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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42화 (142/147)

142화

프레이 백작은 아래턱을 느리게 문질렀다.

우아한 백발을 가지런히 넘겨 묶은 여자는 인자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나온 세월을 대변하듯 눈가에 깊게 자리 잡은 굴곡. 하지만 그 사이로 보이는 눈빛만큼은 그 어떤 것보다 흉흉했다.

그는 펄럭이는 한쪽 소매를 느리게 응시했다.

리페리우스의 기생충이 여긴 무슨 일인가?

“사티나 자네가 어쩐 일이지?”

사티나가 무릎을 꿇었다.

“제가 지닌 비밀을 털어놓으러 왔습니다.”

백작을 직시하는 노집사의 눈빛에 일순 어떤 감정이 스쳤다.

“부디 리페리우스를 구원해 주십시오.”

그 감정이 어쩐지 슬픔처럼 느껴졌으나, 곧 백작의 뇌리에서 빠르게 잊혔다.

* * *

“전하, 진찰하러 왔어요.”

작은 진료 가방을 든 여자가 문을 열었다.

소파에 반쯤 누운 자세로 앉아 있던 에르단은 팔만 휘휘 저었다.

“로사나…… 나 진짜 제정신이라니까.”

그러나 여자는 강제로 그를 일으킬 뿐이었다. 진지한 얼굴로 이곳저곳을 살펴보기 시작한다.

“자, 맥박 좋고. 눈동자 맑고. 혓바닥 깨끗하고. 근데 이상하네.”

여자, 로사나가 고개를 기울였다. 도수 높은 안경 탓인지 눈이 오목하게 보였다.

“왜 자꾸 헛소리를 하실까?”

에르단은 발끈해 몸을 일으켰다.

로사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진료 가방을 챙겨 들 뿐이었다.

“진짜라고. 에슬린이 황궁에…….”

“됐고, 얼른 일어나세요.”

로사나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줄곧 저런 상태였다.

처음 남부에서 만났을 때부터, 에슬린이 죽지 않았다고 수백 수천 번을 말해도 로사나는 믿지 않았다.

오히려 에르단을 미친 사람 취급했다. 매일 진료를 보러 올 정도로.

“쓸데없는 희망만큼 정신 건강에 나쁜 게 없답니다.”

둥그런 안경을 추어올린 로사나가 말했다.

황궁에 있을 때도 그다지 눈이 좋은 편은 아니었는데, 남부에 오고 나선 급속도로 시력이 떨어졌다고 했다.

‘으휴, 저 고집불통 책벌레.’

황궁 소식은 듣지도 못한 모양이었다. 혹은 일부러 듣지 않으려 하는 건지도 몰랐다.

“애초에 겨울 포도에 대한 연구서를 누가 준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에르단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복도를 걸었다.

“곧 모리어스 후작이 도착한다니까 만나면 물어봐.”

그러고 보니 후작이 늦네, 에르단은 어렴풋이 생각했다.

“아, 디에리안이랑 리페리우스 공작도 잘하면 만날 수 있겠……”

“악! 그 이름 말하지 마세요.”

툭, 갈색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로사나가 있는 힘껏 귀를 틀어막았기 때문이었다.

“무슨 이름?”

“그, 리페…… 어쩌고.”

그녀는 입에 담기도 싫은 눈치였다. 휘휘, 벌레 쫓는 듯한 손짓에 에르단이 빙그레 웃었다.

“아하.”

예전에 에슬린에게 들은 적이 있었다.

불쌍한 시녀 로사나가 팔자에도 없는 황녀 행세를 하다 리페리우스 공작을 맞닥뜨린 일을.

“그건 정말 악몽이었겠어.”

“아직도 꿈에 나온다고요.”

로사나는 손날로 귀를 툴툴 털었다.

에르단은 그녀의 가방을 대신 들었다.

에볼튼 자작저는 꽤 규모가 컸다. 긴 복도를 걸으며 에르단이 물었다.

“그나저나 다른 의원들은?”

“환자 보고 있죠. 새로운 치료약으로 급한 환자들부터 치료하고 있어요.”

똘똘하게 안경을 고쳐 쓰는 모습이 몹시 믿음직스러웠다.

“하아…… 네가 남부에 있어서 정말 다행이야. 어떻게 여기 와 있을 생각을 했어?”

“의원이 환자 있는 데 있어야지, 그럼 어디에 있어요?”

그녀는 에르단이 든 가방을 흘끔 보았다.

“사실은 직접 치료법을 알아내고 싶었어요.”

그 안에는 크세로이츠인들로부터 얻은 치료법이 들어 있었다.

“개인적으론 아쉽지만, 의원으로선 기쁘네요.”

로사나가 씩 웃었다.

“치료법을 받아와 줘서 고마워요, 황자님.”

에르단은 순간 걸음을 멈추었다.

로사나가 웃는 걸 너무 오랜만에 봐서 그런가? 뭔가 좀 이상한데…….

그가 머쓱한 얼굴로 뒤통수를 긁적였다.

“아니, 난…… 그냥 에슬린이 시킨 대로 했을 뿐이야.”

“흠.”

로사나가 팔짱을 꼈다.

“제가 최근에 개발한 망상 관련한 약이 있는데, 역시 그걸 처방해 드리죠.”

“망상 아니라니까…….”

하여튼 누구 시녀 출신인지 고집 하나는 더럽게 셌다.

“황자!”

그때 저 멀리 거대한 남자가 성큼성큼 다가왔다.

그는 그야말로 곰 같은 덩치를 가지고 있었다.

양팔을 벌린 채 웃으며 다가오는 모습이 그저 부담스러웠다.

“내 착각인가? 지금 땅이 울리는 것 같은데.”

“거봐요. 망상 약이 시급하시다니까.”

로사나가 냉철하게 대꾸했다.

“하아아…….”

에르단은 길고, 길고, 긴 한숨을 내쉬었다.

그를 흘끔 본 로사나가 조금 측은하다는 듯 눈썹을 아래로 늘어뜨렸다.

“오늘도 소화제 넣어 드려요?”

“……부탁할게.”

우울한 낯으로 중얼거리자 그녀는 어깨를 두드리곤 사라졌다.

“뭐야! 왜 이렇게 안색이 안 좋아? 희끄무레해 가지곤…….”

퍽! 퍽! 남자가 에르단의 등짝을 사정없이 내리쳤다. 억, 윽, 악. 아침에 먹은 게 소화를 넘어 그대로 튀어나올 뻔했다.

남자는 호탕하게 껄껄 웃었다.

“됐고, 빨리 한잔하러 가자고! 그때 먹은 베르타니아 요리를 다시 맛보여 줄 순 없나?”

“대낮부터?”

“술은 낮술이지!”

“하아…….”

에르단은 어쩔 수 없이 하녀를 시켜 이른 점심을 준비하게 했다.

크세로이츠의 황자는 아주 호쾌한 남자였다. 이곳 날씨가 더워 죽겠다며 반소매만 입고 온갖 곳을 돌아다녔다.

짙고 뚜렷한 이목구비에 매력적인 피부색이 어우러져 마치 거대한 야생 동물을 보는 것 같았다.

남자는 대낮부터 기름진 고기와 술을 마구잡이로 먹어 치웠다.

에르단은 보기만 해도 배가 불러 슬그머니 포크를 내려놓았다.

“근데 정말 나랑 광물에 대해 협상할 마음은 없는 거야?”

심드렁하게 묻자 남자가 크게 웃었다.

“우리가 가져온 걸로 아직 충분하지 않나?”

“급한 환자들에게 쓸 분량은 되지만, 곧 부족할 것 같으니 하는 말이야.”

짙은 눈썹이 격렬하게 들썩거렸다. 그는 늘 쾌활하고 기분이 좋아 보였다.

한참을 웃으며 술을 물처럼 들이켜던 그가 불쑥 대꾸했다.

“응, 없어.”

에르단은 짜증스럽게 물잔을 내려놓았다.

남자가 고기를 한껏 욱여넣으며 말했다.

“우리에게도 중요한 협상인데, 좀 더 미래를 약속해 줄 수 있는 사람과 해야지. 곧 올 거라며? 네 그…… 뭐야, 황녀?”

“황녀가 아니라 황녀의 협상단.”

남자가 입술을 비뚤게 올렸다.

“뭐가 다른가?”

“황녀의 대리인이 오는 거라고.”

“흠……. 그래?”

알쏭달쏭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에르단은 입술을 삐죽였다.

“근데 나도 황녀의 대리인이야. 내 쌍둥이 괴롭히지 말고 그냥 나랑 얘기해.”

“글쎄, 황자는 뛰어난 협상가로 보이진 않는걸. 우리에게 뭘 제시해야 할지 감은 잡았나?”

“…….”

정곡이다. 에르단은 불쾌함을 숨기지 않았다.

남자가 다시 한번 더 쾌활하게 웃음을 터뜨렸다.

크세로이츠 황자는 에르단을 아주 마음에 들어 했지만, 치료법과 연구서의 교환 외에는 입을 다물었다.

그는 더 확실한 것을 약속해 줄 인물을 기다리고 있었다.

“근데 베르타니아 황궁은 형제들끼리 서로 죽인다더니, 그쪽은 아닌가 봐?”

“난 주제 파악을 아주 잘하거든.”

오호? 황자가 짙은 눈썹을 꿀렁거렸다.

“1황자는 주제 파악을 못 하고 덤비는 게 주제넘은 포인트고.”

“하하! 후계자가 될 건 황녀밖에 없다는 거군? 더욱더 황녀를 만나는 게 기대되기 시작했어! 아무렴, 그래야 내가 협상할 보람이 있지!”

“그러니까 황녀 안 온다고.”

그러거나 말거나 크세로이츠 황자는 다시 식사를 재개할 뿐이었다.

에르단은 거의 줄어들지 않은 접시를 응시했다.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스스로도 협상에 소질이 없다는 건 알고 있었다.

얌전히 모리어스 후작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직접 오겠다고 난리 부릴 것 같더니?’

에르단은 의외라고 생각했다.

뭐, 어쨌든 이 험난한 남부까지 굳이 올 필요는 없다.

새로운 접시에 손을 대려던 황자가 문득 거칠게 혀를 찼다.

“그나저나, 뭐 그렇게 어려운 연구서를 준 거지? 우리 애들이 그거 파느라 머리가 다 빠지겠다던데.”

두꺼운 손가락이 턱을 쓰다듬었다.

에르단은 괜히 한 번 더 뻗댔다.

“그러니까 하루라도 빨리 부하들 탈모 막고 싶다면 그냥 나랑 협상해.”

“흐흠. 내 머리카락이 아니니, 뭐.”

남자는 살그머니 눈알을 돌렸다.

“나쁜 주인이네.”

하하! 커다란 웃음소리가 식당을 메웠다.

에르단도 웃으며 포크를 움직였다. 조금 시끄럽지만 꽤 호방하고 좋은 남자였다.

“오늘 밤에도 한잔 어때? 크세로이츠의 술을 대접하지! 우리 불꽃 공연과 함께 즐기면 딱일 거야.”

크세로이츠 황자가 말했다.

“좋아. 그건 나쁘지 않았지.”

에르단은 하늘을 수놓던 색색의 불꽃들을 떠올렸다.

“역시 황자와는 말이 잘 통해!”

황자가 잔을 부딪치고 술을 들이켰다. 두툼한 목울대가 쉬지 않고 움직였다.

크! 다 비운 잔을 내려놓은 그가 문득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근데 젝스는 어디 갔어? 젝스도 초대해야 하는데, 우리 동포!”

“아, 심부름.”

“심부름?”

“있어, 그런 게.”

“흐음……. 우리 동포를 너무 부려 먹는 건 아니겠지? 이제 베르타니아인이 되었다지만, 못되게 굴면 참지 않겠어. 알지? 내가 치료법을 황자에게 가져온 건 젝스의 설득이 컸다는 거.”

“어련하겠어?”

황자가 킬킬거렸다.

에르단이 심드렁하게 덧붙였다.

“그보다 젝스 경 너무 귀찮게 하지 마. 안 그래도 지금 예민하니까.”

“왜?”

“왜긴 왜야? 주인 곁에 돌아가고 싶은데 못 오게 하니까지.”

흠, 황자가 식사를 마친 입가를 거칠게 닦았다.

“누군진 몰라도 나쁜 주인이네.”

“이봐, 발루스 황자.”

에르단이 피식 웃었다.

“그게 가장 해선 안 되는 말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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