끝이라고 생각했으니 말입니다.”

“그건…… 누구나 그럴 겁니다.”

무거운 침묵이 내리깔렸다.

당시에도 의구심은 있었다. 갑자기 황제가 쓰러진 게 그 첫 번째였다.

원래도 병색이 짙고 시들시들하던 황제였으나 그건 좀 급작스러운 데가 있었다.

불안을 감지한 백작은 급하게 황궁으로 올라왔다.

그러던 중 황녀가 죽었다.

그가 제일 처음 본 건 차가운 황녀의 무덤이었다. 어쩐지 그를 보자 맥이 탁 풀렸다.

탄생이 그 사람의 시작이라면, 죽음은 그 사람의 끝이었다.

그는 한 사람의 종말을 눈에 담았다고 생각했다.

의구심은 자연히 사그라들었다.

어쨌든 원하던 결과가 눈앞에 있었다.

에슬린의 죽음. 황녀의 끝이었다.

설마 그다음이 있었을 줄은, 어떻게 상상할 수 있었을까?

“제 실수입니다. 마법사의 힘을 얕보았고, 리페리우스의 등장을 예상치 못했으며, 카르단 전하의…… 어리석음을 간과했죠.”

“…….”

“이건 그 실수의 대가인 겁니다.”

황녀를 몰아넣었던 증거들은 가장 먼저 처분했다. 이제 모든 게 백지였다.

“하지만 두 번 실수할 일은 없습니다.”

기나긴 정적 속, 프레이 백작은 차 한 잔을 깔끔하게 비웠다.

그는 더 이상 카르단에게 맡겨 놓지만은 않을 것이다.

내부에 긴 정적이 흘렀다.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다시 시작된 후계자 전쟁.

어느 편에 붙어야 하는가?

“그럼 이제.”

딸랑, 딸랑.

프레이 백작이 종을 흔들었다.

“실수를 만회해 보죠.”

“이게 무슨!”

“백작!”

철걱, 철걱, 철걱.

복면으로 무장한 기사들이 난입했다.

고귀한 귀족들의 몸을 꺾고 그대로 테이블 위에 처박았다.

“자, 충성을 맹세하십시오.”

프레이 백작이 차갑게 웃었다.

* * *

레실리아를 보내고 에슬린은 다시 집무실로 돌아왔다. 이것저것 살피고 고민해야 할 게 많았다.

아주 늦은 밤이 되어서야 에슬린은 책을 덮었다.

사위가 쥐 죽은 듯 고요했다. 뻐근한 목을 주무르며 그녀는 집무 책상을 벗어났다.

“음…….”

식사를 했던가, 안 했던가?

그보다 목이 말랐다.

에슬린은 티 테이블에 놓인 물병을 집어 들었다.

“비어 있네.”

물병은 건조하게 말라 있었다.

주위를 둘러봐도 하녀들은 보이지 않았다.

집무실 문을 열자, 앞을 지키던 호위 기사가 몸을 돌렸다. 그는 물병을 쥔 에슬린을 의아하게 바라보았다.

“전하, 필요하신 게 있으십니까? 가져다드리겠습니다.”

“됐어, 산책 겸 갔다 오지 뭐.”

황녀궁은 고요했다.

밤에도 늘 사람으로 북적거리던 곳이었기에 텅 빈 느낌이 조금 어색했다.

과거 에슬린의 사용인 중 궁에 남은 이는 아무도 없었다.

스스로 궁을 떠나거나 쫓겨나거나. 둘 중 하나였다.

‘궁내부에 연락은 넣었는데.’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다들 돌아오고 싶지 않은 걸지도 모른다.

왠지 쓸쓸해지는 기분이었다.

빛이 새어 나오는 곳으로 걸음을 옮기자 주방 앞이었다.

아무래도 하녀들이 주방에 모여 일을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말? 황자비궁의 하녀로 있었다고?”

에슬린은 걸음을 멈추었다.

조금 떨어진 곳에 선 호위 기사가 슥 고개를 돌리는 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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