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40화 (140/147)

140화

베르타니아 마물 토벌군의 출정이 앞당겨졌다.

그건 총지휘관인 테베트 리페리우스의 아주 기습적인 결정이었는데, 황후는 별다른 말 없이 이를 승인했다.

모든 것은 잘 준비되어 있었기에 큰 무리는 따르지 않았다. 미처 다 챙기지 못한 보급품은 곧바로 후발대로 따를 예정이었다.

디에리안 프레이가 재빨리 이동용 마법진을 완성했다. 함께 출전하는 마법사들은 그야말로 기적을 경험했다.

규모가 규모이고, 거리가 거리인 만큼 수차례에 걸쳐 이동해야 했으나 디에리안 프레이가 그것을 10분의 1로 줄여 준 것이었다.

그렇게 출정 날 아침이 밝았다.

“독대할 일이 없었으면 좋겠다고 한 지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황후는 제 앞에 선 기사를 보며 무뚝뚝하게 말했다.

공식적인 인사는 진작 마쳤으니, 황후는 테베트가 저를 찾은 게 의외였다.

“무슨 일이지, 공작?”

그녀는 향료를 푼 물에 손을 담근 채였다. 하녀들이 달라붙어 그 손을 정성스레 주물렀다.

테베트는 그 모습을 무감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주변을 물려 주십시오.”

낮은 음성이 공기를 진동시켰다.

은빛 갑주를 입은 남자에게선 평소보다 더 큰 위압감이 느껴졌다.

“…….”

잠시 그를 응시하던 황후가 손을 털었다.

가볍게 눈짓하니 시녀가 하녀들을 데리고 빠르게 사라졌다.

“말해 보게.”

“전 곧 황궁을 비울 겁니다.”

테베트는 잠시의 지체도 없이 본론을 꺼냈다.

황후는 비단보에 손을 문지르며 그의 말을 들었다.

“그동안 에슬린을 지켜 주십시오.”

“지켜 달라?”

“그녀가 하는 일을 지지해 달라는 게 아닙니다.”

그의 어조는 늘 그렇듯 지독히 단조롭고 딱딱했다.

“제가 돌아올 때까지, 황녀의 안전을 보장해 주십시오.”

어쩐지 감추지 못한 초조함과 불안이 느껴졌다.

황후는 물끄러미 테베트를 응시했다.

“부탁드립니다.”

뻣뻣하고 오만하기 그지없던 남자의 고개가 거짓말처럼 쉽게 숙여졌다.

황후는 비단보를 내려놓았다.

“에슬린이 쉽게 당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나지막한 물음에 테베트가 고개를 들었다.

황후는 에슬린을 구하던 테베트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는 처절했다. 제 목숨이 경각에 놓인 사람조차 그토록 처절하진 않을 것이었다.

그땐 모두가 다급했으니 그럴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한데 왜 저 남자는 그때와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가?

“불안한 마음은 알겠지만, 공작.”

황후가 말했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테베트의 비틀린 감정을 눈치챘다.

에슬린은 제가 선택한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직도 과거에 얽매여 있는 이는 누구인가?

“믿고 놓아주는 연습도 필요한 법이야.”

“놓아주라니…….”

테베트가 싸늘하게 웃었다.

“왜 그런 끔찍한 말을 하시는 겁니까?”

“…….”

남자를 둘러싼 기운이 급속도로 얼어붙었다. 웬만해선 긴장하지 않는 황후조차 순간 목덜미가 선득해졌다.

“제 부탁을 들어주실지 말지, 그것만 답변해 주십시오.”

딱딱한 말투는 이미 마음을 걸어 닫은 자의 것이었다.

황후는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의 부탁이 아니어도 에슬린이 억울하게 죽도록 놔둘 생각은 없었다.

“……좋아. 자네 부탁은 알겠네.”

“감사합니다.”

형식적인 인사를 던진 남자가 미련 없이 방을 나갔다. 다시 이어진 황후의 짧은 한숨이 그를 배웅했다.

‘믿고 놓아주는 연습도 필요한 법이야.’

황후궁을 나서던 그는 냉소를 참지 못했다.

헛소리도 그런 헛소리가 없었다.

놓아주는 것도 쫓을 수 있다는 확신이 있어야 가능한 것이었다.

그는 목줄 걸린 짐승이나 다름없었다.

주인이 버리고 가 버리면 짐승은 날뛰다 미쳐 죽든지, 그리워하다 말라 죽을 뿐이다.

테베트는 그래서 그 말이 그저 우스웠다.

같은 시각, 에슬린은 새벽부터 부지런히 움직이고 있었다.

잠이 오지 않았다. 올 리가 없었다.

집무실에서 막 도착한 편지를 읽고, 황제궁에 가 황제의 상태를 살피고, 에르단 궁을 서성이다 결국 황족들의 말을 관리하는 마사까지 와 버렸다.

마구간지기가 놀란 얼굴로 뛰어나와 에슬린을 맞았다.

그를 물리고 구석에 있는 말을 향해 걸어갔다.

“오랜만이야.”

갈기를 쓰다듬자 말이 촉촉한 눈으로 에슬린을 훑었다.

갈기는 잘 정돈되어 있었으나, 예전만 한 윤기가 돌진 않았다.

‘죽은 황녀의 말이니…….’

황궁에서 쫓겨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이었다. 그래도 먹이는 걸 소홀히 하진 않았는지 상태가 나쁘지는 않았다.

한참을 쓰다듬고 서 있는데,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묵직하고도 정확한 걸음걸이.

검이 절그럭거리는 소리와 갑옷이 부딪치는 쇳소리가 동시에 들렸다.

에슬린은 이제 발소리만으로도 테베트를 눈치챌 수 있었다.

“당신이 말 앞에 서 있는 모습을 보면.”

남자에게선 비릿한 쇠 냄새가 났다. 피 냄새인지, 무기의 냄새인지는 애매했다.

“예전엔 좋았습니다.”

“예전엔?”

고개를 돌리자 테베트가 에슬린의 손을 말에게서 떼어 냈다.

“지금은 심장이 철렁하는군요.”

에슬린은 웃으며 손을 빼냈다.

다시 말을 쓰다듬자 말이 콧등을 비벼 왔다. 끔뻑끔뻑, 매끈한 눈동자가 에슬린을 열심히 훑어보았다.

테베트는 습관적으로 에슬린 주변 호위 기사의 기척을 읽었다.

에슬린은 다소 충동적으로 말했다.

“돌아오면 내게 활을 가르쳐 줄래요?”

그는 다시 에슬린을 내려다보았다.

웃는 낯이 시야 가득 찼다.

“흠.”

테베트가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가느다란 손가락에 잠시 시선이 갔다.

에슬린은 황족으로 승마를 배우며 기본적인 궁술도 함께 배웠지만, 솔직히 어디 써먹을 정도는 못 됐다.

유일하게 에르단보다 못하는 것이라 늘 분했다.

“싫어요?”

에슬린이 물었다.

“말을 타고 활을 든 당신이라.”

“…….”

“제 심장이 도무지 남아날 것 같진 않습니다만.”

살짝 눈매를 좁힌 그가 이내 미소 지었다. 자꾸 도망치려는 흰 손을 붙듦과 동시였다.

“기꺼이.”

손등에 입을 맞추자 에슬린은 더 이상 손을 물리지 않았다.

두 사람은 마구간을 나와 미로 정원을 걸었다.

에슬린은 승마복 차림이 아니었으므로, 테베트는 그녀가 다른 목적을 위해 외출했음을 알았다.

“어딜 다녀오는 길이죠?”

“부황을 뵙고 왔어요.”

황제의 숨은 매시간, 매초 꺼져 가고 있었다.

이제 그 목숨을 붙들고 있는 게 황제 자신인지 수십 명의 의원과 마법사들인지 알 수 없었다.

“그렇습니까.”

테베트가 대수롭지 않게 대꾸했다.

그는 고개를 돌려 에슬린을 응시했다.

“기분은?”

기다란 속눈썹이 느리게 움직였다.

“딱히……. 추억이 많진 않았거든요. 성인이 되고 난 이후부턴 매일 부딪치기도 했고.”

“그렇군요.”

황제는 제 결정을 사사건건 걸고넘어지는 에슬린을 그다지 달가워하지 않았다.

가장 의견이 많이 부딪친 건 이국과 관련한 일이었다.

“절 원망하시겠죠.”

그녀는 카르단의 황제 시해 미수 사건을 일부러 더 파헤치지 않았다.

흑마법으로 만든, 흔적이 남지 않는 독약이었다.

그걸로 카르단을 몰아세우려면 결국 수많은 증거들을 조작해야 했다.

그건 위험 부담이 큰 일이었다.

에슬린은 그보다 더 효율적인 방법으로 카르단을 무너뜨릴 수 있었다.

그러니 황제의 억울함은 이제 오롯이 그의 몫으로만 남게 될 것이다.

“부황께선 친형을 목을 직접 자르고 황위를 쟁취하셨어요.”

에슬린이 나지막하게 말했다.

“어릴 때 에르단의 손을 잡고 그 이야기를 들으면, 그 애의 손이 늘 시체처럼 차가워졌죠.”

“당신은?”

“전 화가 났고요.”

입꼬리가 차가운 곡선을 그렸다.

“부황의 눈빛이 마치…… 너희들도 그렇게 될 거라고 저주하는 것처럼 보였거든요.”

테베트는 대꾸하지 않고 에슬린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결국 제 혈육의 손에 죽게 된 황제.

에슬린의 얼굴은 그 마지막을 비웃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솔직히 에르단에겐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저와 맞서지 않아 줘서. 만약 에르단이 황위를 욕심냈다면 전 에르단을…….”

“…….”

천천히 이어지던 걸음이 멈추었다.

에슬린은 부드럽지만 냉혹한 얼굴로 테베트를 바라보았다.

“……죽이게 되었을지도 몰라요.”

한숨처럼 토해낸 말이었다.

과연 에르단이 자신과 맞섰다면, 에슬린은 어떻게 했을까?

친하게 따르던 형을 죽이고 황좌를 거머쥔 황제를, 과연 지금처럼 비웃을 수 있었을까……?

테베트는 바람에 휘날리는 연보랏빛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아뇨. 당신은 당신 아버지보다 더 나은 선택을 했을 겁니다.”

한 치의 의심도 없다는 듯한 말투였다.

에슬린은 몸을 돌려 그를 마주 보았다.

단단한 얼굴은 옅은 미소를 띤 채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지금까지도 당신은 모든 면에서 황제보다 낫고요.”

“…….”

그 다정한 속삭임에 우습게도 확신이 들었다.

저 한결같은 지지만 있다면, 에슬린은 제가 어떤 상황이든 극복해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테베트 경은요?”

에슬린은 충동적으로 물었다.

그 또한 가문의 피에 오래 얽매여 있던 남자였다.

“테베트 경도 더 나은 선택을 했나요?”

남자는 반듯하게 웃었다.

“물론입니다. 당신이 제 증거죠.”

따스한 손길이 뺨에 닿았다.

딱딱한 엄지로 여린 볼을 쓸며, 그가 눈을 맞췄다.

“그러니 에시, 약속을 지켜 줘요.”

“…….”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안전하게 있어 주기로.”

그건 테베트가 에슬린에게 하는 유일한 부탁이었다.

에슬린은 고개를 꺾어 저를 응시하는 남자를 보았다.

위를 보고 있는 건 에슬린인데, 이상하게 테베트가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것 같다는 착각이 들었다.

“제가 제 손으로 천칭을 부수는 순간을 당신이 목격해 주십시오.”

중립이던 리페리우스가 성배를 바치는 순간.

스스로 왕을 선택하는 오직 그 순간만을 테베트는 꿈꾸고 있었다.

“좋아요.”

에슬린이 고개를 끄덕였다. 기사는 그제야 안심한 얼굴로 매끄러운 이마에 입술을 눌렀다.

저 멀리 동이 트기 시작했다.

찬란한 태양 빛이 황궁 구석구석을 비추기 시작했을 때, 그곳에 남은 건 에슬린뿐이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