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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38화 (138/147)

138화

프레이 백작은 눈썹 하나 까닥하지 않았다.

“가문을 배신했으면 조용히 살 것이지.”

디에리안은 싸늘하게 웃으며 발을 옮겼다. 더 들을 가치도 없는 말이었다.

“빌어먹을 사술로 황녀 따위를 살……”

쾅! 근처 담벼락이 사정없이 무너져 내렸다.

디에리안은 푸르게 일렁이는 마력을 숨길 생각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십니까! 저 멀리 경비병이 달려왔다.

“한 번 더 제 주인을 모욕하면 이번엔 백작께서 이렇게 되실 겁니다.”

그는 냉소하듯 말했다.

더 보지 않고 등을 돌렸다. 기분이 더러웠다.

괜한 놈을 만나 에슬린을 욕보인 것 같았다.

“표정이 왜 그래?”

집무실 문을 열자마자 에슬린이 물었다.

디에리안은 제 얼굴을 더듬었다.

“제 표정이 왜요?”

“원수라도 만나고 온 것 같은데.”

하여튼 눈치는 귀신같다.

“뭐 대충은 맞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갑자기 무슨?”

“사고를 좀 쳤거든요. 황궁 기물을 파손했어요.”

“응?”

에슬린은 미간을 살짝 찌푸렸으나 더 묻지는 않았다.

“이따 가서 고쳐 놓을 테니 지금은 내쫓지 마십시오.”

디에리안은 대충 얼버무리고 벽난로 근처 소파에 가 앉았다.

심신의 안정을 찾기 위해 마법 책을 펼쳐 들었다. 옆 시야로 에슬린의 모습이 어른거렸다.

그는 이 시간을 진심으로 좋아했다.

그리운 곳을 집이라고 한다면 디에리안에겐 이곳이 집이었다.

그는 마침내 편안했다. 자기도 모르게 날 서 있던 신경이 누그러들었다.

“역시 전 황궁에 있어야겠습니다.”

디에리안이 뜬금없이 말했다.

책에 박혀 있던 시선은 어느새 벽 언저리에 가 있었다.

“갑자기 또 뭔 소리야?”

“그 작자가 있는 황궁에 전하를 두고 어떻게…….”

출정하겠냐는 말은 차마 나오지 않았다.

어차피 에슬린은 허락하지 않을 테고, 백작의 얼굴은 생각만 해도 이가 갈렸기 때문이었다.

에슬린은 그런 디에리안의 옆모습을 응시했다.

아까부터 이상하더라니.

그제야 그가 누굴 마주치고 왔는지 이해했다.

“디엘.”

에슬린이 가볍게 웃으며 보던 책을 덮었다.

희뿌연 책 먼지가 날렸다.

“프레이 백작을 만났어?”

백작이 언급되자 디에리안은 지저분한 저주라도 들은 사람처럼 얼굴을 찡그렸다.

“제게 유일한 단점이 있다면, 그건 이름에 프레이가 묻은 걸 겁니다.”

그가 다가와 신경질적으로 책장의 먼지를 털기 시작했다.

분풀이 같은 동작이었다.

에슬린은 그 모습을 흘끔 보았다.

필요한 책 몇 권을 더 뽑아 책상에 올려 두었다.

창문을 여니 차갑고 상쾌한 공기가 밀려들어 왔다.

“좋아. 약속할게.”

에슬린은 창가에 기대섰다.

“뭘요?”

먼지와 격렬히 투쟁 중이던 디에리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내가 카르단에게 승리하면 너에게 새로운 이름을 주기로.”

“…….”

툭. 그가 먼지떨이를 떨어뜨렸다.

표정만큼은 늘 그렇듯 변화가 없었으나 그 눈빛에 덧입혀진 격랑을 에슬린은 읽었다.

“……이름을요?”

“네 유일한 단점이라며.”

에슬린은 가볍게 웃었다.

“날 위해 전쟁까지 나가는데, 그 정도는 해 줘야지.”

디에리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아주 어릴 때부터 제게 엄청난 마력이 있음을 알았다.

서재에 몰래 숨어 읽는 마법 책이 좋았고, 그것을 연구하고 구현하는 게 즐거웠다.

하지만 프레이 백작은 예외를 인정하지 않는 아버지였다.

백작은 가문을 떠나 마법사가 되겠다는 디에리안의 모든 책을 불태우고, 그를 방에 가두었다.

물 한 모금 마음대로 허락되지 않는 프레이 백작만의 혹독한 교육이 시작되었다.

반항하면 벌로 차디찬 지하실로 쫓겨났다.

어린 디에리안은 차가운 지하실에 누워 허공에 마법진을 그렸다. 숨 막히는 저택보다 차라리 이곳이 더 낫다고 생각했다.

정체를 숨긴 마법사 켈라가 백작저 하녀장으로 오기 전까지, 디에리안은 제대로 웃어 본 기억이 없었다.

“괜찮은 성을 생각해 놔. 마법사 가문에 알맞은.”

그 한마디에 생각이 뚝 멈추었다.

환기가 끝난 방은 새로운 도화지처럼 깨끗한 공기로 가득했다.

디에리안은 무뚝뚝한 얼굴로 바닥에 떨어진 먼지떨이를 집어 들었다.

“……제 장점에 대해 아십니까?”

먼지떨이를 만지작거리며 그가 뜬금없이 중얼거렸다. 쉬이 감정을 읽을 수 없는 복잡한 얼굴이었다.

“뭔데? 마법?”

디에리안은 에슬린을 응시했다.

구원의 동아줄처럼 내밀어지던 작고 하얀 손.

백작령에서 처음 만났을 때, 함께 가자며 손을 내밀던 에슬린의 얼굴이 딱 지금 같았다.

그 손을 잡으며 그는 다짐했었다.

이 손이 원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 됐든 반드시 이루게 하리라고.

마법사는 씩 웃었다.

비웃음도 냉소도 아닌 미소는 그에겐 드문 것이었다.

“줄을 꽤 잘 탄다는 겁니다.”

탯줄은 실패했지만.

그러자 에슬린이 맑은 종처럼 웃음을 터뜨렸다.

* * *

테베트는 오랜만에 거리를 걷고 있었다.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날들이었지만, 그것도 거의 마무리가 되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중요한 일 중 하나를 해결할 생각이었다.

남자의 걸음이 허름한 주점 앞에서 멈추었다.

“꼭 저 같은 곳만 골랐군.”

한낮에도 햇볕이 들지 않는 음지에 있는 이곳은 유달리 스산하고, 그래서인지 더 초라해 보였다.

단단한 손이 거침없이 문을 열어젖혔다.

“누구…… 헉!”

낮부터 술병을 홀짝이던 남자가 소스라치게 놀라며 일어섰다.

우당탕탕!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바닥에 고꾸라졌다.

“고, 고, 공…….”

“안쪽인가 보군.”

무심한 눈으로 내부를 훑은 뒤 테베트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콧잔등에 상처가 있는 남자가 허둥지둥 쫓아왔다.

“아니, 이곳엔 왜……!”

그러거나 말거나 테베트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문을 홱 열어젖힐 뿐이었다.

종이를 뒤적거리던 남자가 고개를 들었다.

“웬 소란인가 했는데.”

밝은 레몬빛 머리카락을 가진 남자가 사르르 웃었다. 책상 위에 아무렇게나 올려 둔 다리를 내려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베트는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 아무 의자에나 가 앉았다.

제집을 누비는 듯한 당당함이 퍽 자연스러웠다.

“그만 나가 봐.”

로하르트가 부길드장에게 말했다.

“하지만 길드장님…….”

“네가 너무 벌벌 떨어서 나 지금 쪽팔리잖아.”

부길드장은 할 말이 아주 많은 눈치였으나, 로하르트의 눈빛을 받곤 그대로 물러났다.

밀폐된 공간에 무겁고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대차게 쳐들어온 사람치고 테베트는 조용했다. 내부를 관찰하듯 훑는 것 같기도 했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위대하신 리페리우스 공작님.”

가시를 숨긴 부드러운 목소리.

테베트는 그제야 로하르트를 돌아보았다.

“사흘이다.”

무슨 뜻이냐며 로하르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때까지 젝스 에티우드를 에시 옆에 데려다 놔.”

하, 이건 또 무슨 개소리지?

로하르트는 헛웃음을 흘렸다. 그렇지만 이해가 안 되는 말은 아니었다.

“그쪽 대신 에슬린 곁을 지킬 사람을 데려다 놔라?”

건방진 호칭이었지만 테베트는 개의치 않았다.

“눈치 하나는 쓸 만하군.”

젝스는 테베트가 그 실력만큼은 인정하는 기사였다.

제가 부재하는 동안 에슬린을 지키기에 부족함이 없으리라.

무엄한 생각을 품거나 쓸데없는 말을 지껄이지 않는 점도 나쁘지 않았다. 끊임없이 나불거리는 마법사나 징징대는 2황자에 비하면…….

“거절한다면?”

로하르트가 가볍게 말했다. 테베트는 그저 웃을 뿐이었다.

“듣자 하니 에시의 측근 노릇을 관둔 것 같던데.”

에시. 로하르트의 입꼬리가 꿈틀 경련했다.

“좋은 선택이야. 칭찬해 주고 싶군.”

“어처구니가 없군요. 그 소릴 하려고 여기까지 오신 겁니까? 바쁘신 공작 나리께서?”

“설마.”

테베트는 몸을 일으켰다. 책상에 기대선 로하르트에게 망설임 없이 다가섰다.

“본론은 그 밖에도 있지만, 일단 대답해.”

검은 장갑을 낀 손이 로하르트의 목을 거침없이 움켜쥐었다.

“젝스 에티우드를 데려다 놓겠다고.”

“…….”

“빨리 대답해. 이젠 죄책감 없이 꺾을 수 있으니까.”

유예를 주듯 그의 손힘은 느슨하게 풀린 상태였다. 하지만 언제든 마음만 먹는다면 이 숨통은 끊길 터다.

말뜻을 알아차린 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에슬린의 측근이 아니니, 이제 언제든지 죽일 수 있다는 말.

지금껏 어떻게 참았을까?

남자는 이 충동을 아주 오랫동안, 아주 깊은 곳에 봉인해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에슬린, 너 어떡해. 진짜 또라이는 내가 아니라 저 남자 같은데.

툭, 로하르트가 가뿐하게 테베트의 손을 밀어냈다.

“재촉하지 말아요. 잘난 얼굴이 그렇게 무서워서야. 에슬린이 또 도망가려면 어떡하려고?”

또, 라고 말하는 남자의 얼굴이 의미심장했다. 지금까지 에슬린의 행적을 아는 눈치였다.

하긴. 에슬린이 북부 공작저를 떠나며 가장 먼저 찾은 게 달그림자 길드인데.

길드장인 로하르트가 몰랐을 리 없다.

테베트는 입꼬리를 비틀었다. 검을 뽑고 싶어 손이 다 경련했다.

“말장난은 그만하고 대답해. 시간 없으니까.”

테베트가 결국 검에 손을 얹었다.

그 마음을 눈치채기라도 한 듯 로하르트가 눈을 접어 웃었다. 감정 하나 담기지 않은 웃음은 아름답기보다는 그저 기괴했다.

그가 항복하듯 양손을 들어 올렸다.

“진정해요. 그렇게 잡생각이 많아서야 어디 전쟁에 집중하시겠습니까? 흑마법사에게서 성배를 빼앗아 오셔야 할 텐데.”

테베트가 검을 뽑아 로하르트의 목에 겨누었다.

주륵, 붉은 피가 목깃을 적셨다.

“흑마법사가 나타날 거라는 건 어디서 들었지?”

“그거 모르면 정보상 관둬야지 않을까요?”

로하르트는 웃으며 고개를 기울였다. 검이 겨누어진 쪽이었다. 옷을 적시는 피의 양이 더 많아졌다.

이글이글 타오르는 붉은 눈동자가 꽤 볼만했다.

그러니 말할 생각은 없다.

얼마 전 만난 마법사에게 들었다는 사실은.

“그렇게 무서운 얼굴 하지 마세요. 어차피 이 정보는 팔 생각 없으니까.”

“잘됐군.”

그가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떠버리의 목을 비틀 이유가 생겼어.”

“응?”

로하르트는 얼빠진 얼굴로 눈동자를 굴렸다.

디에리안이 말해 준 거 어떻게 알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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