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6화
어느 쪽이든 파멸이라는 말.
프레이 백작은 모처럼 만족스러운 이야기를 들은 기분이었다.
“리페리우스의 저주라……. 그런 비밀을 지금까지 숨겨 오다니, 참으로 대단하지 않은가? 레밀턴 가문도.”
비웃음이 가득한 어조였으나 사티나는 그저 부드럽게 웃을 뿐이었다.
프레이 백작이 꼿꼿이 허리를 세우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차갑기 그지없는 조소가 여인의 정수리에 꽂혔다.
“가주를 배신한 가신이라니. 수치를 모르는군.”
미처 참지 못한 웃음이 사티나로부터 흘러나왔다.
“재미있는 말씀을 하십니다, 백작님.”
그녀는 눈썹을 찡그리며 덧붙였다.
“리페리우스를 배신한 건 가주님이십니다. 저는 리페리우스를 통해 살아가는 자. 그 고결한 천칭을 어떻게든 지키려는 것뿐입니다.”
“허울은 좋군.”
명백한 비난의 어조에도 사티나는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마차는 빠르게 시내를 가로질렀다.
사티나는 흘끔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느덧 목적지가 가까워져 있었다.
“그보다 황녀가 이끌고 간 보급 부대는 문제없으신지요?”
“예상대로 젤킨스 자작이 따라붙었다더군. 가는 길에 젤킨스 자작과 황녀의 호위를 모두 처리할 거다.”
손발이 잘린 에슬린은 반항하지 못하고 항구로 끌려가게 될 것이다.
사티나가 찻잔을 기울이는 백작을 보며 설핏 미간을 구겼다.
“하지만 그 황녀는 눈치가 좋습니다. 이미 보급 부대의 정체를 눈치챘을지도 모릅니다.”
가볍게 코웃음 친 건 백작이었다.
“아무리 눈치챘더라도, 황녀가 마법이라도 부리지 않는 이상 뭘 할 수 있지?”
“…….”
“황녀의 기사는 고작해야 십수 명. 카르단 전하의 자객은 그 열 배인데 말이야.”
게다가 그들 모두 제국에서 난다 긴다 하는 숙련된 암살자들이었다. 그들은 카르단이 가진 유일한 패이기도 했다.
“그렇군요.”
사티나가 짧게 대꾸했다.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녀가 다시 입을 연 건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백작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
“절 남부로 보내 주십시오.”
백작이 이유를 물었다.
사티나는 테베트의 최후를 지켜보고 싶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곧 사람을 보내지.”
프레이 백작이 퉁퉁, 마차 벽을 두드렸다. 시내에 접어든 마차가 천천히 속도를 늦추었다.
사티나가 낡은 바구니를 집어 들었다. 몸을 일으키려는 집사를 향해 프레이 백작이 물었다.
“그러고 보니 리페리우스의 차기 가주는 어쩔 셈이지?”
“그건 걱정하지 마십시오.”
“걱정하지 말라?”
“리페리우스의 선대 가주님께서는 가장 리페리우스다운 분이셨으니까요.”
뜬금없는 말이었다. 프레이 백작이 미간을 좁히자, 사티나의 입매가 더욱 깊게 팼다.
“전 가주님께서 리페리우스의 명맥을 위해 많은 걸 남기고 가셨으니 염려 놓으시라는 말입니다.”
“무슨……?”
“부끄럽지만 지금 가주님께선, 어린 시절 조금 미덥지 못한 부분이 있으셨죠. 선대께선 이렇게 될 걸 예측하고 계셨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
프레이 백작은 자기도 모르게 헛웃음을 내뱉었다. 사티나가 의미심장한 얼굴로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마차를 나섰다.
노인이 털푸덕, 바닥에 무릎을 굽히고 절했다.
“백작님의 은혜에 감사드립니다!”
길을 지나던 사람들이 프레이 백작가의 문장과 노인을 보며 쑥덕거렸다. 약초가 든 바구니가 옆에 놓인 걸 보니, 백작이 늘 그렇듯 가난한 상인의 물건을 사 온정을 베푼 모양이었다.
마차가 멀어졌다.
노인은 한참 동안 자리에서 일어서지 못했다.
“감사합니다…….”
마차가 사라진 자리를 보며 사티나가 재차 중얼거렸다. 사그라드는 목소리와 다르게 눈빛은 매섭기 그지없었다.
리페리우스를 지킬 것이다.
무슨 일을 해서라도.
그것이 자신의 임무이자 숙명이다.
전장으로 떠나던 테베트의 모습이 떠올랐다.
어릴 땐 꽃 같은 분이었는데.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입 닫고, 눈 감은 채 그저 자라라는 대로 자라던 분이.
‘실패작.’
뜨거운 눈물이 얼굴의 굴곡을 타고 흘렀다.
의수를 끼워 넣은 팔이 욱신거렸다.
알고 있다.
잘려 나간 팔처럼, 이젠 모든 게 돌이킬 수 없었다.
* * *
황궁을 떠난 행렬은 빠른 속도로 수도를 벗어났다.
적당한 장소가 나오면 마법사들이 이동 마법진을 펼칠 예정이었다. 순간 이동 마법이 가능한 수석 마법사는 한정되어 있었다.
마력 소모 또한 극심한 것이라, 그들이 마력을 회복할 동안은 불가피하게 말이나 마차를 타야 했다.
“짐은 모두 실었어?”
에슬린이 물었다. 마차 창가에 턱을 괸 로하르트가 대충 대꾸했다.
“그래.”
“알아보라고 한 건?”
그가 성의 없는 손길로 품 안을 뒤져 서류 뭉치를 꺼내 내밀었다.
에슬린이 그것들을 넘겨 보았다.
보급 부대의 명단과 기사들의 프로필이 든 서류였다.
“예상대로 보급 부대의 명단이 바뀌었어. 기사든, 짐꾼이든 할 것 없이 교묘하게. 겉으로 보기엔 전혀 문제없어 보이지.”
“하나하나 공들여 신분 세탁을 했다는 거네.”
로하르트가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는 도중에서 끊겨 있었다.
“시간이 없어서 다 파헤치진 못했지만 중요한 건 이거야.”
연한 청록색 눈동자에 날카로운 이채가 스쳤다.
“뒷골목 암살 길드가 지금 텅 비었다는 거.”
“…….”
“무슨 단체 임무라도 나간 것처럼.”
에슬린은 서류 더미를 돌려주었다.
암살자가 섞여 있다는 사실을 확인했으니 됐다. 그들이 누구인지 조사하는 건 에슬린의 역할이 아니었다.
“암살 길드들의 잔당 처리는?”
“걱정 마. 흔적조차 남기지 않았으니까.”
에슬린의 입꼬리가 느리게 올라갔다.
“그럼 여기에 있는 놈들만 처리하면, 제국 암살 길드는 씨가 마른단 소리네.”
살짝 접힌 눈매엔 포식을 앞둔 자 특유의 느긋함과 오만함이 매달려 있었다.
그 미소를 바라보던 로하르트가 짧게 조소했다.
“잘난 척하지 마. 그건 바꿔 말하면, 전국의 모든 암살자들이 지금도 네 머리통만 노리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니까.”
“맞는 말이야. 하지만…….”
에슬린은 턱을 모로 기울였다.
“조심해야 할 건 네 머리통도 마찬가지 같은데.”
“뭔 소리야.”
“내가 프레이 백작이라면 내 주변부터 없앨 것 같거든.”
철저한 고립.
백작이 원하는 그림은 그런 것일 터다.
멀쩡한 사람의 목을 자르는 것보단 손발이 잘린 사람의 목을 치는 게 더 수월할 테니까.
하지만 백작은 모르고 있었다.
에슬린은 진작부터 남부로 갈 준비를 해 왔다. 회의장에선 충분히 당황한 모습을 보여 주었으니, 지금쯤 기습에 성공한 것이라 착각하고 있겠지.
‘크세로이츠 황자가 죽었다는 소식은 갑작스럽긴 했어.’
에슬린은 놀랐던 당시를 회상했다.
“그보다 내가 지금 신경 쓰이는 건 하나야.”
“뭔데?”
“프레이 백작이 왜 이런 거친 방법을 썼는지.”
“당연히 널 황궁 밖으로 끌어내기 위해서겠지.”
심드렁한 로하르트의 대꾸에 에슬린은 고개를 내저었다.
“날 황궁 밖으로 끌어내려면 다른 방법도 있었어.”
프레이 백작은 크세로이츠가 적이 될지도 모른다고 경계하던 인물이었다.
그런 그들을 굳이 이런 식으로 자극하다니. 무모하다 못해 극단적으로까지 느껴지는 방법이다.
‘설마 다른 이유가 있나?’
입 안을 깨물며 생각에 잠겨 있자 로하르트가 피식 웃었다.
“백작은 남부에 크세로이츠의 침략선이 숨어 있다는 걸 몰랐어. 말로는 그들을 경계해야 한다고 했지만, 사실은 무시하는 쪽에 더 가까웠을 거고.”
예전 에슬린이 타국인을 노예로 부리지 못하도록 하는 법을 밀어붙였을 때, 가장 반대한 건 프레이 백작이었다.
타국인을 위해 굳이 우리 제국이 나설 필요가 없다는 게 이유였다.
“그런 걸까.”
에슬린은 창문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마차의 흔들림에 맞춰 먹색 커튼이 들썩였다. 유리창 너머로 회색빛 풍경이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보다 크세로이츠인들이 잠잠한 게 더 이상하지 않아?”
로하르트가 물었다.
“뭐가?”
“침략선이 있잖아. 황자가 죽었으니 당장이라도 덤벼들 줄 알았는데.”
“아, 그거.”
에슬린이 느리게 대꾸했다.
“왜겠어.”
로하르트가 가느스름하게 눈매를 좁혔다.
“무슨 소리야?”
“전하.”
그때 마차가 멈추었다. 작은 노크 소리가 이어졌다.
“이곳에서 마법사들이 이동 마법진을 그린다고 합니다.”
기사의 말에 에슬린이 자리를 정리했다.
로하르트를 스치듯 지나가던 그녀가 별안간 몸을 붙였다. 비밀스러운 속삭임이 귓가에 내려앉았다.
“안 죽었으니까.”
달칵, 문이 닫혔다.
“뭐……?”
마차에 홀로 남은 그는 멍하게 그 의미를 곱씹었다.
“자작님, 내리셔야 합니다.”
기사의 재촉에 로하르트가 억지로 몸을 움직였다. 지면에 발이 닿자마자 눈으로 에슬린부터 좇았다.
그녀는 멀리서 기사들과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
로하르트는 홀린 듯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안 죽었다고?
그녀의 옆얼굴을 응시하는 눈동자가 축축하게 번들거렸다.
대체 언제부터 알고 있었던 거지.
알면서도 숨긴 이유는?
그럼 이 남부행의 목적은 뭔데? 협상? 수습?
그는 우뚝 걸음을 멈추었다.
“하하…….”
헛숨인지 헛웃음인지 모를 것이 무방비하게 터졌다.
큰일 났네. 또 저 뒤꽁무니만 쫓고 있잖아.
잊었던 감각이 목뼈를 타고 흘렀다. 굳어 있던 피가 돌고 심장이 박동하는 이 느낌. 살아 있다는 감각.
넌 남부에서 뭘 할 작정이야?
“하긴, 네 옆에 있으면 늘 재미는 있었지…….”
로하르트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었다.
에슬린의 꿈이 곧 제 꿈이던 시절.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며 불가능해 보이던 목표들을 해치워 나가며 느꼈던 고양감, 전율, 황홀경.
하루하루가 축제의 첫날 같던 날들이 떠올랐다.
“……역시 만나는 게 아니었어.”
억지로 밀어 두었던 감정이 그를 치받았다. 로하르트는 양손을 꽉 움켜쥐었다.
견고히 쌓아 올린 벽에 거미줄 같은 균열이 생겼으나 그는 알고 싶지 않았다.
여정이 어느 정도 무르익었을 무렵, 에슬린은 제롬과 독대했다.
병사들이 막사를 차리는 틈을 타 조금 떨어진 곳으로 그를 불러냈다.
“전하, 부르셨습니까?”
하루가 다르게 날씨는 온화해져 가고 있었다.
봄이 오기 때문인 건지, 남부가 가까워져 오기 때문인 건지, 아니면 둘 다인 건지 구분이 어려웠다.
“경은 리페리우스 공작을 곁에서 얼마나 보좌했지?”
에슬린이 물었다. 제롬은 충직한 얼굴로 대답했다.
“각하께서 첫 전쟁에 나서실 때부터니, 꽤 오래됐습니다.”
“그렇군.”
에슬린은 잠시 침묵하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깎아지른 듯한 아래는 해가 들지 않아 그저 어둡고 컴컴했다.
“그럼 혹시, 리페리우스의 비밀에 대해 알아?”
“예?”
제롬이 번쩍 고개를 치켜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