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5화
테베트는 그러나 그 어떤 것도 제대로 털어놓을 수 없었다.
저 자신도 제가 숨 막히는데, 에슬린도 그렇게 느낄까 봐 두려웠다.
“그럼 약속해요.”
집요해지는 입술을 밀어내며 에슬린이 속삭였다.
“약속?”
“전쟁을 마치면, 당신의 비밀에 대해 말해 줘요.”
“…….”
“그때 못 했던 말이 있잖아요. 기억 안 나요?”
“납니다.”
테베트는 잠시 에슬린을 응시했다. 맑은 눈동자가 그를 똑바로 올려다보았다.
“솔직히 지금 말해 줘도 상관없고요.”
머뭇거리듯 입을 달싹이던 테베트가 이내 결심한 얼굴을 했다.
“알겠습니다.”
저주에 대해 숨길 이유는 없었다.
하지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테베트가 단 한 번도 타인에게 제 약점에 대해 말해 본 적이 없어서였다.
그는 에슬린의 반응을 예측할 수 없었다.
혹여나 약점을 가진 자신을 걸림돌처럼 여길까 두려웠다.
제 곁이 족쇄처럼 느껴져 떠나고 싶어지면?
그러니 에슬린의 영웅이 되는 게 먼저였다. 그녀에게 성배를 바치면, 에슬린은 싫어도 테베트를 버리지 못하리라.
“약속하죠. 이 전쟁이 끝나면, 당신에게 반드시 못다 한 말을 할 겁니다.”
테베트는 연보라색 다이아몬드를 떠올렸다.
장인이 반지를 완성하는 시기는, 전쟁이 끝나는 시기와 비슷할 것이다.
청혼과 저주를 한 번에 말하는 사람도 아마 저뿐이겠지.
테베트는 정말로 자신이 지긋지긋했다.
하지만 그런 추접함으로 에슬린을 영원히 품에 넣을 수만 있다면야…… 무엇인들 못 할까.
“할 말이 아주 많을 거예요.”
다시 바람이 불었다.
테베트가 온몸을 기울여 바람을 막았다. 하지만 에슬린에게 흐르는 모든 바람을 다 막을 수는 없었다.
그것이 못내 안타깝고 서글펐다.
* * *
“황녀가 제 마법사를 이번 전쟁에 내보낸다더군요.”
프레이 백작이 말했다.
카르단은 핏물이 흐르는 고기를 자르며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들었어.”
“황녀도 확신하는 겁니다. 이번 전쟁에 성배가 나타나리라는 걸.”
“뭐?”
챙그랑. 식기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프레이 백작이 미간을 구겼다.
“흥, 설마……. 그냥 전쟁 공적이라도 쌓으려는 거 아냐? 그럼 귀족들이 다시 모여들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정말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질책하는 듯한 목소리에 카르단이 입을 다물었다.
“…….”
걔가 어떻게 확신하지?
‘이번 포털에 성배가 나타날 거라는 건 나만 아는 게 아니었어?’
그는 초조하게 다리를 떨었다.
카르단은 타툴란을 마계에 가둔 게 에슬린일 것이라고는 상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의 인형들 또한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나타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덤비는 거랑, 나타날 거라고 확신하고 덤비는 건 하늘과 땅 차이잖아.’
카르단도 그것만큼은 잘 알고 있었다.
“이번 포털에 성배가 나타난다는 건, 어느 정도로 확신하십니까?”
프레이 백작이 딱딱한 어조로 물었다.
카르단은 떨떠름한 얼굴로 포크를 들었다.
“100퍼센트야.”
푹! 고기를 찍자 육즙이 주르륵 흘렀다.
프레이 백작의 검지가 규칙적으로 테이블을 두드렸다. 그의 접시는 조금의 흐트러짐도 없이 처음 그대로였다.
“리페리우스 공작에게 성배를 빼앗기셔선 안 됩니다.”
“그건…… 당연하지.”
카르단은 거칠게 혀를 찼다.
표면적으론 누가 먼저 성배를 찾아오든 상관없었다. 중요한 건 성배의 선택이었다.
과연 성배는 카르단을 선택할 것인가?
“뭘 그렇게 봐? 성배가 날 선택할지도 모르잖아!”
프레이 백작이 차갑게 웃었다.
“그렇게 자신하시는데, 왜 성배를 먼저 손에 넣으려 하십니까?”
“…….”
카르단은 할 말이 없어졌다.
그가 거칠게 고기를 잘랐다.
“……성배에 무슨 짓을 해서든 그 빌어먹을 성수인지 뭔지를 흐르게 만들 거야.”
카르단은 짓씹듯 중얼거렸다.
“그러려면 황녀보다 먼저……”
“알겠다고!”
카르단은 버럭 소리쳤다. 프레이 백작의 무감한 시선이 그의 얼굴에 닿았다 이내 거두어졌다.
태연한 척했지만, 사실 프레이 백작은 등골이 오싹했다.
‘하마터면 아무런 준비도 없이 성배를 쥔 황녀를 맞닥뜨릴 뻔하지 않았는가.’
리페리우스는 기울었다.
그가 여태껏 전장에서 성배를 찾고 있었던 거라면…….
지금까지 리페리우스가 성배를 발견하지 못한 건 그야말로 운이 좋았다고밖에 표현할 길이 없었다.
‘골치 아프게 됐군.’
성배가 나타났다는 사실을, 아니. 황녀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제가 조금이라도 빨리 알았더라면.
그는 사태를 이 지경까지 키운 카르단이 원망스러웠다.
그러나 이미 지난 일이었다.
“이대로 두고 봐서는 안 됩니다.”
프레이 백작은 거세게 주먹을 말아 쥐었다.
“남부에 미리 보내 두셨다던 인물은 확실한 자입니까?”
살얼음 같은 시선에도 카르단은 모처럼 의기양양한 표정을 지었다.
“그 누구보다 확실하지.”
며칠 전 나타난 ‘인형’은 제게 똑똑히 말했다.
‘주인께서 성배를 완전히 손에 넣으셨습니다.’
‘좋아. 곧바로 내게 가지고 오라고 해!’
타툴란은 카르단이 가지고 있는 가장 강력한 패였다.
이미 그것을 손에 넣었다는데.
이쪽으로 통할 문만 열리면, 당연히 흑마법사는 성배를 가지고 제게 올 것이었다.
“정말이십니까?”
“그래, 걱정하지 마.”
카르단은 음습하게 웃으며 말했다.
“백작은 에슬린을 없앨 계책이나 생각해.”
테이블을 쿵쿵 두드리자 식기가 저들끼리 몸을 부딪쳤다.
“혹시 성배에 문제가 생겨도 상관없도록.”
프레이 백작은 희미하게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래. 차라리 그 방법이 더 빠를지도 모른다.
그는 냅킨으로 입가를 닦고 몸을 일으켰다.
“물론입니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싸늘한 바람을 일으키며 백작이 황자궁 식당을 나왔다.
마차에 올라타자, 마부는 기다렸다는 듯 채찍을 휘둘렀다.
프레이 백작가의 마차가 수도 한복판을 빠르게 달렸다.
그는 마차 창문에 달린 커튼을 젖혔다. 창밖 풍경이 휙휙 바뀌었다.
“이럇! 비켜!”
마부는 거침이 없었다.
백작가의 문장을 본 사람들이 서둘러 길 한쪽으로 물러섰다.
프레이 백작은 커튼을 내렸다.
카르단 베르타니아를 황좌에 올리면, 저들은 제 마차를 보고 더욱 두려움에 떨리라.
‘프레이 공작가.’
그건 오직 카르단만을 통해 이룰 수 있는 것이었다.
황녀는 디에리안을 데려갔을 때부터, 저를 벌레보다 못한 존재로 여기며 경멸하곤 했으니까.
‘허수아비 황제를 세워 이 제국을 손에 넣으리라.’
그것이야말로 귀족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대한의 영광이자 부귀다.
그의 목표는 언제나 변함없었다.
‘그러려면…….’
눈엣가시 같은 황녀를 처리해야 한다.
“이번에야말로. 반드시.”
* * *
베르타니아 황궁에 남부로부터 소식이 날아들었다.
새로운 치료법으로 남부의 의원들이 치료약을 만들어, 그 효능을 검증하고 있다는 소식이었다.
다만 그 치료약에는 베르타니아에서 나지 않는 광물 가루가 들어가므로, 이에 대한 황궁의 지원이 필요하다는 내용이었다.
‘……진행이 생각보다 빠르군.’
편지를 내려놓으며 황후는 생각했다.
생각보다 일의 진척이 빨랐다.
연구서를 보내자마자 기다렸다는 듯 크세로이츠인들이 치료법을 내준 것도 그렇고, 의원들이 치료약 연구를 속전속결로 끝마친 것도 그렇고.
효능 검증까지 마무리 단계라니.
‘신이 남부를 돕는 것인가?’
황후는 회의장으로 걸음을 옮기며 생각했다.
그녀는 신을 믿지만, 신의 힘에 의지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남부에 모처럼 희망이 보이니 그렇게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황후 폐하께서 드십니다.”
“…….”
귀족 회의장으로 들어서던 황후의 걸음이 멈칫했다.
이런 자리에서 보기 드문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리페리우스 공작?’
그는 무심한 얼굴로 에슬린 옆에 서 있었다.
그 묵직한 존재감 때문인지 회의장의 분위기가 묘한 긴장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굳이 참석할 이유가 있는가?’
전쟁과 관련한 일이 아니라면 이런 일들에선 한 발짝 물러서 있는 남자였다.
황후는 테베트의 의도를 짐작해 보며 자리에 앉았다.
회의장 문이 닫히기가 무섭게, 에슬린이 앞으로 나섰다.
“협상단이 필요합니다.”
그 말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맞은편에 선 카르단이 입술을 구겼다.
에슬린을 보는 귀족들의 시선은 다양했다.
호기심, 적대감, 꺼림칙함, 신기함, 일부의 반가움…… 하지만 에슬린은 그 시선들을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
“협상단?”
황후가 되물었다.
“네. 남부에서 소식이 왔다고 들었습니다. 치료약에 크세로이츠의 광물이 필요하다고요.”
“그래. 하지만 대체할 만한 약재가 있을지도 모른다.”
에슬린은 고개를 저었다. 그건 이미 자신이 찾아본 것이었다. 그런 건 없다.
“당장 찾기는 어려울 겁니다. 새로운 협상을 하는 게 더 빠를 거예요.”
황후는 생각에 잠겼다.
“너무 서두르시는 것 아니십니까?”
냉정하게 파고드는 목소리는 프레이 백작의 것이었다.
에슬린은 그제야 백작에게 시선을 주었다.
문득 언제나 그 주변을 따르던 린든 백작 같은 몇몇 인물들이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처음이라 모르시겠지만, 협상단을 꾸리는 건 간단한 일이 아닙니다.”
프레이 백작이 싸늘하게 덧붙였다.
“하물며 정체도 모르는 이국인들이 아닙니까. 이쪽에서 제시할 것도 고려해야 하고……”
“모르는 건 백작이겠지.”
에슬린이 코웃음 쳤다.
“우리 남부를 위한 치료법을 내 연구서로 얻어 냈다는 걸, 설마 잊은 건 아니겠지?”
프레이 백작의 입꼬리가 꿈틀 움직였다.
영악하긴.
남부 일에 대한 주도권이 지금 누구에게 있는지 한 번 더 주지시킨 것이다.
잠자코 있던 황후가 입을 열었다.
“하지만 프레이 백작 말도 틀리진 않는다. 협상단은 하루아침에 준비되는 게 아니야. 우리가 뭘 내걸어야 할지도 고민해 봐야 해.”
그건 이미 에슬린이 끝마친 고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