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9화
더럽게 감이 좋은 남자다.
“됐고, 젝스 에티우드를 데려다 놔.”
“거참 집요하시네.”
로하르트는 무언갈 계산해 보듯 턱을 기울였다. 살갗을 가르는 검날은 이미 안중에도 없어 보였다.
“뭐…….”
젝스는 어차피 에슬린에 의해 움직이고 있다.
“그러죠.”
그러니 이건 사실 제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굳이 말해 주지 않을 작정이다.
어디 한번 굴러 보라지.
테베트의 검이 거둬졌다. 그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 출입문을 향했다.
거침없이 나아가던 남자가 별안간 멈추어 섰다.
“뭐 잊은 거라도?”
“계속 말하고 싶었는데.”
테베트는 슬쩍 몸을 돌렸다.
“어리광 부리는 건 적당히 해.”
“어리광?”
“어리광 부리는 거 아닌가? 널 버렸다느니, 어쨌다느니 하는 핑계로.”
로하르트가 입을 다물었다.
목에 칼을 겨누어도 능글맞게 웃던 남자가 의외로 손쉽게 진짜 표정을 드러냈다.
테베트가 그 모습을 건조하게 훑었다.
“에시를 골치 아프게 한다면, 그거야말로 네 목을 자를 가장 좋은 핑계지.”
“별…….”
로하르트의 눈빛이 냉랭하게 가라앉았다.
“지금 그 앨 구했다고 거들먹대는 겁니까?”
“상황 파악이 덜 됐군.”
테베트는 음산하게 웃었다.
“원망할 상대가 틀렸다는 말이야.”
“무슨 소립니까?”
테베트는 다시 방을 가로질렀다. 출입문 쪽도, 로하르트 쪽도 아니었다.
“네 주인에게 독배를 먹인 사람은 나라고. 네가 원망해야 할 사람도 나고.”
“…….”
“그러니까 에슬린에게 같잖은 투정 부려서 관심 받을 생각은 그만둬.”
로하르트는 보기 좋게 할 말을 잃었다.
챙그랑! 장식장에 있던 브랜디 병이 바닥에 떨어져 산산조각 났다.
가만히 서 있던 로하르트에게서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흘렀다.
“아…… 그거 얼마짜린 줄 아십니까?”
절망에 절망이 덧씌워져 지금까지 본 표정 중 가장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테베트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허리를 숙여 알싸한 술에 뒤범벅된 귀걸이를 집어 들었다.
영롱하게 빛나는 연보라색 다이아몬드가 제 짝을 잃고 테베트의 손에 놓였다.
“대가를 받았으니 일해, 정보상.”
로하르트는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었다.
에슬린의 물건이 로하르트의 손에 있었던 건 고작 며칠이었을 뿐인데.
테베트는 그게 아주 값비싼 대가였다는 듯 지껄이고 있었다.
약속 장소인 중앙 분수대에 도착하자 익숙한 실루엣이 보였다.
분수대에 기대앉은 에슬린과 그녀를 지키듯 선 마법사.
그는 그제야 제 안에 검게 뭉쳐 있던 무언가가 탁 풀어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에슬린은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어두운색 로브를 입고 있었다.
대충 쓴 후드 아래로 하얀 옆얼굴이 드러났다.
허공을 응시하고 있는 특유의 무표정은 늘 그렇듯 무슨 생각을 하는 건지 쉽게 가늠할 수 없었다.
숨을 쉴 때마다 뽀얀 연기가 흩어졌다.
“…….”
그는 시야를 넓혀 숨겨진 호위 기사들의 기척을 살폈다.
하나, 셋, 일곱. 그들은 적당한 거리에서 그림자처럼 에슬린을 지키고 있었다.
주변까지 모두 살핀 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단숨에 다가가 추워서 동동거리는 마법사의 오금을 퍽 걷어찼다.
“악!”
털썩, 그가 흙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때마침 그 앞엔 에슬린이 있었다.
“갑자기 왜 그래요?”
놀란 에슬린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테베트는 어깨를 으쓱였다.
“당신에게 사죄할 일이 뭐든 있지 않겠습니까.”
“이 미친…….”
디에리안이 두 주먹을 부들부들 떨었다. 예상치 못한 공격에 아주 놀란 모양이었다.
“전하! 보십시오! 전 분명 살해당할 겁니다!”
곧바로 이르는 꼴이 같잖을 따름이다.
테베트는 혀를 차며 에슬린을 끌어당겼다.
슥, 손짓해 근처를 지키던 그림자 호위들을 모두 물렸다.
딱히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이놈의 충성심만큼은 진짜다.
그러니 로하르트에게 성배에 대한 사실을 털어놓았다면 그건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으리라.
물론 괘씸한 감정과는 별개다.
테베트가 에슬린의 후드를 정리해 주며 속삭였다.
“출정할 땐 저 입에 뭐라도 씌워 두는 게 좋겠습니다. 돌아올 때쯤이면 제 귀가 썩어 있을지도 몰라요.”
“하! 과연? 각하가 잠들었을 때 그 지랄 맞은 팔다리를 모두 묶어 버리는 건 누가 될 것 같습니까? 네?”
“봐요, 에시. 벌써부터 귀에서 피가 흐르는 것 같습니다.”
에슬린은 푹 한숨을 내쉬었다.
“제발 좀 사이좋게…….”
말하기 무섭게 날카로운 시선 두 개가 꽂혀 들었다.
에슬린은 그냥 입을 다무는 걸 택했다. 제 입만 아픈 일이다.
“됐고, 가죠.”
에슬린이 몸을 틀었다.
“어렵게 나온 거니까, 수확이 있어야 하지 않겠어요?”
그렇게 말하며 디에리안을 보자, 마법사는 분한 듯 입술을 떨었다.
“아까운 내 마력.”
투덜거리는 목소리는 명백히 테베트를 향한 것이었다.
아무리 단거리라도 순간 이동은 마력을 대량으로 소모한다.
마력 양 하나만큼은 타고난 디에리안조차 아주 필요하거나, 아주 기분 좋을 때 빼고는 잘 쓰지 않는 고위 마법이었다.
그걸 저 남자에게까지 써 줘야 한다니!
내장이 뒤틀리고 피가 거꾸로 도는 기분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저 남잘 골탕 먹이면 저는 기쁘지만, 에슬린이 기쁘지 않을 테니까.
“젠장…….”
아, 어쩌다 이런 가련한 처지가 되었을까?
디에리안은 코를 들이마시며 마법진을 그렸다.
세 사람은 눈 깜짝할 사이에 좁고 더러운 골목에 도착했다.
* * *
볼일을 끝마치고, 에슬린은 테베트와 단둘이 조금 걸었다.
디에리안은 볼일이 있다며 신전으로 급하게 돌아갔다.
이렇게 함께 거리를 걷는 건 실로 오랜만이었다.
“근데 어디 갔다 왔어요? 아침에.”
문득 생각났다는 듯 에슬린이 물었다.
“장인을 괴롭히러 다녀왔습니다.”
그녀의 미간이 조금 찌푸려졌다.
그가 말하는 장인이란 에슬린의 귀걸이를 만든 바로 그 장인이었다.
“그 귀걸이는 제가 로하르트에게 돌려받을 거라니까요.”
“그럴 필요 없습니다.”
테베트가 작은 상자를 내밀었다.
열어 보니 로하르트가 가져갔던 귀걸이가 들어 있었다.
“설마 로하르트를 만났어요?”
“정보상 주제에 분수에도 안 맞는 걸 갖고 있길래 말입니다.”
“…….”
“걱정하지 말아요. 깨끗이 닦고 소독도 해 왔으니.”
테베트가 부드럽게 눈매를 접었다.
그 모습을 보며 에슬린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정보 길드에 이걸 찾으러 갔다 왔어요?”
“그건 아닙니다.”
테베트가 에슬린을 돌려세웠다.
“그럼?”
“제가 떠나면…….”
그는 신중한 얼굴로 귀걸이를 에슬린의 귀에 걸었다.
뭉툭한 침조차도 행여 상처가 되진 않을까 몹시 조심스러운 손짓이었다.
“당신 곁을 지킬 사람이 필요하지 않습니까.”
“젝스 경이요?”
에슬린은 그가 정보 길드에 가 뭘 요구했는지 단번에 이해했다.
테베트가 예리한 시선을 에슬린에게 고정했다. 탐색하듯 눈매가 가늘어졌다.
“로하르트 젤킨스가 중간에서 수작질을 부려 돌아오지 못하는 건 줄 알았는데…….”
붉은 눈동자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쳤다.
“혹시 일부러 돌아오지 않는 겁니까?”
역시 눈치 하나는 귀신 같은 남자였다.
“일부러 돌아오지 않는 건 아니에요.”
젝스는 남부에 있었다.
그곳으로 보낸 게 로하르트일 테니, 그가 수작질 부린 게 맞긴 맞았다.
“호위 문제는 걱정하지 말아요. 젝스 경은 아마 돌아올 거고, 디에리안의 보호 마법도 있고…… 호위 기사도 저렇게 많잖아요.”
테베트는 제가 직접 고른 호위들을 떠올렸다.
에슬린의 말을 들어 보니 젝스 에티우드가 빠르게 돌아오기는 요원해 보였다.
‘정보상이 날 가지고 놀았군.’
괘씸하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가소롭게 느껴질 뿐이었다.
‘리페리우스 기사들을 더 심어야겠어.’
그는 굳게 다짐했다.
“이거 계속 가지고 다니길 잘했네요.”
에슬린이 품에서 다른 귀걸이 한쪽을 꺼냈다.
테베트는 남은 귀걸이를 직접 걸어 주었다. 제자리를 되찾은 연보라색을 보고 있자 비로소 기분이 좋아졌다.
“그나저나 미리 말해 줄 걸 그랬어요. 로하르트에게 괜한 걸음을 했겠군요.”
테베트는 웃으며 그녀의 귓불을 톡 두드렸다.
“상관없습니다. 목적은 하나가 아니었으니.”
이로써 에슬린이 귀걸이를 되찾겠답시고 끙끙대지 않아도 될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두 사람은 다시 길을 걸었다. 북적이는 인파에 섞여 걷다 보니 우습게도 평화롭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느덧 황궁 정문이 눈에 보였다.
짧다.
에슬린은 아쉬운 눈으로 지나온 길을 돌아보았다.
“각하.”
그때 황궁 문을 서성이던 기사가 다가왔다.
에슬린은 그를 알았다. 리페리우스 공작저에 있을 때 몇 번 마주친 적 있던 테베트의 기사였다.
“무슨 일이지?”
“신전에서 연락이 왔습니다.”
테베트가 눈썹을 구겼다.
“포털 출현이 앞당겨질 것 같다고 합니다.”
에슬린의 표정이 굳었다.
휙, 갑자기 불어온 돌풍에 후드가 벗겨졌으나 누구도 신경 쓰지 않았다.
“테베트 경.”
눈이 마주쳤다. 테베트는 그녀를 무겁게 응시했다.
“출정해야겠습니다.”
에슬린은 담담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한데 모아 묶은 머리카락 중 몇 가닥이 그녀의 흰 뺨에 흘러내려 있었다.
테베트는 그 뺨을 뇌에 새기듯 오래도록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