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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36화 (136/147)

136화

“마법입니다, 폐하.”

에슬린은 더 이상 황후를 모후라고 부르지 않았다.

“마법?”

주변에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제 연구서의 핵심은 기후 마법입니다. 크세로이츠는 베르타니아만큼 마법이 발달하지 않았어요.”

에슬린은 황후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러니 그들 또한 제 연구서를 구현하는 데 어려움이 따를 겁니다.”

“마법 기술을 제공하고 약재를 얻어 와라?”

에슬린은 조용히 웃었다.

“그것뿐이겠습니까?”

모리어스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의 시선이 모여들었다.

“크세로이츠는 다양한 의학 기술을 가진 나라입니다. 마법이 드문 곳이니만큼, 마법을 대체하는 학문이 발달한 거겠죠.”

그 위대한 베르타니아의 마법조차 완벽하게 병을 고치진 못한다. 이번 남부 열병이 바로 그 예였다.

“베르타니아의 마법과 크세로이츠의 의학을 교환하십시오. 크세로이츠와 교역 길을 열어 주세요.”

에슬린은 명료하게 말했다.

이건 그녀가 처음 겨울 포도를 재배했을 때부터 줄곧 품고 있던 생각이었다.

“이번 협상은 그 시작이 되어야 합니다.”

귀족들이 크게 웅성거렸다.

그건 과거 황제의 치세에선 없던 화두였다.

황제는 의욕적인 인물이었지만, 그 의욕도 슐든 대륙에 한해서였을 뿐이었다.

그는 세상에 유일무이한 지배자이고 싶어 했다.

혈육의 피를 뒤집어쓰고 어렵게 거머쥔 황좌였다.

그 황좌가 더 넓은 세상에선 아주 작은 점처럼 보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그는 본능적으로 눈치채고 꺼렸는지도 몰랐다.

프레이 백작은 거칠게 혀를 찼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야만인들과 무슨 교류를……”

“좋은 생각이신 것 같습니다.”

갑자기 나선 건 카르단 쪽에 서 있던 칼리다 백작이었다.

카르단이 무슨 개소리냐는 듯 백작을 바라보았다.

“새로운 교역 길이 열리면 새로운 예술도 들어오겠죠. 다양성이 생길 겁니다. 이쪽에서 팔 수 있는 것들도 많을 거고…….”

칼리다 백작이 턱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그는 예술품을 모으는 것을 물론 좋아하지만, 그것들에 값을 매기는 걸 가장 좋아했다.

물론 황제가 있었다면 하지 못했을 말이었다.

“백작!”

카르단이 거칠게 소리치자 칼리다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칼리다 백작의 말로 인해 귀족들 사이에 묘한 분위기가 일었다. 다들 각자의 계산을 따져 보기 시작한 것이다.

분위기가 움직였다.

프레이 백작이 이를 악물었다.

탁! 프레이 백작의 지팡이 소리가 매섭게 울려 퍼졌다.

흐름이 뚝 끊겼다.

“다들 순진하십니다.”

냉랭한 목소리에 시선이 모여들었다.

“교역 길을 열면 그렇게 곱고 좋은 것들만 오갈 거라고 생각하십니까?”

“…….”

침묵이 흘렀다.

“무기, 질병, 범죄 같은 것들도 쉽게 오갈 겁니다. 그들이 꽃만 들고 오리란 보장이 어디 있습니까?”

프레이 백작은 날카로운 눈으로 에슬린을 응시했다.

“그 손에 칼을 쥐고 오면 그야말로 새로운 전쟁입니다.”

전쟁이란 말에 누군가 숨을 집어삼켰다.

가뜩이나 마물들이 호시탐탐 노리는 땅이었다. 여기서 더 침략자를 늘릴 수는 없는 노릇이다.

“백작 말이 맞아.”

에슬린이 대꾸했다.

“하지만 불지 안 불지 모르는 눈보라가 무섭다고, 계속 이불 안에 웅크리고 있을 수만은 없어.”

영원히 이 상자 같은 대륙에 갇혀 있을 수는 없었다.

고여 있는 물은 썩기 마련이고, 썩은 물은 말라 사라질 뿐이다.

‘게다가…….’

크세로이츠는 이미 움직이기 시작했다. 12황자가 온 게 그 증거다.

프레이 백작은 입술을 다물었다. 에슬린은 다시 황후를 보았다.

“한꺼번에 모든 걸 교류하자는 게 아닙니다. 이번 협상단을 시작으로 횟수를 천천히 늘려 가십시오. 평화 협정과 함께 말입니다.”

황후는 길게 감았던 눈을 떴다.

무표정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에슬린의 얼굴이 보였다.

다음 세대에 새로운 영광을.

갑자기 그 인사말이 떠오른 건 왜였을까.

에슬린이 찾고자 하는 것은 과연 무엇일까.

“책임질 수 있겠느냐?”

황후가 물었다. 에슬린의 입꼬리가 부드럽게 올라갔다.

“물론입니다.”

“폐하, 더 신중하게 고려하셔야 합니다.”

프레이 백작이 즉시 반발했다.

황후는 그를 바라보며 잠시 고민했다.

“하지만 지금 남부에 추가 지원이 필요한 건 맞네. 당장 교역선을 띄우겠다는 말이 아니야.”

“…….”

프레이 백작은 입을 다물었다.

주변 귀족들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 이상 반대하는 건 오히려 반발을 살 뿐일 것이다.

“남부에 네가 직접 갈 것이냐?”

황후가 에슬린에게 묻자, 에슬린은 잠깐 멈칫했다.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내내 석상처럼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돌려 에슬린을 뚫어져라 응시하고 있었다.

그를 의식하며 에슬린은 대답했다.

“아뇨.”

테베트는 오직 그 한마디를 직접 듣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었다.

에슬린은 한숨을 삼켰다.

“모리어스 후작이 갈 것입니다.”

* * *

회의가 끝나고 에슬린은 모리어스 후작과 더 이야기를 나누었다.

테베트는 황후와 보급 문제로 독대 중이었다.

“그럼 조선공과 항해사들을 더 알아보겠습니다.”

모리어스 후작이 말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광물을 대량으로 가져오려면 지금과는 다른 규모의 선박을 움직여야 했다. 근해에서 어업 하는 어선으로는 안 됐다.

뛰어난 조선공과 항해사 등이 필요했으나 마땅한 인물이 없었다.

“그래요. 초반에야 크세로이츠 선박을 이용할 수 있겠지만 한계가 있겠죠.”

차라리 크세로이츠에서 전문가를 구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모리어스 후작 또한 동의한다는 표정이었다.

“그럼, 먼저 가 보겠습니다.”

바빠진 후작이 서둘러 마차를 타고 떠났다.

에슬린 또한 제 마차로 걸어갔다.

“에슬린!”

휙 어깨가 돌아갔다.

잔뜩 찡그리며 돌아보자 카르단이 씩씩대며 서 있었다.

당장이라도 달려들려는 호위 기사들을 막으며, 에슬린은 가볍게 어깨를 털었다.

“왜.”

이글이글 타오르는 눈동자는 딱히 할 말이 있어서 부른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할 말 없으면 갈게.”

카르단이 재차 가까이 다가왔다.

“내 마법사가 성배를 손에 넣었어.”

그가 음산하게 말했다.

카르단은 덩치가 큰 편에 속했는데, 그 때문인지 짙게 그림자가 져 위협적으로 느껴졌다.

“그래서?”

“결국 네가 질 텐데. 이기지도 못할 싸움에 이 악물고 덤비는 이유가 뭐야?”

웃음조차 나오지 않는 질문이었다. 그는 이제 에슬린에게 흑마법사의 존재를 숨길 생각도 없어 보였다.

“그 말 그대로 돌려줄게.”

“아무리 너라도 내 마법사를 이길 수는 없어. 네 측근들도 모두 그 제물로……”

“카르단.”

에슬린은 진심으로 그가 가여워졌다.

“네가 흑마법에 손댔다는 걸 내가 밝히지 않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

“뭐?”

마땅한 증거가 없어서겠지!

카르단은 그렇게 소리치려 했으나 입을 열기도 전에 저지당했다.

“흑마법이 수면 위로 올라오면, 그걸 모방하고 싶어 하는 사람이 생길까 봐서야.”

황자의 입매가 보기 좋게 꿈틀거렸다.

“그걸로 널 시궁창에 처박는 건 쉽지만…… 난 다음을 생각해야 하거든.”

에슬린은 피식 웃었다. 그 모습에 카르단의 숨이 점점 더 거칠어졌다.

“물론 금기에 손댄 마지막이 좋을 거라고는 기대하지 마.”

“감히!”

카르단이 번쩍 손을 치켜들었다. 에슬린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이런 뻥 뚫린 곳에서 저를 때리기라도 한다면 그거야말로 스스로 목을 조르는 격이었다. 에슬린에게 좋은 빌미를 주는 셈이다.

그걸 아는지 카르단도 몸을 부들거릴 뿐, 내려치진 못했다.

“망설이긴.”

“이……!”

가볍게 비웃자 카르단이 발끈했다.

그때 누군가의 팔이 불쑥 나타났다.

남자의 입에서 하얀 숨이 터졌다.

잔뜩 흐트러진 흑발. 놀란 듯 잔뜩 벌어진 눈동자.

“리페리우스 공작?”

카르단이 붙들린 손을 움찔 떨었다.

테베트는 다급하게 에슬린을 훑었다. 그의 호흡이 들쑥날쑥했다.

“카르단 전하.”

살 떨리게 낮은 저음이었다.

그의 팔에 힘이 들어가자 심상치 않은 소리가 났다.

“으윽……!”

“그때 턱은 괜찮으셨습니까?”

카르단이 주변을 향해 버둥거렸다.

그 모습을 잠시 싸늘하게 훑던 테베트는 거칠게 손을 놓았다.

“……빌어먹을!”

카르단은 욕을 지껄이며 애꿎은 수풀을 걷어찼다.

“카르단 전하.”

프레이 백작이 나타났다. 그는 예리한 눈으로 빠르게 상황을 파악했다.

“가시죠. 할 일이 많으시지 않습니까.”

“쯧!”

카르단이 성질을 부리며 제 마차로 걸어갔다.

테베트는 바로 뒤를 돌아 에슬린을 확인했다.

“다친 곳은요.”

“전 괜찮아요.”

에슬린은 태연한 얼굴이었다. 꼼꼼히 살펴도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괜찮다는 말이 거짓은 아닌 듯했다.

“…….”

안심하니, 어쩐지 힘이 빠졌다.

테베트는 에슬린을 등지고 뚜벅뚜벅 걸어가 마차 문을 열었다.

“……데려다 드리겠습니다.”

나지막한 말투에 에슬린이 몸을 움직여 마차에 올라탔다.

테베트는 그 맞은편에 자리했다.

‘맞은편?’

에슬린은 조금 의아했다. 곧 죽어도 제 옆자리를 사수하던 남자였다.

부드럽게 굴러가는 마차 안에서 에슬린은 테베트를 바라보았다.

그는 시선도 맞추지 않은 채 바깥을 응시하고 있었다. 주변 공기가 어쩐지 날이 서 있었다.

카르단 때문이 아닌 건가.

에슬린의 눈매가 설핏 구겨졌다.

“전하께 제가 모르는 다른 힘이라도 있습니까?”

잠자코 있던 남자에게서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무슨 소리예요?”

“호위들을 왜 물리셨습니까?”

“…….”

그는 그제야 눈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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