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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33화 (133/147)

133화

“예?”

후작은 순간 할 말을 잃었다.

에슬린은 평소처럼 미소 짓고 있지만, 눈빛만큼은 어느 때보다 매서웠다.

“……전하, 저는.”

변명하듯 입술을 떼었지만, 뭐라고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이미 제 속내는 모두 간파당했음을 깨달았다.

그의 충성은 반쪽짜리였다.

레실리아를 구해 준 대가에 가까운 것이었다. 에슬린을 지지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으나, 거기까지였다.

“후작이 정말 나를 믿었다면, 진작 황후께 가 황녀궁을 열어 달라고 말씀드렸겠죠.”

“전하…….”

후작의 마른 입술이 뻐끔거렸다.

“물론 신중한 건 좋은 습관이지만, 후작.”

주르륵, 차가운 음성에 식은땀이 흘렀다.

“두 번은 없어요.”

“……죄송합니다.”

후작이 진심을 담아 사죄했다.

에슬린은 짚었던 손을 떼고 다시 책상으로 돌아왔다.

“이만 가 봐요. 에르단에게 연락이 오면 다시 부르죠.”

“예, 전하.”

모리어스 후작은 손수건으로 이마를 훔쳤다.

집무실을 나서려던 그는 잠시 머뭇거렸다. 에슬린을 다시 모시기로 했으니, 묻지 않을 수 없었다.

“저, 혹시.”

에슬린이 고개를 들었다.

“이번 전쟁에 성배가 나타날 확률이 있는지, 여쭤봐도 됩니까?”

“글쎄요. 가능성은 있죠.”

애매한 대답이었다.

마물이 성배를 훔쳐 갔다는 게 알려지고 난 뒤, 모든 포털엔 성배가 나타날 가능성이 생겼다.

“걱정 말아요. 성배는 카르단보다 제가 먼저 손에 넣을 거니까.”

“그거 말씀입니다만…….”

모리어스 후작이 고개를 기울였다.

“성배를 누가 먼저 손에 넣느냐는 중요치 않은 것 아닌지요?”

“왜 그렇게 생각하죠?”

“예전 성배가 있었을 때는, 황족이라면 누구든 성배에 닿을 수 있었으니까요.”

에슬린은 짧게 웃었다.

“맞아요. 쉽게 말하자면, 선착순이 아니죠. 누가 성배의 선택을 받느냐가 중요하지.”

“그럼…….”

“후작이 카르단이라면 어떡할 것 같아요?”

“예?”

갑작스러운 질문에 후작이 떨떠름한 표정을 지었다.

“만약 저라면…….”

에슬린은 팔꿈치를 대고 턱을 괴었다. 짙어진 눈동자가 후작의 얼굴을 뚫어져라 응시했다.

“성배를 조작할 것 같은데.”

“……!”

“성배의 선택을 받지 못하는 일은 절대 없도록 말이에요.”

흑마법은 그걸 돕겠죠. 하지만 그 말까진 꺼내지 않았다.

에슬린은 허리를 바로 세웠다.

“그러니 누구보다 빨리 찾아야죠. 빼앗겨서도 안 되고요.”

화살처럼 이어지던 시선이 떨어져 나갔다.

후작은 멍하게 서 있다 재차 축객령을 듣고 황녀궁을 빠져나왔다.

* * *

“에르단 전하께 연락이 왔습니다.”

집무실 문을 열기가 무섭게 디에리안이 불쑥 말했다.

드디어. 에슬린의 눈동자에 이채가 스쳤다.

그는 빠르게 다가와 테이블 위로 손을 뻗었다. 푸른 돼지가 서서히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흘끔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아십니까? 이게 얼마나 많은 마력이 드는지.”

“응.”

그는 한참을 제 마법의 위대함에 대해 설파했지만, 솔직히 거의 들리진 않았다.

“에슬린! 연락이 늦어서 미안해.”

꽥꽥 우는 돼지만이 반가울 따름이었다.

“새로운 약 제조는 순조로워. 효능 시험도 이제 막 시작했고.”

에슬린의 입술에 그제야 미소가 고였다.

“역시 로사나는 대단해.”

그러자 디에리안이 슥 고개를 돌려 에슬린을 보았다.

“로사나? 로사나 님을 찾으신 겁니까?”

쉿, 에슬린은 검지에 손가락을 댔다. 디에리안은 인상을 구기면서도 입을 다물었다.

“물론 네가 살아 있었다는 걸 납득시키는 건 실패했어. 계속 실패할 것 같아. 왜냐면 걔가 내 정신 건강이 멀쩡한지 매일 체크하러 오거든…….”

돼지는 다소 우울하게 중얼거렸다.

“그보다 근데 작은 문제가 있어.”

에슬린은 미간을 구겼다.

“치료약에 크세로이츠에서만 나는 광물이 들어가거든. 그들이 가져온 광물 가루가 있긴 한데, 아마 대량 제조하기엔 부족할 것 같아.”

에슬린은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크세로이츠의 광물이라.

크세로이츠는 험준한 산맥이 많은 대륙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어업으로 생계를 꾸리고, 바다가 어는 계절에는 풍부한 광물 자원을 활용해 주변국들과 교역했다.

“효능 검증이 끝나면 재료 수급 방법에 대해 생각해 봐야 할 것 같아.”

에슬린은 동조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궁금하지 않겠지만 내 근황을 전하자면 난 의외로 잘 지내고 있어. 크세로이츠인들하고는……”

디에리안이 양 귀를 틀어막았다.

“원래 이렇게 시끄럽습니까?”

“넌 더했어.”

“…….”

디에리안은 적잖은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하여튼 크세로이츠인의 불꽃놀이는 대단했어. 마법도 없는데 그들은 참 손재주가 좋은 것 같아. 그러고 나서 그 나라 브랜디를 마셨는데……”

에슬린이 미간을 구기며 눈짓을 보냈다. 디에리안이 손을 거두자 푸른 기운이 스러졌다.

그의 신문물 체험기는 더 들을 필요가 없는 것이었다.

“로사나 님을 찾으라고 하셨을 줄은 몰랐습니다.”

삐딱하게 앉아 있던 디에리안이 말했다.

“로사나가 내 시녀로 있었던 이유가 뭔지 알아?”

“글쎄요.”

“내 궁에 있으면 이국의 의학 서적을 가장 먼저 읽을 수 있거든.”

“아하.”

“그걸 대가로 로사나가…….”

에슬린은 말하다 말고 조금 웃었다.

“무슨 짓을 했는지는 너도 알걸.”

‘전하께서 하녀 옷 입고 신나게 돌아다니실 때! 전! 여기서! 그 시커먼 공작님을 상대해야 했다고요!’

‘그 북부 공작이 왜 왔지?’

에슬린은 손수건 하나 빌려주지 않던 목석같은 얼굴을 떠올렸다.

그건 정말 이상한 첫 만남이었다.

당연히 그땐 몰랐다. ‘그 북부 공작’과 이렇게 엮이게 될 줄은.

정말, 꿈에도.

“불쌍한 로사나 님.”

디에리안이 아주 슬픈 표정을 지었다.

로사나가 팔자에도 없는 황녀 행세를 하다 리페리우스 공작을 마주친 건, 측근들 사이에서도 유명한 일이었다.

그는 로사나에게 이유 모를 동질감을 느끼는 듯했다.

“진짜 오랜만에 드리는 말씀인데.”

“뭘?”

“이젠 제발 얌전히 계십시오. 제발.”

에슬린은 웃으며 대답하지 않았다.

“아무튼 크세로이츠 의학을 가장 빠르게 이해할 수 있는 건 로사나일 거야.”

자세를 고쳐 앉으며 말하자 디에리안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간 로사나 님이 읽으신 책 중에 이번 열병에 관한 내용이 없었다는 게 애석할 뿐이군요.”

“워낙 다른 나라 의학서는 남부에서도 좀처럼 구하기 어려웠으니까.”

늘 생각했던 일이지만, 에슬린은 그들과 어렵지 않게 의사소통이 가능한 게 신기했다.

그렇게 먼 바다를 두고 떨어진 땅인데.

어쩌면 과거엔 한 대륙이었던 게 아닐까? 그런 허무맹랑한 생각을 하던 때도 있었다.

무엇이든 이젠 상관없다.

장벽이 없다는 건 크나큰 축복이자 다시없을 기회일 뿐이다.

“로사나라면 아마 치료약 제조는 성공하겠지.”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문제는…….”

“그 약용 광물을 어떻게 얻느냐겠지.”

에슬린이 답했다. 푸른 눈동자가 대륙 너머를 상상하듯 반짝거렸다.

에슬린은 모리어스 후작을 황녀궁으로 불러들였다.

갑작스러운 부름에도 후작은 지체 없이 입궁했다.

“크세로이츠의 광물 말씀이십니까……?”

후작이 중얼거렸다. 희끗한 갈색 눈썹에 고심이 서렸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지하자원이 많은 나라라더니, 약재로 광물이 많이 쓰이나 보군요.”

“네. 문제는 그게 크세로이츠에서만 난다는 거고요.”

“대체할 만한 다른 약재는 없습니까?”

“알아보라고는 했지만…….”

에슬린은 입을 다물고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댔다.

매끈한 미간이 좁아졌다.

지금 남부는 터지기 직전의 둑과 같았다. 오랜 전염병에 전쟁 소식까지 겹치며 민심은 최악을 달리고 있었다.

시간이 없다. 위험 수위에 다다른 불만은 작은 계기만으로도 쉽게 터져 버릴 터였다.

“대체할 만한 걸 찾기엔 시간이 부족해요.”

그때 노크 소리가 들리고 문이 열렸다.

“리페리우스 공작님.”

후작이 집무실에 들어선 남자를 보고 가볍게 인사했다.

문턱을 넘던 남자는 그런 후작을 보고 잔뜩 얼굴을 찡그렸다. 그는 빠르게 걸음을 옮겨 다가왔다.

“후작은 예의를 모르나?”

“예?”

갑작스러운 시비에 모리어스 후작이 눈동자를 굴렸다.

삐딱하게 선 남자가 고개를 기울였다.

심히 잘생긴 얼굴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깎아 놓은 듯한 반듯한 선이 가까이에서 보니 더 감탄을 자아냈다.

정작 그 주인공은 비뚜름히 입술을 틀어 올릴 뿐이었지만.

“모두가 쉬는 이런 밤에 찾아오는 건 무슨 경우인지 모르겠군.”

“테베트 경.”

황녀가 나지막하게 이름을 부르자 남자는 얌전히 입을 다물었다. 흉흉한 표정은 그대로였다.

꿰일 듯한 시선에 후작은 자기도 모르게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러는 저는? 그런 생각은 입 밖으로 꺼내지도 못했다.

제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긴 테베트가 몸을 돌렸다. 에슬린을 보자마자 빙하 같던 얼굴이 단숨에 부드러워졌다.

“무슨 얘기를 하고 계셨습니까?”

잔뜩 누그러진 목소리에 모리어스 후작은 하마터면 헛웃음을 흘릴 뻔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테베트는 에슬린에게 한 발자국 다가설 뿐이었다.

“별일이 아니라면 이만 침실로 가 쉬는 게…….”

“에르단에게 편지가 왔어요. 새로운 치료약에 크세로이츠의 광물이 들어간대요.”

그제야 비로소 테베트는 책상 위를 대충 응시했다.

에슬린이 조금 전 후작에게 설명한 그대로 남부 상황을 설명했다.

그는 표정 변화가 거의 없었다.

“그렇군요. 그래서요?”

“새로운 협상단을 꾸려야 해요.”

에슬린은 다시 검지로 책상을 두드렸다.

“남부 혹은…….”

테베트의 손끝에 서서히 힘이 들어갔다.

“다른 대륙으로 갈.”

덜컹, 심장이 움직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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