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41화 (141/147)

141화

에슬린은 방심했다고 생각했다.

쿠우웅.

기어코 에슬린의 라일락 정원 한가운데에 ‘그것’이 놓이자 그 생각은 더욱 강력해졌다.

방심했다.

테베트 리페리우스를 얕보았다.

“허…….”

“이건 정말…… 대단한데요.”

메리사가 넋 나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영차영차, 구슬땀을 흘리며 일하는 일꾼들의 얼굴이 아득한 신기루 같았다.

하지만 그들은 신기루도, 하물며 꿈도 아니었다.

“이렇게 아름다운 분수라니…….”

메리사가 순수하게 감탄했다.

에슬린은 입을 벌린 채 그저 눈만 깜빡이고 있을 뿐이었다.

곁에 선 하녀들이 흘끔흘끔 에슬린과 아름다운 분수를 번갈아 가며 보았다.

“어어! 그거 장식은 건드리면 안 돼! 조심들 좀 해!”

옆에 서 있던 메리사가 눈을 뾰족하게 세우고 달려 나갔다.

“너희들, 안 따라와?”

“예, 예!”

메리사의 서슬에 에슬린 뒤에 서 있던 하녀들이 잽싸게 움직였다.

그들은 하인과 일꾼들과 뒤섞여 여기저기 훈수를 두기 시작했다.

“…….”

그때까지도 에슬린은 아무런 말도 못 한 채 서 있었다.

제 정원 한가운데에 리페리우스의 보물 중 하나가 놓인 게,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에슬린은 이 사태의 주범을 떠올렸다.

“이건 뭐 따지지도 못하고…….”

허탈한 숨이 흘렀다.

사고를 친 당사자는 오늘 새벽 남부로 떠나 버렸다.

기사와 병사, 마법사, 의원, 짐꾼 같은 것들을 줄줄이 매달고…….

때 이른 출정이었다.

“하아.”

에슬린은 햇빛을 맞아 영롱하게 빛나는 분수대를 응시했다.

‘그 분수 나 줘요.’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는 게 아니었는데.

뒤늦게 후회가 들었다.

테베트의 실행력을 얕보았다. 더 강력하게 말했어야 했다.

그건 그냥, 진짜 그냥 해 본 소리였다고.

“휴우. 분수 놓으려다 정원 다 망가지는 줄 알았네. 쓸 만한 정원사들을 들이든가 해야지, 원.”

메리사가 손을 툭툭 털며 돌아왔다. 에슬린의 얼굴을 본 그녀가 눈썹을 치켜들었다.

“……뭐가 그렇게 즐거우신 거죠?”

“누가?”

“거울을 좀 보셔야겠는데요. 웃고 계시잖아요. 활짝.”

에슬린은 입매를 더듬었다.

“아.”

“보기만 해도 좋으신가 봐요?”

메리사가 놀리듯 짓궂게 물었다.

“……그런 거 아냐.”

“흐음. 저렇게 아름다운 조각을 보내는 남자라.”

그녀는 눈을 가늘게 뜨고 팔짱을 꼈다.

“아무래도 머지않았겠네요.”

“뭐가?”

“뭐긴요.”

메리사는 콧잔등을 한 번 찡긋거린 뒤 휙 뒤를 돌았다. 소담한 드레스 자락과 노을빛 머리카락이 함께 나부꼈다.

“황녀궁의 봄날 말이에요, 전하.”

아, 바쁘다 바빠. 메리사는 에슬린을 두고 쌩 돌아가 버렸다.

“봄날…….”

그게 뭘 의미하는지 모르는 바는 아니었다.

에슬린은 가슴에 손을 올렸다. 아까부터 두방망이질 치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서였다.

아, 또다.

그는 늘 에슬린을 막막하게 만든다.

바닥도 천장도 없는 그의 애정을 마주할 때면 에슬린은 너무나 쉽게 패배한 기분이 들었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갚아야 할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게 된다.

에슬린은 햇살을 맞아 반짝이는 분수대를 응시했다.

곤란한 듯 그녀가 턱을 기울였다.

“큰일이네…….”

테베트가 남긴 흔적을 보니 벌써 그리워져 버렸다.

아, 그래서인가.

의도한 것이라면 충분히 성공적인 노림수였다.

에슬린은 아주 오랫동안.

정말 긴 시간 동안 테베트 생각에 사로잡혀 있어야만 했으니까.

* * *

“타툴란은 포털을 열 준비를 마쳤나?”

어두운 밤. 카르단은 은밀히 타툴란의 인형과 대면했다.

“예.”

붉은 머리 기사가 답했다.

“선생님께서는 황자 전하를 다시 모시기만을 기다리고 계십니다.”

말할 때마다 작은 덧니가 슬쩍 모습을 드러냈다 사라졌다.

카르단은 만족스럽게 웃었다.

“좋아…… 그럼 이제 남부로 갈 준비를 해라.”

갑작스러운 말에도 기사는 의문을 표하지 않았다.

“용병들을 모아 놨으니 가서 황녀의 측근들을 없애고, 타툴란과 함께 돌아와.”

“알겠습니다.”

기사는 무뚝뚝하게 답하곤 몸을 돌렸다.

그가 사라지기 전, 카르단이 불현듯 물었다.

“흑마법으로 만든 독약을 다시 얻을 순 없나?”

“독약 말씀이십니까?”

“그래. 흔적을 남기지 않는 그 물건 말이야…….”

기사는 단조로운 얼굴로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건 제게 허락된 것이 아닙니다.”

“쯧.”

카르단은 못마땅한 얼굴로 손을 휘휘 내저었다. 축객령이 떨어지자 기사는 몸을 돌렸다.

뒤에서 카르단이 중얼거렸다.

“그걸 전해 준 놈도 더는 줄 수 없다더니.”

문이 닫히기 직전, 기사는 문틈 사이로 보이는 카르단의 얼굴을 돌아보았다. 사나운 얼굴로 의자를 걷어차며 그가 씨근덕거렸다.

“황녀를 뭘로 죽이지?”

꾸욱. 기사는 남몰래 주먹을 말아 쥐었다.

* * *

에슬린은 스르륵 눈을 들었다.

사위는 온통 어둠이었다.

조용히 이불을 걷고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밖에서 분주한 기척이 느껴졌다.

“전하.”

미약한 노크 소리 후 모습을 드러낸 건 제롬이었다.

그는 조금 낭패한 얼굴이었다.

“또?”

“예. 잡아 두긴 했습니다만.”

제롬의 옷깃에 피가 튀어 있었다.

에슬린은 가운을 걸치며 램프에 불을 밝혔다.

“하녀들을 부를까요?”

“아니. 메리사를 불러 줘.”

제롬은 꾸벅 고개를 숙이고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제롬 경.”

그가 완전히 사라지기 전, 에슬린이 말했다.

“죽이지 마. 자백을 받아 내.”

“……알겠습니다.”

그의 낯빛에 옅은 곤란이 서렸다.

에슬린은 그 이유를 알고 있었다.

‘자백을 받기는 어렵겠지.’

그들은 붙잡히면 최선을 다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고문도 소용이 없었다.

테베트가 떠나고 수일. 기다렸다는 듯 카르단의 암살자들이 황녀궁을 침입했다.

이번으로 두 번째였다.

무식한 방법이었으나, 카르단답다고 에슬린은 생각했다.

물론 에슬린에게까지 닿는 일은 없었다.

디에리안의 보호 마법과 리페리우스의 기사들은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다른 호위들도 있는 것 같긴 한데.’

에슬린은 어렴풋이 황후를 떠올렸으나 이내 곧 지워 버렸다.

활성화된 디에리안의 보호 마법이 짐승처럼 입을 벌리고 여기저기서 일렁거렸다.

“전하!”

문이 벌컥 열렸다.

산발로 뛰어온 메리사가 에슬린을 정신없이 살폈다.

“괜찮으세요? 이게 무슨……!”

에슬린은 긴 숨을 내쉬며 탁자에 남은 물을 마셨다. 이건 잠들기 전에도 마셨던 물이라 괜찮았다.

“심장이 남아나질 않겠어요.”

인정한다. 하여튼 카르단은 이런 쪽으로는 비상하게 솜씨가 좋았다.

성공률이 극악이어서 그렇지.

“메리사, 앞으로 모든 식사나 차 같은 것들은 모두 직접 준비해 줘.”

“네?”

“사용인들은 꼭 필요한 인원만 빼고 긴 휴가를 보내거나, 거부하면 내쫓아.”

에슬린은 티 테이블에 가 앉았다.

“그랬다간 황녀궁이 텅 빌 텐데요.”

메리사는 뭐라고 더 덧붙이려다 입을 다물었다. 에슬린의 표정이 마치 그게 정답이라는 듯 보였기 때문이었다.

시녀의 시선이 에슬린의 티 테이블에 닿았다.

거기엔 에슬린이 잠들기 전까지 보던 편지가 있었다.

“전하, 대체 뭘 생각하고 계신 건지…….”

에슬린은 편지를 집어 들었다.

크세로이츠의 황자는, 생각보다 호탕한 구석이 있었다.

시녀를 안심시키듯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기습하려면 일단 숨을 죽여야지.”

* * *

“그런 무식한 방법으로 암살자를 또 보내지 마시라고 말씀드렸을 텐데요.”

카르단이 입술을 씰룩였다.

프레이 백작은 못마땅한 얼굴로 가볍게 탁자를 내리쳤다.

“그들이 행여라도 전하의 이름을 흘리면 끝입니다.”

“흥. 그럴 일은 없어.”

암살자 중에는 어렵사리 구한 마법사도 있었다. 그를 통해 맹약 마법을 걸어 두었다.

카르단의 이름을 입에 담으려 하는 순간, 그들에게선 말 대신 피 분수가 뿜어져 나올 것이었다.

“황궁에서 작은 꼬투리라도 잡히면 끝입니다. 모르십니까?”

“알았어! 이제 안 한다고!”

어차피 관두려고 했다. 황녀를 지키는 방패들이 생각보다 만만치 않았다.

카르단이 엄선한 용병들조차 그 가냘픈 목에 손끝 하나 대지 못했다.

황녀궁은 그야말로 빈틈 하나 없는 철옹성 같았다.

“쯧, 황궁 밖으로 끌어낼 수 있다면 더 수월할 텐데.”

“움직이지 않을 겁니다.”

황궁은 황녀의 울타리였다. 바깥이 더 예측 불가능하리란 건 황녀가 가장 잘 알고 있을 터였다.

“그러니 그 공들인 협상단도 모리어스 후작이 대신 간 것 아닙니까?”

“그렇긴 하지.”

“게다가 전하께서 어설프게 침입하시는 바람에 경계는 더 강화됐겠죠.”

카르단이 팔걸이에 올린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럼 어떻게…….”

프레이 백작은 다 듣지 않고 몸을 일으켰다.

“남부로 가는 보급 부대는 언제 출발합니까?”

“나흘 뒤야.”

“준비는 마치셨습니까?”

카르단은 그제야 비스듬하게 웃었다.

“물론이지.”

카르단의 군대를 섞는 건 어렵지 않은 일이었다.

중요한 보급도 아니었으니 본대는 후발대에 거의 관심이 없었다.

“좋습니다.”

프레이 백작은 다시 연락하겠다고 말하며 황자궁을 빠져나왔다.

그는 저택으로 돌아왔다.

벽난로 앞 안락의자에 피곤한 몸을 눕혔다.

‘떨어져 있어도 떨어져 있는 것 같지가 않군.’

황녀의 측근들이 그 곁을 떠나면 처리하기 수월할 거라고 생각했다.

카르단의 암살 시도를 알면서도 모른 척 넘긴 것은 그 이유에서였다.

‘확실하고도 강력한 한 방이 필요한데.’

적갈색 눈동자에 벽난로의 불빛이 일렁였다.

황녀의 힘의 원천은 그 측근들에게 있었다. 그녀의 약점이자 무기이기도 한 그들.

‘그들의 입김이 닿지 않는 곳이 어디인가?’

특히…….

테베트 리페리우스의 힘이 닿지 않는 곳.

그는 아주 성가신 상대였다. 그 자체로의 강함은 물론이거니와 그에게 충성하는 기사들의 규모를 생각하면, 제국을 쑥대밭으로 만드는 건 마물이 아니라 테베트가 될지도 몰랐다.

암살 부대가 전장에서 그의 목을 잘라 오면 가장 좋을 것이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백작령에 대기시킨 기사와 병사들은 최후의 수단이었다.

“그 전에 좀 더 확실한 방법이 없는가……?”

프레이 백작의 얼굴이 고뇌에 젖었다.

그때 백작가의 집사장이 다가왔다.

“백작님.”

“무슨 일이냐?”

“손님이 오셨습니다.”

“손님?”

백작은 인상을 찌푸렸다. 약속에 없던 일이다.

“예. 그게…….”

그와 동시에 문틈으로 익숙한 듯 익숙지 않은 얼굴이 들어섰다.

“……자네는.”

“오랜만에 뵙습니다, 백작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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