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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건넨 죽음에 대하여-144화 (144/147)

144화

* * *

그러니까 에슬린이 그 가능성에 대해 확신한 건 에르단의 연락을 받고 나서였다.

‘……하여튼 크세로이츠인의 불꽃놀이는 대단했어. 마법도 없는데 그들은 참 손재주가 좋은 것 같아.’

기회와 위기는 실과 바늘 같은 것이었다.

그저 좋기만 한 것은 없다.

달콤한 이야기에는 분명 함정이 숨어 있을 터였다.

에슬린은 크세로이츠인들이 치료법을 가지고 왔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부터 그들을 의심했다.

그들은 왜 베르타니아에 왔을까?

그것도 지금 베르타니아에 가장 필요한 것을 가지고.

크세로이츠는 사계절이 뚜렷하지 않은 겨울 제국이었다.

지형은 험하고, 기후는 좋지 않았다. 혹독한 환경 속 식량 부족은 어쩔 수 없이 따라붙는 문제였다.

만약 에슬린이 그 나라의 황족이라면 어땠을까?

둘 중 하나로 생각했을 것이다.

‘환경을 바꿀 새로운 방법을 찾거나.’

에슬린은 까만 창밖을 응시했다.

‘아니면 새로운 땅을 갖거나.’

그들이 단순히 호의만을 가지고 베르타니아를 방문했으리라곤 생각지 않았다. 크세로이츠의 12황자가 불시에 온 것이 바로 그 증거였다.

12황자는 정찰을 위해 온 것이다.

‘교역 혹은 정복.’

두 가지 선택지 중 한 가지를 고르기 위해.

에르단의 목소리가 재차 떠올랐다.

‘……하여튼 크세로이츠인의 불꽃놀이는 대단했어.’

그들은 마법의 힘 없이 폭발을 일으키는 방법을 알고 있었다.

그걸 활용한 새로운 무기가 그들에겐 있을지도 몰랐다.

검과 활이 아닌, 그 이상의.

‘하지만 정말 전쟁을 일으킬 생각이었다면, 에르단 앞에서 그걸 드러내진 않았을 거야.’

그건 그들이 아직 협상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인지도 몰랐다.

그들은 칼과 꽃을 함께 든 방문자가 맞았다.

그렇다면 그 칼을 꺼내지 못하게 하는 것 또한 에슬린의 역할이리라.

“젤킨스 자작을 불러와.”

새로운 협상단이 필요하다고 황후 앞에서 말하기 전, 에슬린은 로하르트를 만났다.

아무도 없는 빈 승마장을 말을 타고 빙글빙글 돌고 있자, 갈색 말 한 마리가 옆으로 다가왔다.

“여전하네. 복잡한 얼굴로 말 타는 건.”

에슬린은 옆을 돌아보았다. 레몬빛 머리카락 아래, 살짝 처진 눈매가 부드럽게 휘었다.

“널 되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해?”

“…….”

“말해 봐.”

로하르트는 짧은 웃음을 터뜨렸다.

“아침부터 불러 놓고 웬 뜬금없는 소릴까?”

“네가 필요해.”

고삐를 잡은 남자의 손이 일순 꿈틀거렸다.

“에슬린.”

그는 에슬린에게 다가가 뺨에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넘겨 주었다. 부드럽게 올라간 입꼬리는 습관적인 미소에 불과했다.

“화난 게 있으면 제대로 얘기를……”

“날 정보상으로 고용하겠다고 말해.”

에슬린은 입을 다물었다. 로하르트가 눈을 빛내며 웃었다.

“어차피 그러려고 부른 거잖아?”

에슬린의 눈동자가 짙게 가라앉았다. 고삐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너.”

“대가를 지불해. 그러면 네가 원하는 정보는 무엇이든 가져다줄 테니.”

로하르트가 나지막하고도 부드러운 말투로 말했다.

“그 이상은 서로 기대하지 말자고. 어차피 귀찮은 짐밖에 안 될 테니.”

에슬린은 호흡을 고르듯 긴 숨을 내쉬었다. 속내를 간파해 보고자, 색소 옅은 청록색 눈동자를 노려보았다.

하지만 로하르트는 요지부동이었다.

그가 한번 완고하게 나오면 그녀도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필요한 건가?’

로하르트에게도, 제게도.

“……좋아.”

에슬린은 떨떠름한 얼굴로 대답했다.

만족스럽게 웃는 그를 보며 에슬린이 한숨처럼 본론을 꺼냈다.

“나는 남부로 가게 될지도 몰라.”

“…….”

“그 준비를 해 줘. 누구에게도 들키지 않게.”

로하르트조차 그건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분명 남부로 가는 건 에슬린이 아니라 모리어스 후작이라고 디에리안이 그랬다.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정보상이 모르는 것도 다 있네.”

에슬린이 피식 웃었다. 그 입꼬리에 매달린 미소를 그는 홀린 듯 바라보았다.

“남부 바다 어딘가에 크세로이츠의 침략선이 있어.”

“뭐?”

“정찰선일 수도 있지만, 뭐든.”

에슬린은 설핏 미간을 구겼다.

“우리 남부를 잠시 혼란에 빠뜨릴 정도는 되겠지.”

나직이 이어진 말에 로하르트는 헛웃음을 삼켰다.

잠깐의 혼란이라 한들, 전쟁과 전염병이 겹친 남부에는 치명타일 것이다.

“난 그걸 젝스 경에게 확인하게 할 생각이야.”

고삐를 쥔 손이 하얗게 질렸다.

“크세로이츠 황자는 날 직접 만나길 원해.”

“…….”

“정말 침략선이 있다면 그 초대에 응하지 않을 수 없지.”

구름이 태양을 가렸다. 에슬린의 얼굴에 서늘한 그늘이 내려앉았다.

“그러니 만약 내가 남부로 가게 된다면…….”

테베트는 안 된다. 디에리안도 안 된다.

로하르트의 턱이 바짝 당겨졌다.

“너밖에 없어.”

“…….”

로하르트는 에슬린이 남부로 가게 될 확률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그건 크세로이츠의 침략선이 있는지 따지는 것과 비슷했다.

그는 빠르게 남부로 갈 준비를 했다.

먼저 출발한 모리어스 후작이 남부로 가는 길목에 있는 도적들을 정리했다.

리페리우스 공작이 출정했고, 비슷하게 젝스의 연락이 날아들었다.

에슬린은 제 예상이 빗나가기를 간절히 바란 듯했다.

하지만 그녀의 예측은 대체로 맞았고, 그걸 누구보다 로하르트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로하르트는 제 준비가 헛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그건 어쩐지 복잡한 감정이었다.

이왕 이렇게 된 거, 에슬린을 목적지까지 무사히 데려다 놓을 생각이었다.

그랬는데.

“이 사태는 황녀께서 책임을 지셔야 합니다.”

“…….”

“크세로이츠의 황자가 살해당한 건 보통 일이 아닙니다.”

저기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에슬린은.

과연 이 사태까지 예측한 게 맞을까?

* * *

에슬린이 단상 아래로 나아가 고개를 치켜들었다. 안색이 창백해진 황후가 보였다.

“에르단이 범인일 리 없습니다. 제대로 된 확인을 해야 합니다.”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에슬린은 크게 숨을 들이마셨다 내쉬었다.

‘진정해.’

뜨거워졌던 머리가 천천히 식었다.

주변은 살얼음 같은 침묵이 가득했다. 귀족들은 서로의 눈치만 살피고 있었다.

“황후 폐하, 에르단 황자께서 크세로이츠인들에게 억류되어 계십니다.”

프레이 백작의 서릿발 같은 말에 황후는 아찔한 듯 눈을 길게 감았다 떴다.

“크세로이츠인들은 당장이라도 돌아가 저들의 황제에게 이 사실을 알리겠다고 성화라는데, 에슬린 전하.”

백작이 에슬린을 돌아보았다.

“기어코 이 땅에 전쟁의 불씨를 당기게 되셨습니다. 어떡하시겠습니까?”

‘전쟁’이라는 단어에 귀족들이 짙은 탄식을 토해 냈다. 불안에 젖은 웅성거림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역시 정체도 확실치 않은 여자를 인정한 대가가…….

성배도 없이 황녀궁을 여니 이런…….

거르지 않은 비난의 말들이 함부로 쏟아졌다.

카르단은 솟아오르는 입꼬리를 애써 감췄다. 둥글게 휜 눈가에 비웃음이 잔뜩 맺혀 있었다.

“조용히들 하시오.”

“하지만 폐하!”

귀족 중 누군가 나섰다.

“이 사태는 정말 큰일입니다!”

“책임자를 보내셔야 해요!”

황후가 이마를 짚었다.

“에볼튼 자작은 뭘 하고 있지?”

“고작 자작입니다. 뭘 할 수 있겠습니까?”

백작은 단호하게 대꾸했다.

“게다가 모리어스 후작은 도적 떼를 만나는 바람에 남부엔 아직 도착도 못 했다더군요.”

“말도 안 되는!”

“대체 일을 어떻게……!”

들불처럼 퍼져 나가는 귀족들의 개탄 어린 목소리를 들으며 에슬린은 차가워진 손끝을 말아 쥐었다. 문득 웃음이 비어져 나올 것만 같았다.

온 세상이 남부로 가라고 등을 떠미는 것 같군.

“알겠습니다.”

나지막이 흘러나온 목소리에 웅성거리던 소음이 삽시간에 멎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

황후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눈동자가 복잡하게 얼룩져 있었다. 에슬린은 그 얼굴을 길게 바라보지 않았다.

“다들 책임자를 원하시니 제가 이번 일을 해결하죠.”

“하지만 당장 떠나기엔 아무것도 준비가……”

“모후.”

잠자코 있던 카르단이 불쑥 나섰다.

“때마침 보급 부대가 남부로 출발하지 않습니까? 어차피 중요한 건 호위 문제이니, 에슬린을 그 행렬에 합류시키십시오.”

황후의 매끈한 미간이 좁아졌다.

카르단이 왜 보급 부대를 입에 올리는가?

그 보급 부대는 리페리우스 공작의 요청에 따라 꾸린 것이었다. 부대의 명단과 물자 목록을 확인한 건 황후 자신이었다.

‘별다른 문제는 없었다.’

그렇다면 카르단은 지금 합리적인 말을 한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하지만 보급 부대는 남동부 루트비아 전선으로 갈 예정이야. 황녀는 에볼튼 자작저가 있는 엔더스로 가야 하고.”

“남부 길목에서 두 갈래로 나뉘면 될 뿐입니다.”

카르단은 여상하게 대꾸했다. 흠잡을 데 없는 의견에 주변 귀족들이 기다렸다는 듯 동조했다.

황후는 복잡한 얼굴로 단상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지금은 황후로서 결단을 내려야 하는 시점이었다.

자신이 에슬린의 조력자로 나서야 하는 순간은 끝났다.

하지만…… 하지만.

제 앞에서 허리를 숙여 부탁하던 남자의 얼굴이 떠올랐다. 그 잔상에 목이 콱 틀어 막힌 듯했다.

“폐하, 폐하!”

그때 우당탕탕 바깥이 소란스러워졌다. 거친 숨을 내쉬며 달려온 자는 황후의 시종이었다.

저자가 사색이 될 일이 더 남았단 말인가.

“무슨 일이냐.”

“시, 신전에 검은 연기가 올랐습니다!”

그 순간 모든 생각이 뚝 끊겼다.

“개전입니다……!”

실내는 순식간에 불타올랐다. 탄식과 비명, 무언가가 떨어지고 깨지는 파열음 같은 것들이 뒤섞였다.

에슬린은 옷자락을 꽉 쥐었다.

“이렇게 빨리!”

“군대가 진을 치고 마법사들이 결계를 완성할 시간도 부족하지 않은가!”

“그게, 이번 포털이 갑자기 예측 불가능해지는 바람에……!”

프레이 백작이 휙 몸을 돌렸다.

“폐하, 용단을 내려 주십시오! 이 이상 남부에 혼란이 있어선 안 됩니다!”

강한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회의장 내부를 때리자, 귀족들의 두려움 섞인 눈동자가 일제히 황후를 향해 꽂혔다.

‘미안하네, 공작.’

황후는 어금니를 깨물었다.

‘자네가 원하는 건 이런 게 아니었겠지.’

하지만 그녀는 황후였다. 황제의 대리인이었다.

우선순위는 명확했다.

“……좋다.”

황후가 몸을 일으켰다. 시끄럽게 떠들던 사람들이 입을 한순간에 다물었다.

“황녀는 보급 부대를 이끌고 남부로 가거라.”

에슬린이 슥 고개를 들었다. 두 사람 사이에 짧은 시선 교환이 일어났다.

이 모든 걸 끝에서 지켜보던 로하르트가 스윽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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