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5화
여장은 빠르게 꾸려졌다.
메리사가 손댈 틈도 없이, 에슬린 앞에 미리 준비된 마차 한 대가 놓였다.
“이게 무슨…….”
메리사는 분개했다.
“포로도 아니고!”
모든 걸 최소화한 여장이었다.
한가로운 여행길이 아니니 이해 못 할 바는 아니었지만, 보급 부대는 황녀에게 그 어떤 여유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굴었다. 물품과 인원을 제한하고, 출발 시간을 제멋대로 앞당겼다.
그들은 급박한 전황을 핑계로 삼았지만 메리사의 눈엔 그저 황녀를 향한 횡포처럼 보일 뿐이었다.
‘정말 황녀님이라고 생각했으면 감히 저러진 못했겠지.’
책임을 지울 땐 황녀의 이름을 들먹여 놓고 대우는 하녀와 다를 게 없었다.
메리사는 분한 마음에 바들바들 몸을 떨었다.
“진정해.”
에슬린이 그런 시녀를 다독였다. 그녀는 메리사가 급하게 마련한 여행용 망토를 걸친 채였다.
그 모습을 보니 또다시 속이 울컥거렸다.
“황녀궁을 부탁할게.”
에슬린의 신뢰 어린 속삭임을 듣자 화만 내고 있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메리사가 크게 한 번 심호흡했다.
“걱정하지 말고 다녀오세요.”
“편지지를 남겨 두고 갈게.”
메리사는 황궁에 남겨 둘 에슬린의 눈과 귀였다. 결연한 얼굴을 한 시녀가 주인을 배웅했다.
마차 앞에 발판이 놓였다.
동시에 낯선 기사 몇이 에슬린을 향해 다가왔다.
“저희가 전하를 모실 것입니다.”
“……제롬 경은 어디로 갔지?”
에슬린은 미간을 좁혔다.
“선두에서 행렬을 이끌 겁니다. 개전이 빨라지는 바람에 서둘러야 한다고 하여.”
무기나 무구, 식량을 담은 수레와 군마 탄 기사들, 갑옷 입은 병사들이 에슬린이 탄 마차 앞뒤로 늘어서 있었다.
그 행렬은 그녀를 보호하는 것 같기도 했고, 포위한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렇군.”
에슬린은 제 주변에 선 수많은 기사의 얼굴을 차례로 눈에 담았다.
테베트가 붙여 준 몇몇 호위 기사들을 제외하고는, 모두 처음 보는 얼굴들이었다.
“그럼 마차에 오르십시오.”
기사가 팔을 내밀며 말했다. 에슬린이 그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았다.
“……왜 그렇게 보십니까?”
“아니, 자네는…… 황궁 기사가 맞나 싶어서.”
“예?”
주변 공기가 순식간에 날카로워졌다.
에슬린의 호위들이 슬그머니 검 자루에 손을 얹었다.
아주 약간의 신호만으로도 그들은 언제든 달려들 것처럼 날을 세우고 있었다. 과연, 테베트가 직접 선발하고 교육한 기사다웠다.
“난 마차에 오를 때 기사들의 에스코트는 받지 않아. 황궁 사람들은 다 아는 사실인데 몰랐나 보군.”
“…….”
“듣지 못한 건가?”
딱딱하던 얼굴에 낭패감이 스쳤다.
에슬린은 감정 섞이지 않은 눈으로 기사를 응시했다. 그의 얼굴엔 턱부터 입술까지 긴 상처가 나 있었다.
어디에서 얻은 상처일까. 전장? 아니면…… 암살 임무?
“아, 죄송합니다. 제가 황궁 기사로 서임을 받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전해 듣긴 했습니다만, 잊었습니다.”
기사가 몸을 조금 물렸다.
그 순간 에슬린이 그의 팔을 잡아챘다.
“농담이야, 경.”
에슬린은 기사의 팔에 의지한 채 마차에 올랐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얼빠진 기사의 표정이 보였다.
“어디서 뭘 들었단 건진 모르겠지만.”
에슬린이 낮게 속삭였다.
“…….”
아, 볼이 따끔따끔하다.
살기와 혈기로 뒤엉킨 지저분한 시선들 때문에.
과연 이 부대에 카르단의 사람은 몇이나 될까?
에슬린은 최대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긴 여정을 당분간 함께할 텐데, 아무쪼록 잘 부탁해.”
“……예, 전하. 성심껏 보필하겠습니다.”
기사는 빠르게 표정을 갈무리하고 단정히 허리를 굽혔다. 마차 문이 천천히 닫혔다.
‘아무도 믿을 수 없어.’
빳빳하게 치켜든 목에 힘이 들어갔다. 허벅지에 올려 둔 손가락을 살짝 말아 쥐었다.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에슬린은 무심한 얼굴로 창밖을 응시했다.
그때였다.
끼익, 잘 굴러가던 마차가 멈추었다.
“잠시 실례.”
출입문이 벌컥 열렸다. 에슬린은 갑자기 끼어든 무뢰한을 빤히 응시했다.
결 좋은 레몬빛 머리카락이 그의 이마 위를 가지런히 덮고 있었다.
“젤킨스 자작님!”
기사가 다가왔다. 로하르트는 마차 문을 잡은 채 에슬린을 올려다보았다.
“전하, 신규 선박 건조 사업을 우리 젤킨스가 제안하지 않았습니까? 아깐 온갖 소식이 날아드는 바람에 어쩐지 밀려 버린 감이 있지만, 폐하께서도 검토하시겠다고 하셨죠.”
에슬린은 로하르트를 바라보다 정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랬지.”
“그것 봐, 나도 남부에 볼일이……”
그는 읏차, 하며 마차에 훌쩍 올라탔다.
“있다니까.”
“자작님, 이건 단순 시찰이 아닙니다.”
딱딱한 기사의 대꾸에 로하르트가 눈썹을 찡그렸다.
“남부까지 가는 거 아닌가? 어차피 방향이 같은데 좀 같이 가면 안 되나?”
“…….”
“안 됩니까, 전하?”
“안 될 건 없지.”
에슬린은 덤덤한 어조로 말했다.
고개를 돌려 로하르트의 어깨 너머를 힐긋 보았다.
작은 짐마차 한 대가 행렬의 끝을 향해 탈탈 굴러가고 있었다. 검은 천으로 뒤덮인 상자가 눈에 들어왔다.
“보아하니 젤킨스 자작의 일행이 많은 것도 아닌 것 같군. 짐도 단출하고.”
에슬린은 다시 로하르트를 바라보았다.
저를 부드럽게 응시하는 눈동자와 마주치자, 어쩐지 피식 웃음이 나왔다.
“무엇보다…….”
“…….”
“자작은 승마에 딱히 소질이 없거든.”
그러자 로하르트의 눈매 끝이 살짝 경련했다. 에슬린은 못 본 척 다시 고개를 돌렸다.
침묵을 지키던 기사가 짧은 한숨 끝에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탁, 문이 닫히자 로하르트가 천천히 목을 비틀었다.
그는 처음처럼 웃는 낯이었지만 한쪽 입꼬리가 가느다랗게 떨리고 있었다.
“경주에서 진 건 딱 한 번뿐이었는데, 전하. 그것도 일곱 살 때.”
“누가 뭐래?”
에슬린은 커튼을 걷어 한 번 더 창밖을 살폈다. 익숙한 뒷모습이 행렬 앞에 있는 것을 확인한 그녀가 미련 없이 다시 커튼을 내렸다.
짐도, 사람도.
모두 준비되었다.
“만회하고 싶으면 빨리 군마로 갈아탈 궁리나 해.”
돌아보는 얼굴엔 평소와 다름없는 미소가 걸려 있었다.
* * *
늦은 밤, 베르타니아 황궁의 정문을 빠져나가는 마차가 한 대 있었다. 미끈한 마차의 벽면에 그려진 건 프레이 백작가의 문장이었다.
“자네 말대로.”
백작은 피곤한 미간을 문질렀다.
“황녀를 대륙 밖으로 끌어낼 것이다.”
덜컹거리는 마차의 진동을 느끼며, 백작이 눈을 들었다.
그의 맞은편에 앉아 있는 건 우아한 백발을 단정히 빗어 올린 노집사였다.
프레이 백작가의 사람은 아니었다.
“일이 잘되어 다행입니다.”
반듯하게 앉아 있던 여인이 입꼬리를 말아 올렸다.
여인은 창문을 가린 커튼을 좀 더 꼼꼼히 단속했다. 외부 풍경이 완벽히 차단되었다.
“12황자를 죽여 주는 대신, 황녀를 넘기겠다는 거래가 통할 줄은 몰랐습니다.”
“12황자를 죽여 준다고 하니 좋아서 달려들더군. 베르타니아 황족의 목을 잘라 가면 본국으로 귀환해서도 책임을 피할 수 있을 테고.”
“그 일행 중에 변절자가 있었다는 게 놀랍습니다.”
프레이 백작은 지팡이를 문지르며 웃었다.
“열둘째 황자가 아닌가. 그 말인즉, 그 목을 노리는 게 최소 열두 명은 족히 넘는다는 말 아니겠나.”
나이 든 여인이 말뜻을 짐작하다 서늘하게 웃었다.
“그쪽도 후계자 다툼이 치열한가 보군요.”
“주인의 목을 노리는 개는 어디에나 있는 법이지.”
사티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프레이 백작이 흔들리는 커튼 자락을 보며 말을 이었다.
“게다가 12황자가 황녀의 연구서만 던져 준 채 부하들을 지독히 착취했다더군. 불만이 극에 달해 있었어. 회유는 어렵지 않았지.”
“그렇군요.”
한 번 고개를 끄덕인 사티나가 보관함을 열었다. 데운 돌로 온기를 유지한 찻주전자를 꺼내 들었다.
능숙한 손놀림으로 차를 준비하고, 프레이 백작에게 이를 건넸다. 향긋한 냄새가 실내에 퍼졌다.
“하지만 황녀의 목 하나로 크세로이츠 황실이 납득을 하겠습니까? 약속을 어기고 12황자를 핑계로 침략해 오면…….”
“허튼소리.”
프레이 백작이 달그락, 찻잔을 내려놓았다.
“크세로이츠인들이 모국으로 돌아가는 일은 없을 것이다.”
“…….”
“황녀와 함께 남부 바다에 영원히 잠들 테니까.”
여인의 눈에 순간 이채가 스쳤다.
“크세로이츠 황실은 영원히 12황자의 죽음에 대해 알지 못할 거야. 감히 우리 대륙을 넘본 야만인에게 어울리는 최후지.”
짧은 침묵이 흘렀다. 덜컹거리는 마차 소리와 이따금씩 들려오는 말 울음소리만이 정적을 메웠다.
사티나는 백작의 빈 찻잔에 재차 찻물을 따라 주었다.
프레이 백작은 손에 쥔 차와 여인의 얼굴을 차례로 응시했다.
“움직이는 마차에서 대단하군.”
한쪽 팔만으로 차를 준비하는 솜씨가 물 흐르듯 자연스러웠다.
“이미 익숙한지라.”
사티나는 공손히 고개를 숙였다.
공작저의 노집사는 모습을 감추기 위해 어두운 로브를 뒤집어쓴 채였다. 팔이 없다는 걸 드러내지 않기 위해 의수를 꼈다.
상인으로 위장할 셈이었던 건지 그 옆엔 낡은 바구니 하나가 놓여 있었다. 정체 모를 잡초와 붉은 열매 같은 것들이 마차의 진동에 맞춰 흔들렸다.
“그보다, 정말 이걸로 리페리우스 공작까지 함께 처리할 수 있는 건가?”
찻물로 입술을 축인 백작이 물었다.
“그렇습니다.”
낮은 울림을 가진 목소리가 이어졌다.
“말씀하신 대로, 황녀는 배 위에서 처리하십시오. 남부 바다 한가운데가 황녀의 무덤이 되어야 할 겁니다.”
“이번에야말로.”
“예. 시체조차 찾지 못하게 말입니다.”
노집사의 형형한 눈동자를 바라보며 프레이 백작이 숨을 들이켰다.
“테베트 리페리우스 공작이,”
덜컹! 마차가 한 번 흔들렸다.
“그 황녀를 구하기 위해 대륙을 벗어날 거라 보는가?”
사티나는 입술을 부드럽게 휘어 올렸다.
“황녀를 쫓든, 쫓지 않든.”
“…….”
“어느 쪽이든 그분껜 파멸일 겁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