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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37화 (137/147)

137화

검은 동공 아래에서 다 숨기지 못한 분노가 일렁였다.

“설마 일부러 카르단 황자를 도발한 건 아니시겠죠, 전하.”

허벅지에 올라간 그의 손이 단단하게 쥐어져 있었다.

“그래야 할 겁니다.”

에슬린은 테베트를 보며 입을 열었다.

“……호위들을 물린 건 대화를 듣게 하고 싶지 않아서였어요.”

“…….”

“카르단을 일부러 도발한 게 아니라고는 말 못 하겠지만, 흑마법에 관해 경고하고 싶었던 것뿐이에요.”

말을 마치고 에슬린은 테베트의 얼굴을 꼼꼼히 살폈다.

“……화났군요, 저한테.”

하아, 그의 입에서 긴 한숨이 흘러나왔다.

테베트는 에슬린을 잠시 노려보더니 몹시 복잡한 얼굴로 제 머리카락을 흩트렸다.

“제가 감히 어떻게…….”

그는 에슬린의 손을 가져와 쥐었다. 답지 않게 긴장했는지, 손바닥이 조금 축축했다.

그 모습을 보자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에시.”

테베트가 한숨처럼 그녀를 불렀다.

“솔직히 카르단이 당신을 해치는 줄 알고 놀랐습니다.”

“보는 눈이 있는데 카르단도 그렇게까지 어리석진 않아요.”

테베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알아요.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습니다.”

카르단을 보는 에슬린의 표정은 겁에 질려 있지 않았다.

때린다면, 기꺼이 맞아 주겠다는 것처럼 보였다. 그게 카르단에게 얼마나 큰 흠이 될지 아는 사람 같았다.

에슬린은 피하지 않을 것이다.

그 사실을 인지하자 피가 식었다. 몸이 움직인 건 순식간이었다.

“전 당신을 위해 출정하는 겁니다. 제가 하는 일들은 다 당신을 위한 거예요.”

“…….”

“당신을 잃으면 아무런 의미 없는 것들입니다.”

그녀는 자기 파괴적인 선택을 아무렇지 않게 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녀의 선택지에는 여전히 그녀 자신이 없었다.

짙은 패배감이 몰려왔다. 그건 무력감을 닮았다.

“자기 자신을 내던지지 말아요.”

테베트는 간절히 말했다.

“…….”

에슬린은 물끄러미 그를 응시했다.

예전이었으면 대수롭지 않게 넘겼을 말이 어쩐지 화살처럼 와 박혔다.

고통과 자괴감에 물든 그의 표정 때문일까. 패잔병 같은 모습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무모했나.

비로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적어도 호위들을 물려서는 안 됐다.

“……알겠어요.”

에슬린이 작게 대답했다.

그러자 테베트가 길게 숨을 내뱉었다.

“빈정거려서 미안합니다.”

“저도 잘한 건 없으니…….”

그는 에슬린 옆에 자리를 잡고 그 손에 짧게 키스했다.

“잘못한 건 카르단인데 당신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어요. 제가 잠깐 미쳤나 봅니다.”

테베트는 평소와 다름없는 다정한 얼굴로 돌아와 있었다. 그가 에슬린의 머리를 부드럽게 쓸었다.

“카르단을 어떻게 굽든 삶든 상관없지만, 당신이 위험해지는 방법은 안 됩니다.”

에슬린은 고개를 끄덕였다.

창밖으로 익숙한 풍경이 빠르게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그곳에 의미 없는 시선을 던지며 에슬린은 살짝 미간을 좁혔다.

왜일까.

아주 문득, 정말 뜬금없이.

저를 버렸다고 말하던 로하르트의 얼굴이 떠올라 버린 건.

* * *

모리어스 후작이 남부 지원단으로 떠날 준비를 하기 시작했다.

그 또한 미리 준비해 두기라도 한 것처럼 막힘없이 진행되었다.

덕분에 후작은 예정되어 있던 일정보다 훨씬 빠르게 남부로 출발했다.

그와 동시에 새로운 치료약이 기대 이상의 효능을 보인다는 소식이 날아들었다.

어두웠던 남부에 드디어 희망이 보이기 시작했다며 사람들이 기뻐했다.

“에슬린 걔한테 동조하는 귀족들이 많아졌어.”

카르단이 짜증스럽게 쿠션을 퍽 내던졌다.

프레이 백작은 반듯하게 앉아 찻잔을 기울였다.

“왜 가만히 있는 거지? 방법을 생각해, 백작.”

“조급하게 구실 것 없습니다.”

남부에 해결책을 제시했으니, 에슬린의 평판이 잠시 좋아지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연구서를 들고 등장했을 때부터 황녀는 이럴 작정이었을 것이다.

분하지만, 프레이 백작은 그 공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솔직히 남부 문제는 그로서도 골칫덩이였다.

카르단이 다 식은 찻물을 벌컥 들이켰다.

“조급하게 굴지 말라니?”

“평판이 좀 좋아지면 어떻습니까?”

백작은 단조롭게 말했다.

“결국 성배를 쥐지 못한다면 모든 게 다 끝입니다.”

달그락. 찻잔이 내려앉는 소리가 카르단의 응접실을 울렸다.

“성배는 어떻게 되어 가고 있습니까?”

프레이 백작이 눈을 들어 카르단을 훑어보았다.

“문제없다고 계속 말했잖아.”

“남부로 보낸 자에게선 아직 별다른 소식이 없습니까?”

카르단은 타툴란의 인형을 떠올렸다.

“그래. 하지만 포털은 예정에 맞춰 열릴 거야.”

프레이 백작은 종이 쪼가리를 잘게 찢는 카르단을 날카롭게 응시했다.

“아, 걱정하지 말라니까! 정말 확실하다고.”

카르단은 성배에 대해서만큼은 자신 있어 했다.

프레이 백작은 대체로 카르단을 믿지 않았지만, 카르단의 검은 손만큼은 신뢰했다.

시궁창에 손 담그는 걸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는 남자였다.

‘그래, 그 쓸모쯤은 있어야지.’

그는 냉랭히 생각했다. 물론 카르단의 말만 믿고 있지는 않을 것이었다.

“당연히 전하를 믿습니다.”

카르단이 흥, 하고 입술을 비틀었다.

“하지만 대비는 철저하게 해 두셔야죠.”

“대비?”

“그렇게 엉성하시니, 다 죽인 줄 알았던 황녀가 살아 돌아온 것 아닙니까.”

“…….”

카르단은 거칠게 혀를 찼다. 그에 대해선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때마침 좋은 기회입니다. 이번에야말로 제대로 처리하십시오.”

“뭘?”

“황녀의 측근들 말입니다.”

프레이 백작이 냉랭하게 덧붙였다.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곳이 전장이죠.”

“그 말은…….”

카르단이 입술을 뻐끔거렸다.

“전장에서 죽이라는 건가?”

“예.”

그쪽 장남이 출정하지 않나? 카르단은 그렇게 말하려다 입을 다물었다.

그 사실을 프레이 백작이 모를 리 없었다.

“남부에서 모두? 에르단도?”

“테베트 리페리우스까지입니다.”

카르단은 움찔 몸을 떨었다.

“하, 하지만…… 그럼 다음 마물 전쟁부터는.”

“당분간은 크세로이츠인들을 데려와 전쟁 노예로 부리면 됩니다.”

“…….”

카르단이 눈을 깜빡였다.

“리페리우스는 제국을 수호하기 위해 강인한 육체를 타고나지만…… 이번 가주는 글렀습니다. 이미 제빛을 잃었죠.”

기운 천칭은 필요 없다.

고장 나고 쓸모없어진 것은 가차 없이 버려야 한다.

“리페리우스가 죽으면 크세로이츠에 밀항선을 띄워 노예를 데려오십시오. 젝스 에티우드 같은 자들로.”

프레이 백작이 비릿하게 웃으며 덧붙였다.

“포악함 하나만큼은 그야말로 마물과 견주어도 손색없는 작자들이지 않습니까.”

“하지만 그들이 치료법을…….”

카르단은 말을 하다 멈추었다.

‘그들이 치료법을 내준 게 무슨 상관이라고.’

순진한 생각이라고 프레이 백작에게 비웃음만 살 것이다.

“좋아. 그럼 어떻게 처리할 건데?”

그가 가슴을 부풀리며 물었다.

“리페리우스 공작의 본대가 출발하면, 추가 보급을 이유로 후발대를 보내십시오.”

“흐음. 과연.”

“물론 그 부대의 진짜 목적은 암살이어야 할 겁니다.”

프레이 백작은 평연한 어조로 말했다.

아무리 테베트여도 일개 보급 부대 하나까지 다 신경 쓰진 못할 것이었다. 사람을 심는다면 테베트의 눈이 멀어지는 후발대가 적합했다.

카르단은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외부에서 용병을 준비해 두십시오.”

“용병이라…….”

카르단은 잠시 생각하다 입꼬리를 끌어 올렸다.

타툴란의 인형들이 떠올랐다.

“마침 적당한 인물이 있지.”

인형을 중심으로 제가 아는 몇몇 암살자들을 더 섞는다면 훌륭한 암살 부대가 될 것이다.

아무리 강한 공작이라 한들 어차피 인간이다.

피와 살점이 튀는 그 아수라장에서 흑마법의 기습까지 어떻게 막아 내겠는가?

프레이 백작은 몸을 일으켰다.

“황녀 쪽엔 성배를 건넬 사람도, 받을 사람도 없어야 할 겁니다.”

한쪽 벽에 세워 둔 지팡이를 들고 백작이 응접실을 가로질렀다.

그 뒷모습을 보던 카르단이 입술을 말아 올렸다.

“그거 참 좋은 말이군.”

탁, 문이 닫혔다.

밖으로 나온 프레이 백작은 천천히 복도를 걸었다.

‘모든 게 실패했을 때도 대비해야 한다.’

그는 냉철한 얼굴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날, 린든 백작을 비롯한 비밀 서재에 있던 귀족들은 모두 충성을 서약했다.

제 기사와 병사들을 백작령으로 보내온 게 그 증거였다.

사람을 충성하게 만드는 건 공포였다.

그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실패하지 않으리라.

그의 눈이 매섭게 빛났다.

* * *

“됐지? 이제 좀 알아서들 해.”

디에리안 프레이는 거칠게 손을 툭툭 털었다.

“디에리안 님!”

신전 마법사들은 애달프게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늘어졌다.

복잡한 마법 수식을 단숨에 정리해 진으로 완성하는 솜씨가 그야말로 구세주 같았다.

“좀 놔 봐. 여기 더 있다간 마력이 아니라 수명이 깎일 것 같으니까.”

그는 싸늘하게 말하곤 옷을 잡아당겼다.

옆구리에 마법 책을 끼고, 귀찮게 들러붙는 놈들을 발로 차며 신전을 나왔다.

지친 마법사가 향하는 곳이라곤 오직 한군데였다.

저 멀리 황녀궁 끄트머리가 보이자 냉랭하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목적지가 보이자 걸음이 더욱 빨라졌다. 아래로 내려 묶은 진녹색 머리카락이 바쁘게 흔들렸다.

“…….”

“…….”

막힘없던 걸음이 딱 멈추었다.

디에리안의 눈동자가 싸늘하게 가라앉았다.

기다랗고 날렵한 눈매는 인정하긴 싫지만 저와 닮았다. 깔끔하게 올려 넘긴 머리카락 색은 또 어떤가?

디에리안은 눈앞에 선 프레이 백작을 무심한 눈으로 훑었다.

그러길 잠시, 그는 미련 없이 다시 걸음을 옮겼다.

나이 든 백작의 옆을 젊은 마법사가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누가 널 도왔지?”

낮은 목소리에 다시 걸음이 멈추었다.

디에리안은 몸을 돌렸다.

“누구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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