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3화
“아 천천히 좀 가!”
쯧쯧, 혀 차는 소리에 젝스가 머쓱히 뒤통수를 긁었다.
“내가 이 다리로 자네의 그 속도를 어떻게 쫓아가라는 거야?”
노인은 푸른빛 일렁이는 눈동자로 젝스를 노려보았다. 말 위에 앉은 젝스는 묵직하게 고개를 숙였다.
“죄송합니다.”
“뭐가 그렇게 급해? 어울리지 않게.”
노인의 질책에 젝스는 고삐를 꽉 쥐었다. 늘 그렇듯 무표정한 얼굴에 알게 모르게 초조함이 고여 있었다.
“역시 저와 함께 말을 타시는 게…….”
“에잉, 됐어! 싫어!”
노인, 켈라는 거칠게 고개를 저었다.
그녀가 탄 푸른 말은 노인의 몸에 딱 알맞게 조정되어 있었다. 오히려 다른 말이 더 불편할 것이었다.
“그럼, 계속 가겠습니다.”
“천천히, 천천히 가라고.”
켈라는 목을 긁는 듯한 말투로 속삭였다.
“서두르다 들키고 싶지 않으면 말이야.”
젝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짧았던 고수머리가 길어 바닷바람에 휘날리고 있었다.
짠 내음을 맡으며 그는 조심스럽게 절벽 아래를 이동했다.
“주군께 별다른 소식은 없었습니까?”
“그래. 무슨 일이 있었으면 마법 종이가 뒤집혔겠지.”
켈라는 레비브 산에서 만난 에슬린에게 종이 몇 장을 넘겼다. 그건 그녀만의 소통 수단이었다.
많은 내용을 주고받을 순 없었지만, 전서구 마법보다 빠르니 나름 효과적인 마법이었다.
“그보다 크세로이츠인들은 에볼튼 자작저에 계속 있는 건가?”
젝스는 앞을 응시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 자네가 아니었다면, 그들은 치료법을 그렇게 쉽게 내놓지 않았겠지.”
“후계 구도가 시끄러우니, 원하는 협상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이 우위에 있다고 여겼다.
치료법이 없으면 베르타니아에선 사람이 죽지만, 크세로이츠는 겨울 작물 재배법이 없어도 지금 당장 큰 문제가 없다.
그 크세로이츠인들을 설득해, 치료법을 바로 공개하게끔 한 건 젝스였다.
물론, 에슬린에게 가장 먼저였다.
“그렇군…….”
켈라가 중얼거렸다.
저 우직한 기사가 불쑥 저를 찾아와 에슬린에게 소식을 전해 달라고 했을 땐 얼마나 놀랐는지.
그러다 문득 궁금해졌다.
“근데 자네 말이야.”
“예.”
“어떻게 남부에 와 있을 생각을 했지? 크세로이츠인 황자가 치료법을 들고 몰래 왔다는 건 어떻게……”
“쉿.”
젝스가 별안간 고삐를 잡아당겼다.
켈라는 입을 다물고 멈추었다. 마법으로 움직이는 눈이 날카로운 빛으로 빛났다.
젝스는 말에서 뛰어내려 날렵한 동작으로 바위 뒤에 몸을 숨겼다.
예리한 잿빛 눈동자가 천천히 저 멀리 검은 절벽 아래에 가닿았다.
해안선을 따라 불빛이 늘어서 있었다. 어망을 든 어부들이 그 틈을 바쁘게 돌아다녔다. 코끝 가득 파고든 바닷바람은 조금 서늘하고 축축했다.
그는 무언가를 확인했다.
“켈라 님.”
“그래.”
젝스가 고개를 돌렸다.
“주군께 연락을 넣어 주십시오.”
“알겠네. 자네는?”
“저는…….”
그는 다시 충성스러운 기사의 얼굴을 했다.
“제 주군을 마중해야겠습니다.”
* * *
“하…… 귀찮아.”
에르단은 어두운 복도를 걸었다.
점심 먹은 게 아직 소화도 덜 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타국 황자의 초대를 거절할 수도 없었다.
열둘째라고 했나…….
크세로이츠는 자식을 많이 두는 나라라고 했다. 형제들이 아주 많다고도.
아, 나도 한 50명 중 32번째 자식쯤으로 태어났으면 좋았을걸. 그럼 이렇게 힘들게 살지 않을 수 있었을지도 몰라…….
에르단은 실없는 생각을 하며 바닥을 퍽퍽 찼다.
“음? 에볼튼 자작?”
그의 눈이 가늘어졌다.
저 멀리 복도 창밖을 내다보던 자작의 어깨가 펄떡 뛰었다.
“전, 전하.”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밖에 뭐라도 있나?”
“아뇨. 그냥…… 별채에 불편한 건 없는지 확인차.”
에볼튼 자작이 어색하게 웃었다.
“자작저에 이렇게 손님이 많았던 것은 처음이라 말입니다.”
그가 손수건을 꺼내 이마를 훔쳤다.
안 그래도 마르고 작은 남자였는데, 요 며칠 새 더욱 쪼그라든 것 같았다.
수도에서 돌아온 자작은 저택에 크세로이츠인들과 의원들이 바글거리는 것을 보고 까무러쳤다. 미리 연락을 받았을 텐데도 말이다.
“근데 전하께서는 별채에 어쩐 일이십니까?”
“보면 몰라?”
에르단은 쯧 혀를 차며 위층을 노려보았다. 12황자가 머무는 침실 쪽이었다.
“아, 예…… 또 12황자님과 약속이 있으시군요.”
“그래. 근데 그러고 보니 자작.”
에르단이 삐딱하게 팔짱을 꼈다.
“아까 만찬장엔 끝까지 안 나타나더라? 결국 내가 황자를 끝까지 상대해야 했잖아.”
“하하……. 죄송합니다. 요새 일이 많아 너무 피곤해서…….”
자작이 우물쭈물 대답했다.
“솔직히 이국의 황족을 어떻게 대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어서 말입니다. 혹시라도 심기를 거스르게 될까 걱정스럽기도 하고…….”
자작은 재차 이마와 턱을 손수건으로 닦았다.
에르단은 절레절레 고개를 흔들었다.
‘옆 동네 카벤 백작과는 영 딴판이군. 에슬린이 왜 꺼렸는지 알겠어.’
에슬린은 에볼튼 자작을 못마땅해했다. 남부의 지리적 이점을 전혀 살리지 못하는 그의 영지 경영 방식이 불만스럽다는 것이었다.
‘그렇다고 나쁜 사람 같지는 않은데.’
영지 운영이 소극적인 건 저 성격 탓@이 클 것이다.
에르단은 자기도 모르게 한숨을 내쉬었다.
“더 볼일이 없으시면 전 이만 가 봐도 될지……?”
“아아, 응.”
생각에서 깨어난 에르단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자작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쭈그러든 어깨가 어쩐지 맞지 않는 옷을 입고 걷는 사람 같았다.
‘역시 자작도 32번째 자식 정도로 태어났으면 좋았을 거야…….’
큽. 신세야.
에르단은 남몰래 입을 틀어막았다.
영양가 없는 한탄을 계속하며 그대로 복도 끝 계단으로 향하려던 찰나였다.
“저, 에르단 전하.”
“응?”
돌아보니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자작과 눈이 마주쳤다.
“모리어스 후작께서는 언제 도착하십니까?”
“아. 아까 자작령 경계를 넘었다고 했으니, 곧이겠지?”
“그렇습니까.”
에볼튼 자작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에 불빛이 적어서 그런가.
멀리서 보는 자작의 얼굴에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운 듯했다.
“……정말 제 영지를 빼앗기는 느낌이군요.”
“뭐라고?”
“아닙니다, 전하.”
웅얼거리는 말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다. 자작이 꾸벅 인사하곤 다시 등을 돌렸다.
“……뭐야?”
유령처럼 멀어지는 등을 보며 에르단이 어깨를 으쓱였다.
다시 걸음을 재촉해 계단을 올랐다.
‘그러고 보니 젝스 경이 돌아오지 않네.’
항상 저녁 전에는 돌아오던 그였다.
‘곧 오겠지, 뭐.’
에르단은 심드렁하게 생각했다.
저벅, 저벅.
2층 복도엔 적막이 내려앉아 있었다.
12황자는 침실이든 응접실이든 상관하지 않고 온갖 곳에서 술판을 벌이는 취미가 있었다.
지금도 침실에서 부하들과 한잔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 복도가 이렇게 조용할 리 없지.’
에르단은 쯧 혀를 찼다.
12황자는 호위 기사 몇과 시종, 주술사(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의원을 데려왔다. 항해사 같은 다른 부하들도 있는 것 같긴 했지만, 그들은 자작저 밖에 머물렀다.
“근데 어둡긴 왜 이렇게 어두워?”
어쩐지 기묘한 느낌이 들었다.
아래층보다 불빛이 유독 적은 탓일까? 몇몇 램프 불은 아예 꺼져 있었다.
“…….”
에르단은 문득 걸음을 멈췄다.
아무리 침실에 모여 있다 한들…….
이렇게까지 조용할 수가 있나?
그는 다시 빠르게 발을 움직였다.
뭔가 이상해.
“…….”
에르단은 굳게 닫힌 침실 문 앞에 섰다.
‘이 문이 닫혀 있는 일이 흔했던가?’
문고리에 손을 얹었다. 오늘따라 금속 손잡이가 왜 이렇게 차갑게 느껴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문을 열자, 내부는 온통 어둠이었다.
늘 불을 밝히고 떠들썩하게 지내던 남자였는데.
“이봐, 황자.”
고요한 정적.
불길함이 뱀처럼 발끝을 휘감고 올라왔다.
“아무도 없어?”
에르단은 어둠 속으로 걸음을 옮겼다.
비린 냄새가 나는 것 같긴 했지만, 황자의 방에선 원래 온갖 종류의 냄새가 나곤 했다.
“발루스 황자.”
툭.
그때 발치에 딱딱한 무언가가 걸렸다. 그는 고개를 내렸다.
“뭐야. 여기 있었어?”
눈이 마주쳤다. 12황자였다.
에르단이 어색하게 웃었다.
“대체 왜 여기 누워 있……”
털썩, 그의 다리가 그대로 무너져 내렸다.
아.
아니야.
몸은 저기에 있잖아.
“이 사태는 황녀께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프레이 백작이 말했다.
에슬린은 그를 노려보며 입 안 살을 깨물었다.
모든 귀족들의 시선이 그녀를 향해 꽂혔다. 황후 또한 입술을 일자로 다물고 에슬린을 보고 있었다.
“크세로이츠의 황자가 살해당한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어디선가 탄식이 흘렀다.
꽈악. 옷자락을 움켜쥔 에슬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게다가 범인은 에르단 전하라뇨!”
“하…….”
프레이 백작의 차가운 시선이 에슬린에게 꽂혔다.
에슬린은 무표정을 애써 유지하고 있었으나 눈꼬리가 파르르 떨리는 것까지는 어쩌지 못했다.
“책임자를 보내지 않으면 전쟁을 일으키겠다고 난리인데.”
백작이 칼날처럼 매서운 시선을 보냈다.
“크세로이츠를 끌어들인 장본인께서 직접 나서셔야 하지 않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