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화
“비밀이요? 각하의 비밀?”
갑작스러운 말에 그는 조금 당황한 기색이었다.
“글쎄요. 저한테 그런 걸 말씀하실 분은 아니라…….”
모르는 척인 걸까?
에슬린은 그를 뚫어져라 살폈다.
하지만 제롬은 거짓말에 능숙한 이가 아니었다. 기사가 거칠게 제 뒤통수를 긁었다.
“근데 뭐 비밀이야, 누구나 하나쯤은 가진 법 아니겠습니까?”
음, 모르는군.
에슬린은 부드럽게 웃었다.
“내가 괜한 걸 물었나 봐, 제롬 경.”
“……?”
“잊어 줘.”
제롬은 고개를 갸웃했으나, 에슬린은 더 덧붙이지 않았다.
미지근한 바람을 맞으며 서 있던 에슬린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슬슬 짐을 옮겨 놔. 곧 남부 갈림길이니.”
제롬의 눈동자가 번쩍 빛났다.
“아, 넵. 알겠습니다.”
그는 결연한 얼굴로 멀어졌다.
홀로 남은 에슬린은 까마득한 아래를 응시했다. 검고 깊은 골짜기. 그 아래에 숨겨진 것은 무엇일까.
에슬린은 귓가를 만지작거렸다. 단단한 보석의 감촉이 느껴졌다.
‘그러니 에시, 약속을 지켜줘요. 제가 돌아올 때까지, 이곳에 안전하게 있어 주기로.’
그는 절박했다. 그 말을 할 땐 위태로워 보이기까지 했다.
그래서 결국 에슬린은 말하지 못했다.
자신이 남부로 가게 될 확률에 대해서. 크세로이츠의 침략선에 대해서.
남부 이야기를 꺼내기만 해도 무섭게 표정을 굳히는 남자였다. 이 이상 걱정을 더할 순 없었다.
다만 에슬린은 빌었다.
남부에 크세로이츠의 침략선이 없기를. 젝스가 그 존재를 확인하지 못하기를.
제가 테베트의 부탁을 저버리지 않게 되기를.
하지만 결국 일은 가장 염려하는 방향으로 뻗어 나갔다.
‘그런데 테베트 경은 왜 남부 문제에 예민할까.’
마차에 실려 이동하던 중 갑자기 든 생각이었다.
잘 생각해 보면, 그건 아주 오래된 문제였다.
남부에 열병도 전쟁도 없던 시절, 그러니까 에슬린이 죽기 전부터 그는 유독 남부 일에 예민하게 굴었다.
‘특히 타국 일과 관련되면 더 그랬지.’
에슬린은 의문스러웠다.
‘리페리우스의 비밀.’
그 단어가 떠오른 건 우연이었다.
그가 말하지 못한 비밀은 무엇일까?
그를 망설이게 만드는 것. 오래 보좌한 제롬조차 금시초문으로 여기는 것.
그 정도의 기밀이라면 리페리우스의 근본과 관련된 것일지도 몰랐다.
“그렇다는 건 결단코 좋은 것일 리 없다는 뜻이겠지…….”
에슬린은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만약 내 남부행이 테베트 경에게 다른 의미가 있는 거라면.’
눈빛이 어둡게 가라앉았다.
지금 벼랑 끝에 선 사람은 과연 누구일까?
* * *
테베트는 빈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갈증이 심했다.
“…….”
그는 짧게 웃었다.
얼굴 근육은 굳어 움직이지 않았으므로 그저 헛숨을 내뱉은 것에 불과했다.
이 감각은 오랜만이었다.
온몸의 피가 건조하게 메마른 느낌.
비어 버린 두 손을 아득히 응시하는 습관.
에슬린을 떠난 지 며칠이나 되었다고.
‘아무래도 버릇이 잘못 든 것 같은데…….’
그는 멍하게 생각했다.
에슬린은 너무나 상냥한 주인이었다. 만약 그녀가 조련사였다면 그는 에슬린의 유일한 오점이 되었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성배를 가져와요.’
그녀의 명령도 잊은 채 시도 때도 없이 돌아가고 싶어지는 건 말이 안 될 테니까.
착! 뜨거운 피가 그의 뺨을 때렸다.
“각하! 왜 멍해 계십니까!”
누군가 소리쳤다.
테베트는 가볍게 검을 휘둘러 달려드는 마물 무리를 베어 냈다.
하늘은 검보랏빛으로 물들어 있었다.
농도 짙은 어둠이 연기처럼 지면을 뒤덮었다. 마물들이 내뿜는 독기에 몇몇 병사들이 눈이 벌게진 채 쓰러졌다.
테베트는 서둘러 포털의 핵을 찾았다.
말라비틀어진 수목. 육식 동물의 발톱에 긁힌 듯한 대지. 그 위를 밟고 선 기사들. 사방에서 터져 나오는 붉은 피. 마물의 것인지 인간의 것인지 모를 괴성들.
익숙한 지옥이었다.
하지만 그는 이 지옥이 새삼 낯설게 느껴졌다.
피식 웃음이 터졌다.
‘정말 버릇을 잘못 들였지.’
그는 습관처럼 검을 휘둘렀다. 군더더기 없는 동작 하나에 마물들이 우수수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붉은 눈동자에 억눌려 있던 살기가 휘돌았다.
“각하! 포털 안쪽입니다!”
부하가 외쳤다. 테베트는 망설이지 않고 포털에 손을 넣어 핵을 끄집어냈다.
치이익, 독기에 장갑이 녹고 손이 타들어 갔으나 고통은 느껴지지 않았다.
파지직! 검을 꽂아 그것을 부수었다.
검은 포털은 빠르게 사그라들었다.
“더 옵니다!”
허공을 가득 메운 암흑 구체들.
수십 개의 포털이 마치 검은 동공처럼 테베트와 기사들을 응시하고 있었다.
어둠을 내뿜는 괴물들이 마구잡이로 튀어나왔다.
다시 피, 피, 피.
테베트는 비릿하게 웃었다.
정말 당신이 이 광경을 보지 않아서 다행이야.
지면을 박찼다. 쏟아지는 독기를 견디며 그는 검을 휘둘렀다.
그러니 당신은 그곳에서, 부디 무사히.
“이곳은 안 돼.”
테베트가 중얼거렸다.
에슬린이 남부에 닿는다면 영영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그건 예언에 가까운 직감 같은 것이었다.
목줄 찬 개는 집을 떠나는 주인을 지킬 수 없다.
‘소중한 사람을 지키지 못하는 건 이제 지긋지긋해.’
그래서 남부는 그에게 최전선이자 가장 깊은 지옥이었다.
촤악! 은빛 칼날이 허공을 갈랐다.
피 분수와 함께 묵직한 덩어리들이 비처럼 쏟아졌다.
‘당신을 또다시 놓칠 바엔…….’
공작저의 별채는 닫지 않았다. 가구도, 장식도, 식기 하나, 종이 한 장까지.
모두 에슬린이 머물던 그대로 두었다. 마치 누군가의 귀환을 기다리는 것처럼.
비어 버린 손은 견딜 수 없다.
그렇다면 차라리 그냥 소유해 버릴 순 없을까.
인내심은 진작 한계에 달해 있었다.
* * *
“포털이 이렇게 불규칙적인 건 처음 봅니다.”
디에리안이 중얼거렸다. 그가 탄 말이 거칠게 투레질을 했다.
테베트는 디에리안을 잠시 응시하다 다시 지면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은 높은 지대에 서서 아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일차적으로 발생한 포털은 어느 정도 정리를 마친 상태였다.
“이렇게 갑작스러운 개전이라니.”
대규모 결계를 펼친 여파인지 마법사의 눈 밑이 퀭했다.
개전은 예상보다 빨랐다.
하지만 테베트는 동요하지 않았다. 그의 지휘 아래 군사들은 빠르게 진영을 갖추고 전장에 뛰어들었다.
수가 많았을 뿐, 지능이 높은 놈들은 아니었다.
큰 변수만 없다면 다음 포털 또한 수월히 처리할 수 있을 터였다.
“성배가 보이지 않는군.”
“그러게 말입니다. 분명 가장 먼저 튀어나올 줄 알았더니.”
디에리안이 혀를 찼다. 탐지 마법을 극한으로 펼쳐 흑마법사의 기척을 읽었다.
별다른 소득은 없었다.
포털이 열리자마자 나타나리라 예상했던 것과는 영 딴판이었다.
“여러모로 기분이 더럽군요. 포털이 빨리 나타난 것도 그렇고, 이렇게 많은 수가 한꺼번에 생겼다 사라지는 것도…… 지금까지와는 양상이 달라요.”
“뭐가 됐든 빨리 끝내야 해.”
테베트가 검을 움켜쥐었다.
흑마법사든 성배든 마물이든, 그에겐 모두 같은 적일 뿐이었다. 개전이 앞당겨지는 건 오히려 환영이었다.
에슬린에게 돌아갈 시점이 당겨지는 것이었으니까.
‘빨리, 빨리 돌아가야 해.’
바람에 피비린내가 섞였다. 알 수 없는 두근거림이 온몸을 울렸다.
“뭘 그렇게 초조하게 구는 겁니까?”
디에리안이 물었으나 테베트는 쉽사리 답하지 못했다.
그러게. 뭐가 이렇게 초조한 거지.
“흑마법사가 어느 포털에서 기어 나올지 모를 일입니다. 단순한 전쟁이 아니니, 급하게 생각해 봤자 의미가 없어요.”
“그 흑마법사가 왜 아직도 등장을 안 하는 거냐는 거야.”
“……그놈 속내까지 제가 어떻게 압니까? 확실한 건 지금 포털의 변수와 관련이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변수?”
“네. 어디에 포털이 발생할지 정확한 예측이 어려워요. 혹시 몰라 결계의 범위를 최대한으로 넓혀 놓긴 했습니다만…….”
“설마.”
테베트가 흉흉한 얼굴로 디에리안을 바라보았다.
“수도까지 포털이 열린다는 말은 아니겠지?”
“미쳤습니까!”
디에리안은 꽥 소리쳤다.
“아무리 지금 대마법사가 머저리라도, 그것까지 놓칠 일은 없을 겁니다.”
“…….”
“일단 제 스승께 연락을 넣어 두었으니 조금만 기다려……”
“각하!”
저 멀리서 다급한 부름이 들렸다.
심장은 이제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처럼 뛰고 있었다.
아, 제발.
테베트는 자기도 모르게 속으로 빌었다. 불쑥불쑥 크기를 키워 오는 부관을 보며 그는 고삐를 말아 쥐었다.
저렇게 오는 소식 중 좋았던 게 있었던가?
“수도에서 소식이 왔습니다!”
테베트가 이를 악다물었다.
피비린내가 더욱 짙어졌다. 바람에 실려 오는 건 줄 알았는데 이제 보니 제게서 나는 피 냄새였다. 이건 정말 좋지 않아.
입 안이 바짝 말랐다.
검보랏빛 하늘이 조롱하듯 제 어깨를 짓누르는 것만 같았다.
“황녀님께서 남부로 향하고 계신다고 합니다!”
아비규환 속, 이어지는 소식은 그보다 더 끔찍한 것이었다.
* * *
어두운 밤, 일은 은밀하게 일어났다.
푹! 가슴을 가르는 칼날은 정확했다.
“……윽!”
기사가 바닥으로 쓰러졌다.
“황녀의 기사도 별 볼 일 없군.”
남자가 경련하는 몸을 깊은 구덩이에 처박았다. 단도를 한 번 털자, 기름진 피가 후드득 튀었다.
“이걸로 절반인가?”
남자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갔다.
“망을 보라고 했을 텐데.”
“어차피 아무도 안 와.”
감시자는 입매에 기다란 상처가 있는 자였다. 에슬린의 마차 호위로 위장한 자이기도 했다.
그가 고개를 빼고 구덩이에 떨어진 시체를 확인했다. 어두워 잘 보이진 않았으나 이 정도로 피를 흘렸으니 살아남진 못할 것이었다.
“하나씩 빼돌려 죽이니 황녀도 눈치 못 채는군. 하긴, 딱 봐도 연약해 보이는 계집이던데.”
“눈치챘어도 어쩌지 못하는 거겠지.”
“크흐흐, 수상한 기색을 보이면 콱 죽여 버릴까?”
“가는 길에 죽이는 건 안 돼. 남부 항구로 데려가라던 카르단 전하의 말씀을 잊었나?”
입가에 난 상처를 씰룩이며 웃던 감시자가 뚝 표정을 굳혔다.
“무슨 상관이야? 이 험한 행렬에…… 불의의 사고쯤은 불가피한 거 아닌가?”
“쓸데없는 짓은 허락하지 않는다.”
“이거 참. 같은 끄나풀 주제에 눈이 무섭군.”
감시자가 퉤! 침을 내뱉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단도를 쥔 남자는 표정 하나 찡그리지 않았다. 생기조차 느껴지지 않은 검은 눈.
‘묘하게 기분 나쁜 눈이란 말이지.’
암살자는 흐린 눈을 떨떠름하게 바라보았다. 마치 감정 하나 없는 인형을 보는 느낌이다.
“아무튼 다음 이동 땐 젤킨스 자작까지 마무리하는 건가? 웬만하면 나한테 양보해. 찔러 보고 싶거든, 그 잘난 낯짝.”
남자는 대꾸하지 않았다. 감시자는 재미없다며 욕설을 내뱉곤 막사로 복귀했다.
저 멀리 무언가를 지시하는 황녀가 보였다. 그녀를 훔쳐보는 눈빛에 숨길 수 없는 살의가 일렁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