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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32화 (132/147)

132화

“…….”

“…….”

“그러니까…….”

메리사 라이트는 두 눈을 끔뻑였다.

손발이 차가웠다. 목 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렀다.

말은 좀처럼 문장이 되지 못했고, 갈 곳을 잃은 눈동자는 갈팡질팡 흔들렸다.

그러니까 메리사 라이트는 지금 긴장하고 있었다.

머리가 새하얘질 만큼. 입 안이 바짝 말라 버릴 만큼.

“메리사 님?”

깨끗한 목소리가 들렸다.

메리사는 벼락 맞은 사람처럼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미안해!”

“……음?”

“아니, 아니…… 방금 건 실수로…… 하여튼 죄송해요!”

에슬린이 고개를 기울였다. 다짜고짜 사과하는 의도를 이해할 수 없었다.

“뭐가 미안해요?”

“나는, 아니, 저는…… 저는 정말 황녀 전하이신 줄도 모르고…….”

메리사는 달달 떨리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이 손으로 감히 황녀를 부려 먹었다. 부려 먹기만 했나? 종종 등짝이나 어깨를 찰싹 때리며 타박하기도 하지 않았나.

“진짜 몰랐어요. 용서하세요…….”

메리사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말했다.

맞은편에 앉은 에슬린이 우아한 동작으로 턱을 괴는 게 느껴졌다.

그래, 왜 못 알아봤을까?

보통 하녀 아이가 아니었는데. 저 반듯한 모습은 물론, 아는 것 또한 남다른 아이였는데!

“부디 목숨만은 살려 주세요. 착하게 살게요…….”

“무슨 소릴 하는 거예요.”

에슬린은 웃음을 참지 못했다.

평소의 기세는 다 어디로 간 건지, 메리사는 잔뜩 위축된 모습이었다.

아침 일찍, 메리사가 찾아왔다. 궁내부 관리와 함께였다.

쭈뼛쭈뼛 응접실에 들어선 그녀를 보자마자, 에슬린은 눈앞이 환해지는 느낌을 받았다.

‘근데 누가 궁내부에 연락을 넣은 거지?’

저 모습을 보니 제 발로 찾아온 것 같진 않은데.

오들오들 떨던 궁내부 관리의 모습이 절로 떠올랐다.

마치 사나운 맹수를 피해 도망친 토끼 같은 꼴…….

궁내부도 여러모로 힘든 모양이었다.

떠오르는 상념을 정리하며 에슬린이 메리사를 응시했다.

“그보다 요즘 어떻게 지내요?”

“네?”

메리사는 질문의 의도를 파악하고자 눈을 깜빡였다.

“갑자기 황자비궁을 나가게 됐잖아요.”

“아.”

메리사는 우물쭈물 입술을 달싹였다.

레실리아가 황궁을 떠나고, 황자비궁의 사용인들은 제각기 흩어졌다. 대부분은 다른 궁에 배속되었다고 들었다.

“지금은 황궁 밖에서 임시로 지내고 있어요. 곧 가문으로 돌아가려고요…….”

메리사가 깊은 한숨처럼 말했다. 그녀는 수도에 타운 하우스를 갖지 못한 귀족가 영애였다.

에슬린은 망설이지 않았다.

“여기로 오는 건 어때요?”

“네?”

허공을 헤매던 메리사의 시선이 에슬린에게 향했다.

드디어 눈이 마주쳤다.

“보다시피 자리가 많이 남아서.”

에슬린은 황량한 응접실을 가리켰다.

“…….”

메리사는 멍하게 황녀의 얼굴을 응시했다.

그 하녀, 에슬린 로즈벨이 사실은 황녀 에슬린 베르타니아였다는 걸 알았을 때의 기분이란.

얼마나 경악했던가? 아니, 그건 경악이라는 단어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감정이었다.

“……황녀궁으로 오라고요?”

메리사는 혼잣말처럼 되물었다. 그건 에슬린의 말을 이해하지 못해서가 아니라,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저는…….”

눈앞의 인물은 그저 고요히 웃을 뿐이었다.

황자비궁의 하녀일 때와 별반 다를 바 없는 익숙한 미소.

메리사는 입술을 사리물었다.

“한 가지만…… 여쭤도 될까요?”

“뭐죠?”

“황자비궁에서 저는 의지가 되지 않았나요?”

목소리는 작고 조심스러웠으나, 시선만큼은 올곧았다.

에슬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날 여러 번 도와줬잖아요.”

비록 에슬린이 의도한 일이었지만, 수석 하녀에게 괴롭힘을 당할 때도 메리사는 어떻게든 도와주려 했다.

에르단을 만나러 처음 황자비궁에 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왜…… 왜 저는.”

메리사는 말을 끝맺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말하면서 지금껏 인지하지 못했던 진짜 속내를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분한 것이다.

레실리아도 알고, 수석 하녀도 알고 있던 로즈벨의 정체를 저만 모르고 있었다는 게.

물론 엄청난 일이기에 남에게 함부로 떠들 수 없었다는 걸 머리론 잘 알고 있었다.

그건 단순히 서운하다는 감정이 아니었다.

황녀는 계략가였다.

그녀의 계획에 제가 필요했다면, 어떤 위험을 무릅쓰고서라도 황녀는 정체를 밝혔으리라.

그게 스스로 분해 죽을 것 같았다.

제가 필요한 사람이 아니었다는 게.

“황녀궁으로 오겠냐고 물으셨죠?”

“…….”

“좋아요.”

반짝이는 눈동자가 황녀를 똑바로 응시했다.

“저는 늘 시녀로 잘 해내고 싶었어요. 이 황궁에서, 보란 듯이 잘 살고 싶었죠. 그걸.”

어지러이 헤매던 눈동자가 에슬린에게 가닿았다. 그건 황녀를 보는 시선이 아니었다.

“로즈벨만큼은 누구보다 잘 알 거예요.”

“그럼요, 물론이에요.”

에슬린은 다정하게 웃었다.

메리사가 몸을 일으켰다. 단정하게 묶어 올린 주홍빛 머리카락이 살랑 흔들렸다.

“짐을 정리해 내일까지 들어올게요.”

어느새 산뜻해진 얼굴이었다.

“그렇게까지 서두르지 않아도 괜찮은데요.”

“어머, 누구보다 잘 아시는 분이 그렇게 말씀하시면 안 되죠.”

메리사의 곧은 눈썹이 비쭉 치켜 올라갔다.

“오면서 보니 궁이 엉망이던데, 언제까지 방치하시려고요?”

할 일이 산더미예요. 메리사가 벌써부터 질린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떨었다.

“그럼 내일 봐요, 전하. 아, 맞다.”

떠나려던 그녀가 별안간 멈추어 섰다.

“내일까지 그 말투 좀 어떻게 해 보시고요.”

“말투?”

“설마 자기 시녀에게도 존댓말하실 건 아니죠?”

메리사가 기괴한 것을 보았다는 듯 눈썹을 일그러뜨렸다.

에슬린은 그 말뜻을 헤아리다 피식 웃고 말았다.

어느새 본연의 기세를 완벽히 되찾은 메리사가 바쁜 몸짓으로 멀어졌다.

메리사가 들어오고, 황녀궁은 빠르게 정리되기 시작했다.

그녀는 황자비궁을 한 번 책임져 본 능력 있는 시녀였다. 경험이란 배신하지 않는 법이다.

황녀궁을 바쁘게 휘젓고 다니는 주홍빛 머리카락을 보다 보면, 에슬린은 자연히 제 예전 시녀가 떠올랐다.

‘로사나는 저렇게까지 의욕적이진 않았던 것 같은데.’

당연한 건가.

로사나와 메리사는 근본적으로 달랐다.

로사나는 한시라도 빨리 황궁을 나가는 게 목표였다.

“전하, 모리어스 후작께서 오셨어요.”

메리사가 다가왔다. 에슬린은 복도를 걷던 걸음을 멈추었다.

“갈게.”

“차를 준비하게 할게요.”

“하녀들은 좀 어때?”

메리사가 어깨를 으쓱였다.

“괜찮아요. 수상한 짓 하는 애들도 딱히 없어 보이고요.”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숫자가 많진 않지만 일일이 감시하려면 수월하진 않을 거야. 하녀장도 완전히 믿을 순 없으니 당분간만 좀 부탁할게.”

“부탁이 아니라 명령하셔야죠.”

메리사가 눈썹을 휙 치켜들었다. 에슬린은 웃음을 터뜨리며 다시 말했다.

“좀 명령할게.”

“…….”

단어만 바뀐 거 아닌가?

메리사는 아주 불만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에슬린은 딱히 정정하지 않았다.

하녀들을 관리하는 건 시녀의 일 중 하나였지만, 그들을 감시하는 것까진 시녀의 일이 아니었다.

주어진 역할 이상의 것을 요구하는 것이니 이건 부탁이 맞았다.

“과하게 생각하는 것도 병이에요, 전하.”

뾰로통하게 쏘아붙인 메리사가 분주히 사라졌다. 에슬린도 다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집무실에 들어서자, 의자에 앉아 있던 모리어스 후작이 몸을 일으켰다.

“전하의 연구서가 신전 검증을 마치고 남부로 갔습니다.”

“그래요.”

의자에 앉으며 에슬린은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보다 만 책을 열었다.

후작은 그녀가 읽는 것을 흘끔 보았다. 크세로이츠에 관련한 책인 듯했다.

“카벤 백작도 부랴부랴 떠났습니다.”

“그렇군요.”

후작은 마른 입술을 한 번 축였다.

“……정말 에르단 전하께서 이미 크세로이츠인들과 협상을 마치신 겁니까?”

“네. 제가 황녀궁에 돌아오기 전에 치료법을 얻었다고 들었으니, 약을 만들기 시작했겠죠.”

“…….”

“의원도 다 구해 놨고요.”

탁, 에슬린이 보던 책을 덮었다.

모리어스 후작을 응시하며 느리게 말을 이었다.

“그 치료약이 정말 우리 제국인들에게 치유 효능이 있는지가 제일 중요해요.”

“예에…….”

“그 효능 검증만 수월히 끝나면, 봄이 오기 전엔 보급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왜 그런 표정이죠?”

모리어스 후작은 어색하게 웃으며 뒷머리를 긁적였다.

“아뇨, 그저…… 모두 전하의 손바닥 안이었구나 싶어서 말입니다.”

에슬린의 연구서를 구하기 위해 며칠간 불나게 뛰어다녔는데.

그 원본은 진작 남부에 가 있었다니.

에슬린이 다 읽은 책을 옆으로 슥 밀었다.

“남부 일은 더 지체할 수 없었어요.”

“예, 알고 있습니다.”

“물론 제가 황녀궁에 돌아오는 일도 중요했고요.”

그러니 최선의 방법을 선택한 것뿐이었다.

에슬린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티 테이블 근처로 걸어가 물을 따라 마셨다.

“연구서 원본을 미리 보내 두었다는 건 일단 비밀로 해요.”

크리스털 잔이 깨끗하게 비워졌다.

“눈치를 볼 생각은 없지만, 귀족들이 농락당했다고 생각하면 지금은 피곤해지니까요.”

모리어스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예. 애꿎은 반발을 살 필요는 없을 겁니다.”

“맞아요.”

사람들은 직접 눈으로 본 것을 가장 신뢰하는 법이다.

갑자기 나타나 연구서 원본을 들이밀어 봤자, 우연히 손에 넣은 것으로 황녀 행세하려 든다고 우길지도 몰랐다.

“그래야 제 정체를 더 확실히 믿을 거고……”

“남부 사태 해결은 온전한 전하의 공이 되겠죠.”

모리어스 후작이 나직하게 말을 이었다.

옅게 웃은 에슬린이 빙글 몸을 돌렸다.

“그래서.”

그녀는 티 테이블을 짚은 채 섰다. 완만한 곡선을 그린 입술이 천천히 움직였다.

“이제 내게 완전히 충성할 마음이 들었나요? 모리어스 후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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