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34화 (134/147)

134화

“아직 약 효과에 대한 검증까지 끝난 것은 아니지 않습니까?”

테베트는 짐짓 태연하게 말했다.

“미리 대비는 해 놔야죠. 효능을 확인하면 바로 협상 테이블에 앉을 수 있도록.”

“에르단 황자가 남부에 있습니다.”

“에르단만으론 부족해요.”

“…….”

테베트는 물끄러미 에슬린을 응시했다.

그녀는 편지에 시선을 둘 뿐, 테베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지금 남부에 와 있는 건 크세로이츠의 열둘째 황자라고 했어요.”

“황자?”

“네. 작정하고 치료법과 광물을 가지고 온 거겠죠.”

그들이 온 것은 우연이 아니다.

엄연히 목적이 있는 방문이었다.

크세로이츠는 작물을 재배하기에 적합한 토지가 아니었다. 추운 계절을 버틸 종자나 그에 맞는 재배법이 그들에게는 무엇보다 필요했을 것이다.

에슬린의 심장이 조금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새로운 교역로에 대한 가능성이 보였다. 혹은…….

“에르단이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황자라는 건 알고 있을 거예요. 그들의 본론은 지금부터겠죠. 그리고 그런 중요한 협상은 에르단과 하지 않을 거고요.”

치료법과 연구서의 교환은 시작일 뿐일 것이다. 그들의 본론은 광석을 수출해 새로운 수입원을 만드는 데 있었다.

그렇다면 이쪽이 제시해야 할 것은 무엇인가?

‘정답은 이미 알고 있어.’

처음 연구서를 건넸을 때부터 에슬린 또한 이는 시작에 불과하다고 여겼다.

편지 위에 고정하고 있던 시선을 들었다.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테베트와 눈이 마주쳤다.

“절대 안 됩니다.”

“뭘 말할 줄 알고요?”

그는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릴 뿐이었다.

“남부에 협상하러 가겠다고 말할 작정이셨지 않습니까?”

에슬린은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하지만 소리를 내기도 전에 테베트가 가로막았다.

“안 됩니다.”

한 치의 물러섬도 없는 단호한 기색이었다. 옆에서 후작이 낮게 한숨을 내쉬었다.

테베트는 빠르지만 정확하게 말했다.

“남부에서 전쟁이 일어날 겁니다. 치료법이 있다곤 하나 열병이 유행 중이고, 그곳 민심 또한 어지럽죠. 가는 길은 또 어떻습니까?”

그의 어조는 단조롭기 그지없었다. 그래서 더 뭔가를 억누르고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도적이 들끓어 용병 기사를 줄줄이 달고 떠난 카벤 백작을 잊었다고 하지 마십시오. 그런 곳에 가시겠다니.”

피처럼 붉은 눈빛이 낮게 가라앉았다. 생각만으로도 꺼림칙한 것을 떠올린 듯했다.

“절대, 안 됩니다.”

“…….”

에슬린은 긴 한숨을 내쉬며 테베트의 옆에 선 인물을 응시했다.

“후작은 어떻게 생각하죠?”

후작은 잠시 두 사람을 번갈아 가며 보았다.

리페리우스 공작의 시선이 유독 따갑게 박혔다. 서둘러 고개를 돌렸다.

“크흠…….”

광포함을 감춘 눈빛이 몹시 부담스러웠다.

나이와 상관없이, 그는 테베트가 불편했다. 리페리우스라는 이름이 주는 무게감 때문일지도 몰랐다.

“공작 각하의 말씀이 맞습니다.”

그러나 이 말만큼은 테베트가 무서워 동조하기 위해 한 말이 아니었다.

“테베트 경에게 동의한다?”

“예.”

후작은 냉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전하께서 지금 자리를 비우시면 안 됩니다.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직 전하의 기반이 불안정하지 않습니까?”

“…….”

에슬린은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후작의 말이 맞았다. 에슬린의 세력은 예전처럼 뻗어 나가지 못하고 있었다. 대귀족 두 명을 손에 쥔 것치고는 더딘 회복세였다.

“그건 내가 카르단에게 한 번 패배했기 때문입니까?”

“그런 것도 있습니다만…… 무엇보다 전하의 귀환을 실감하지 못하는 자들이 많기 때문입니다.”

“실감이라.”

후작이 모양 좋게 다듬은 갈색 수염을 쓰다듬었다. 그가 옆에 선 테베트를 흘끔 보았다.

“물론 리페리우스 공작께서 전하를 지지한다는 사실만으로 큰 기반이긴 합니다. 하지만.”

“하지만?”

“그 때문에 오히려 반발이 있기도 하죠.”

후작은 담담하게 덧붙였다.

“특히 원로 귀족들의 반발이 큽니다. 감히 리페리우스의 근본을 흔드는 일이라고요.”

젊은 가주의 치기 어린 선택이라고 했다. 드디어 리페리우스 공작가에 망조가 든 게 아니냐고 지껄이는 이들도 있었다.

“딱딱하게 굳은 머리로 헛소리나 해 대는군.”

테베트가 서늘하게 중얼거렸다.

후작이 잠시 그를 흘끔거리다 다시 입술을 움직였다.

“여러모로 불안정한 상황이니 당분간은 황궁을 지키시는 게 좋습니다. 귀족들도 좀 만나 보시고요.”

“…….”

“정말 새로운 협상단이 필요하다면, 제가 가겠습니다.”

“후작이?”

“예. 그러기 위해 제가 전하를 모시는 게 아니겠습니까.”

에슬린의 시선이 바닥 언저리를 헤맸다. 두 사람의 말을 가만히 곱씹었다.

신하에게 신하의 할 일이 있듯, 에슬린에게도 에슬린의 할 일이 있었다.

지금은 황궁 기반을 다지는 것 또한 제 중요한 역할이었다. 그것이야말로 모리어스 후작이 대신 나서 줄 수 없는 일이다.

하지만…….

“전하.”

대답 없는 에슬린이 신경 쓰였는지, 테베트가 순식간에 다가왔다. 두꺼운 팔이 그녀의 책상을 짚었다.

웃음기 하나 없는 날카로운 눈빛은 실로 오랜만이었다.

책상을 짚은 남자의 손이 초조한 듯 주먹을 말아 쥐었다.

핏줄 선 손등을 보며 에슬린은 입을 열었다.

“알겠어요.”

그제야 테베트의 손에서 힘이 풀렸다.

“치료약에 대한 효능 검증이 끝나려면 시간이 있으니, 약재에 대해선 더 생각해 보죠. 대체제를 찾을지도 모르고요.”

에슬린이 몸을 일으켰다.

“밤이 늦었으니 이만 돌아들 가요. 좀 쉬어야겠어요.”

에슬린은 생각을 정리할 겸 정원을 산책했다.

꽃이 사라진 라일락 정원은 그저 황량했다.

지금껏 정원 관리엔 썩 관심을 두지 않았다. 봄이 오면 이곳을 새롭게 가꿔 보는 것도 나쁘지 않으리란 생각이 들었다.

저벅, 저벅.

구름 하나 없는 맑은 날이었다.

달빛을 맞으며 걷다 보니, 문득 리페리우스 공작저에 있는 분수대가 떠올랐다.

‘그건 정말 아름다웠지.’

그곳에서 처음으로 테베트와 입을 맞췄다.

그래서 아름답게 느껴진 건지, 아니면 원래 그냥 아름다운 건지 에슬린은 이제 조금 헷갈렸다.

뚜벅, 뚜벅.

차가운 바람을 맞자 뜨겁던 머리가 진정되는 기분이었다.

그러자 비로소 제 뒤를 따르던 인물과 마주 볼 생각이 들었다.

“그 분수대 나 줄래요?”

“분수대?”

그림자처럼 뒤를 따르던 테베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공작저 별채에 있는 분수 말이에요.”

“아.”

“그거 갖고 싶어요.”

그러자 남자가 피식 웃었다.

“당장 옮겨 두라고 하죠.”

“…….”

순순한 대답에 어쩐지 분한 마음이 들었다.

에슬린은 그를 잠시 노려보다 긴 한숨을 내쉬었다. 하얀 입김이 허무하게 흩어졌다.

“……농담이에요. 지금 괜히 심술부리는 거라고요.”

그는 그저 그림처럼 웃을 뿐이었다.

“하인들에게 듣자 하니 리페리우스 보물 중 하나라면서요. 어떻게 그렇게 막 준다고 하죠?”

“당신 부탁이 아닙니까?”

테베트는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순간 바람이 불었다. 메마른 가지들이 스산한 소리를 내며 흔들렸다.

그가 빠르게 다가와 바람을 등지고 섰다.

에슬린은 부루퉁한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내 말을 잘 들어주면서 왜……”

“남부는 안 됩니다.”

그에 대해서는 여전히 단호한 얼굴이었다.

“제가 당신이 위험해지는 꼴을 두고 보게 하지 말아요.”

“…….”

“애초에 당신이 직접 움직여야 할 이유도 없지 않습니까?”

“……알아요.”

안다. 모든 일을 에슬린이 직접 해결할 순 없다.

움직이고 싶으면 자유롭게 움직이던 하녀일 때와는 달랐다.

“알고 있으면 그냥 집무실에 앉아서 이래라저래라 제게 명령이나 내리십시오.”

테베트가 에슬린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게 당신 할 일이니까.”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테베트는 그 웃음을 핑계로 에슬린의 작은 얼굴 곳곳에 입술을 눌렀다. 그렇게 철렁였던 마음을 진정시켰다.

사실 그가 에슬린의 남부행을 반대한 이유는 오직 하나였다.

에슬린이 이 대륙의 끄트머리에 서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으니까.

에슬린이 원하는 건 이뤄 줄 것이다. 그게 무엇이 됐든.

하다못해 그녀가 전장 한가운데에 서고 싶다고 한들, 그는 기꺼이 고개를 끄덕였을지도 모른다.

모든 걸 걸고 에슬린을 지켜 낼 자신이 있었으니까.

하지만…… 남부만큼은 안 된다.

테베트는 에슬린을 잘 알았다.

먼바다를 보면 그녀는 그곳을 건너고 싶어 할 것이다.

새로운 땅을 밟고, 새로운 것을 보고 싶어 할 것이다.

그렇게 기어코 이 저주받은 땅에 자신을 버리고 가 버릴 것이다.

그곳에선 에슬린을 지킬 수도, 만질 수도 없다.

‘지나친 생각일지도 몰라.’

하지만 테베트는 조금의 가능성도 허락하고 싶지 않았다.

공작저에서 에슬린이 도망쳤다는 걸 들었을 때, 롭시온에서 에슬린을 놓쳤을 때를 떠올리면 아직도 온몸의 피가 식었다.

‘또 에슬린이 도망친다면…….’

자신은 이제 견딜 수 없을 것이다.

거기에 생각이 미치자 테베트는 또다시 자기 자신이 지겨워졌다.

결국 제 욕심 때문에, 제 불안 때문에 에슬린을 이곳에 묶어 놓으려 하는 게 아닌가…….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