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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31화 (131/147)

131화

“그렇다니까. 난 궁을 종종 돌아다니는 걸 본 것 같기도 한데. 넌 본 적 없어?”

하녀들의 속닥거리는 소리가 문을 넘고, 에슬린의 귓가를 파고들었다.

에슬린은 가만히 입구 근처 벽에 등을 대고 섰다.

엿들을 생각은 없었는데 어쩐지 나서기에도 애매해져 버렸다.

“으음. 잘 모르겠네. 워낙 궁에는 하녀가 많으니까…….”

“리페리우스 공작저에서도 하녀 일을 했다더라고.”

“리페리우스 공작저? 그 험한 북부?”

“그래.”

하녀들 사이에 잠시 정적이 흘렀다.

“……뭔가 기분이 이상하네.”

“……그치? 솔직한 말로, 정말 황녀님이 맞나 싶다니까.”

“그러니까. 황족이 어떻게 하녀 일을 해?”

“그러게. 얼굴도 다르시고, 왠지 좀 꺼림칙…… 헉! 저, 전하!”

하녀들이 우당탕탕 몸을 일으켰다. 흡사 귀신이라도 마주한 표정이었다.

에슬린은 곤란한 낯으로 볼을 긁었다.

그냥 돌아갈 걸 그랬나?

하지만 저런 말들을 함부로 하게 놔둘 수도 없었다.

황궁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것 중 하나가 바로 저 입이기 때문에.

“물이 없어서.”

“죄, 죄, 죄송합니다! 바로 채워 올리겠습니다.”

들으셨을까? 시선을 교환하며 하녀들이 식은땀을 뻘뻘 흘렸다. 얼굴이 하얗게 질려 있었다.

들으셨으면 호되게 혼내지 않으셨을까?

그들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물병을 가져갔다.

에슬린이 주방을 슥 훑었다.

“왜 일하는 사람이 너희뿐이야?”

“그, 궁내부에서 사람을 보내겠다고는 했는데 아직 소식이 없어서요.”

“그래. 고생이 많겠네. 밤도 늦었는데 그만 쉬어. 물은 내가 알아서 가져갈게.”

에슬린이 다시 물병을 향해 손을 뻗었다. 하녀들은 질색하며 휙휙 고개를 내저었다.

“아, 아뇨! 저희가 올리겠습니다! 올리게 해 주세요!”

“그래, 그럼.”

에슬린은 미련 없이 몸을 돌렸다.

“드, 듣지 못하신 것 같지?”

“그럴 거야……. 휴. 말조심해야지.”

“빨리, 빨리 물을 가져다드려.”

하녀들은 순식간에 분주해졌다.

한편 주방을 나서는 에슬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저벅, 저벅. 빈 복도를 밟아 나가는 걸음마저 고뇌에 젖어 있었다.

“…….”

그래서 그녀는 제 호위 기사가 전혀 다른 인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인지하지 못했다.

침실을 향해 걷는 가느다란 뒷모습.

“흠.”

그 뒤를 따르며, 테베트는 언제쯤 에슬린이 저를 눈치채 줄지 가늠해 보았다.

그보다.

‘내일은 궁내부를 조져야겠군.’

눈빛이 서늘하게 빛났다. 생각에 잠긴 에슬린만큼이나 그도 생각이 많아졌다.

뒤에 테베트를 달고 있다는 것도 모른 채, 에슬린은 느리게 계단을 올랐다.

먼지 쌓인 난간이 눈에 띄었다.

‘하녀를 더 늘리는 건 안 되겠어.’

이전에 비하면 사용인들의 숫자는 턱없이 적은 축이었으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아직 에슬린을 믿지 않는 사람은 있었다.

특히 사용인들은 갑자기 주인이랍시고 나타난 에슬린을 떨떠름해했다.

이해 못 할 바는 아니다.

‘문제는 나에게 카르단이라는 적이 있다는 거지.’

신뢰가 없는 상황에선 작은 유혹만으로도 쉽게 마음이 흔들린다.

카르단이 금화 주머니를 내민다면, 저들은 언제 에슬린의 하녀가 아니라 첩자로 얼굴을 바꿀지 모를 일이었다.

‘의심하는 것도 피곤한 일이네…….’

분명 돌아왔는데, 제집 같지 않은 불편함이 신경을 거슬렀다.

에슬린은 집무실이 있는 복도로 접어들었다.

그때 웬 팔이 불쑥 튀어나와 제 앞을 가로막았다.

“……?”

“거기가 아닙니다, 전하.”

호위 기사가 먼저 미친 것인가? 순간 에슬린은 생각했다.

하지만 곧 목소리의 정체를 깨달았다.

“지금 시간엔 침실로 가셔야죠.”

한쪽 팔로 벽을 짚은 채 테베트가 에슬린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웬일이에요? 언제부터?”

“글쎄, 맞혀 보십시오.”

자세 때문인지, 짓궂게 구겨지는 얼굴이 어쩐지 불량스럽게 느껴졌다.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웃음을 터뜨렸다.

“기사단에서 온 건가요?”

“네.”

“피곤할 텐데, 얼른 돌아가서 편하게 쉬지 않고요.”

“지금 쉬는 중인데. 제가 편안해 보이지 않습니까?”

그는 보란 듯이 벽에 팔꿈치를 대고 머리를 괴었다.

누가 보면 영락없이 관심 있는 사람에게 찝쩍대는 한량의 모습이다.

하지만 에슬린은 알았다.

그가 이 잠깐의 짬을 내기 위해 얼마나 폭풍 같은 하루를 보냈는지.

“바쁘면서…….”

“아무래도 전하께선 제가 온 게 영 못마땅하신 것 같군요.”

“…….”

“이만 돌아갈까요?”

“아뇨.”

그가 정말 돌아갈 것처럼 몸을 돌리기에 에슬린은 자기도 모르게 테베트의 옷자락을 쥐었다.

그의 입꼬리가 슬그머니 올라갔다.

“가지 말아요.”

차갑던 황녀궁 공기가 비로소 따뜻하게 느껴졌다.

그가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이곳이 제 공간이라는 사실이 그제야 실감 났다.

에슬린은 테베트의 옷자락을 만지작거렸다.

“사실은 저도 보고 싶었거든요.”

“착한 말이군요.”

테베트가 에슬린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길게 드리우는 그림자에 고개를 들었다. 다정한 온기 어린 얼굴이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그가 커다란 손을 들어 에슬린의 턱을 감쌌다.

“당신이 착한 말을 했으니…….”

“테베트 경이 상을 받겠다고요?”

테베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아뇨.”

“…….”

“상을 주겠단 겁니다.”

에슬린이 영문 모르겠다는 듯 한쪽 눈매를 찡그렸다.

그는 아주 능청스러운 얼굴로 제 얼굴을 들이밀었다.

가볍게 이마가 닿았다.

“자, 얼마든지 구경해요. 솔직하게 말했으니 당신은 자격이 있습니다.”

“나 참.”

허탈한 웃음이 터지자, 그가 살짝 벌어진 입술에 기습적으로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씩 웃는 얼굴이 장난기 가득한 소년 같았다.

에슬린은 테베트와 복도를 걸었다.

집무실 문을 여는데, 그가 불만스럽다는 듯 혀를 찼다.

“아까 한 말은 농담이 아닙니다. 왜 집무실이죠? 이 시간이면 침실에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아직 좀 봐야 할 게 남았어요.”

대수롭지 않은 대꾸에 테베트의 인상이 단숨에 험악해졌다.

“남부 일은 대충 마무리가 된 거 아닙니까?”

“진짜 마무리는 아니죠. 아직 남부 열병은 끝난 게 아니니까.”

맞는 말인지라 테베트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에르단 황자에게선 아직도 연락이 없나 보군요.”

“맞아요. 디에리안에게 연락을 넣어 두었으니 곧 답변이 오겠죠.”

에슬린은 물컵을 들었다. 어느새 하녀들이 물을 채우고 간 모양이었다.

물병을 집으려는데, 순식간에 다가온 테베트가 그것을 낚아채 갔다.

쪼르르, 물을 따르는 손에 푸른 핏줄이 도드라져 있었다.

“약속하는데, 전쟁을 끝내고 돌아오면 제가 반드시 당신 시종으로 지원할 겁니다.”

“뭐라고요?”

“곁에 딱 붙어서 잔소리 좀 해야겠어요.”

탁, 그가 선언하듯 물병을 내려놓았다.

“사사건건?”

“사사건건.”

에슬린은 쿡쿡 웃으며 물을 마셨다. 시원한 물이 식도를 훑으며 내려갔다.

컵을 쥔 채 에슬린이 몸을 돌렸다.

“음. 귀찮으니 고용하지 않을래요.”

테베트의 눈썹이 급경사를 그리며 올라갔다.

“제가 귀찮습니까?”

“조금?”

“…….”

테베트가 충격으로 굳어졌다. 집무실 책상으로 향하던 그녀가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였다.

“그래서 좋은 것 같기도 하고…….”

기다란 눈매가 매혹적으로 휘어졌다.

“아닌 것 같기도 하고요.”

“……당해 낼 수가 없군.”

테베트는 뒷머리를 문지르며 피식 웃었다.

하녀 몇이 들어와 간식을 두고 사라졌다.

테베트는 수두룩하게 쌓인 쿠키며 케이크 같은 것들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 어느 것도 에슬린 취향이 아니었다.

“출정 준비는 좀 어떻죠?”

집무실 책상에 앉은 에슬린이 물었다.

테베트는 가벼운 과일과 견과류를 가져오라 명령한 뒤 문을 닫았다.

“당신이 신경 쓸 만한 일은 없습니다.”

“출발은?”

“보급품 준비만 마무리되면 몇 주 내로 떠날 겁니다.”

“……그렇군요.”

에슬린의 얼굴이 문득 쓸쓸해졌다. 그는 그녀의 변화를 놓치지 않았다.

“에시.”

테베트가 의자에 앉은 에슬린 옆에 다가갔다.

그녀를 돌려 앉히고, 망설임 없이 그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검은 망토가 거침없는 기세로 펄럭였다.

“맹세컨대 오래 걸리지 않을 겁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었다. 그는 혼자 남을 에슬린을 걱정하는 것이다.

그러니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시간을 쪼개고 쪼개, 이렇게 만나러 오는 것이겠지.

그의 걱정이 되어서는 안 된다.

에슬린은 테베트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웃었다. 강인하고 굳건한 윤곽이 손끝에서 선명하게 느껴졌다.

“그래요. 기다릴게요.”

테베트는 제 얼굴을 간지럽히는 손목을 잡았다. 여린 손바닥에 입술을 묻으며 그가 잠시 에슬린을 응시했다.

똑똑, 하녀들이 다시 간식을 들고 나타났다.

에슬린이 상체를 돌리는 바람에 손길이 멀어졌다.

테베트는 가볍게 몸을 일으켰다.

“과일 먹고 싶어 한 거 어떻게 알았어요?”

하녀들이 두고 나간 트레이를 보며 에슬린이 물었다. 그녀는 말린 과일 조각을 집어 입 안에 넣었다.

테베트가 자랑하듯 어깨를 으쓱였다.

“이것 봐요. 이렇게 일 잘하는 시종이 또 어딨습니까? 빨리 날 고용하겠다고 말해요.”

“어림도 없는 소릴.”

에슬린은 별 시답잖은 농담을 다 듣는다는 표정이었다.

진심인데.

그녀는 가끔 테베트의 말을 쓸데없는 소리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어림없긴.”

어쩐지 괘씸해, 테베트는 그 못된 입술을 과일째 베어 물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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