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작해 볼까
이 분위기면 제대로 된 대답을 할 때까지 추궁당할 것 같다.
방법이 있긴 한데··· 이걸 말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
우선 혼자 생각을 좀 정리해야겠다.
“아아, 잠깐. 나 갑자기 너무 피곤하다. 구조되자마자 무리했나 봐.”
나는 머리를 짚고 눈을 감으며 앓는 소리를 냈다.
최지수가 벌떡 일어났다.
“그래! 내가 그럴 줄 알았어. 한 달 동안 그 고생을 해놓고 멀쩡한 게 말이
안 되지. 내가 그냥 쉬라고 했잖아. 지금이라도 빨리 들어가!”
“그래야 겠다.”
“던전에서 제대로 잠도 못 잤지? 뒷정리는 내가 할 테니까 푹 쉬어.”
최지수가 나를 일으켜 세워 방으로 부축했다.
사실상 부축 당하는 척 내 다리로 걷는 거였다.
뜬금없는 발연기였지만 상황이 상황인지라 쉽게 먹혀든 것 같다.
“으으··· 힘들다···.”
“나오지 말고 푹 자!”
“으··· 그래···.”
철컥.
끝까지 앓는 소리를 내던 나는 문이 닫히자 마자 몸을 바로 세웠다.
쉴 틈 없이 얘기하던 지수가 사라지자 이제야 실감이 난다.
내가 집으로 돌아온 이 순간이 꿈이 아닌 진짜 현실이라는 사실이.
인제 와서 돌아보니 지난 50년이 마치 꿈처럼 느껴진다.
던전 안에서의 한 달 동안 환각이라도 본 게 아닌가 싶지만···.
‘그렇지 않다는 증거가 너무나 많지.’
나는 두 손을 내려다보았다.
특별한 점 하나 없이 평범하기만 한 몸.
겉보기에는 과거보다 좀 탄탄해진 느낌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이 피부 아래쪽의 뼈와 근육 조직, 관절 등의 모든 구성은, 인간을 초
월한 힘을 낼 수 있는 최적의 모양을 갖추고 있다.
이세계 생활에서 얻은 것 중 손에 꼽히게 마음에 드는 것이다.
물론 온몸이 뒤틀리며 완전히 다시 태어나는 과정은 굉장히 고통스러웠지만.
스르르르.
푸른 빛의 마나가 예기를 뿜으며 두 손을 한 번 휘감고 사라졌다.
‘그대로군.’
지구로 넘어오는 과정에서, 조금의 마나 손실도 생기지 않았다.
F급 헌터로 살아가던 시절에는 꿈도 못 꿔봤던 수준의 힘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다.
그러나, 큰 감흥은 없었다.
강함은 행복의 척도가 아니었다.
이세계에서 나는 누구보다 강했지만, 누구보다 불행했다.
그저 자신을 지킬 수 있는 어느 정도의 힘만 있으면 충분하다.
뭐, 더 강하다고 안 좋을 건 전혀 없지만.
그리고 지금 이 상황이 꿈이 아니라는 또 하나의 증거.
이세계에서의 전투 끝에 얻은 최종 보상.
‘게이트 오픈.’
내 명령에 따라 눈 앞의 공간이 일그러진다.
허공에 사람의 크고 흰 타원이 생겨났다.
지구와는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뿜어져 나온다.
나는 망설임 없이 안으로 발을 내디뎠다.
게이트 너머는 칠흑같이 어두워 눈에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딱!
손가락을 부딪치자, 눈앞에 야구공만 한 빛 덩어리가 나타났다.
불이 켜지자 나를 둘러싼 암벽과 천장이 드러난다.
사실, 불빛이 꼭 필요한 건 아니다.
이곳에서 나는 굳이 눈으로 보지 않고 느낌만으로도 길을 찾을 수 있으니까.
그래도 따지자면 눈으로 보는 게 조금 더 편하다.
이곳은 동굴형 던전.
내가 조난되었던 바로 그곳이다.
나는 지구에서 이 던전을 거쳐 이세계로 갔었고, 또 이세계에서 이 던전을 거
쳐 지구로 돌아왔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이 던전을 보상으로 얻었다.
오늘 낮, 압구정역에 있던 이 던전은 내가 나오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을
거다.
조사하겠다고 입구를 돌아다니던 사람들이 다 나가는 순간, 내가 그 게이트를
완전히 닫아버렸으니.
‘마침 점심시간이라 타이밍이 좋았지.’
안 그러면 다른 방법을 써서 내보내야 했을 텐데.
눈을 감고 잠시 기운을 느꼈다.
내가 선 자리에서부터 촘촘히 뻗어나가는 기운.
이리저리 복잡하게 얽힌 길이 느껴진다.
가벼운 발걸음으로 안쪽을 향해 걸었다.
굽이굽이 복잡하게 꺾인 데다 이곳저곳 갈림길이 생겨났다가 사라진다.
까딱 잘못하면 길을 잃어 영원히 갇혀버릴 것 같은 복잡한 미로.
그러나 나에게는 집이나 다름없다.
‘옛날에는 거의 입구에서만 깔짝대다 돌아갔던 거였어.’
사실 하급 고블린 영역 안쪽에는 훨씬 더 크고 넓은 공간이 있었다.
그 곳에는 마치 개미굴처럼, 여러개의 백개가 넘는 방과 외부와 연결되는 여
러 개의 출입구가 존재한다.
그 출입구들은 곧 다른 세계로 통하는 게이트였다.
간략히 설명하자면, 내 던전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일반 던전과 다르다.
지구에서 연결되는 던전은 마계(魔界)라고 하는, 지구의 대륙보다 수백 배는
더 넓은 세계로, 온갖 광포한 생물들이 살아가는 곳이다. (아직 던전학자들이
밝혀내진 못했지만.)
내 던전은 그 마계와는 별개의 차원에서 온 것이다.
지구로 통하는 게이트 한 개는 지정되어 있지만, 나머지 게이트들은 내 의지
대로 마계와 연결할 수 있다.
즉, 내 던전은 마계와 지구 사이를 연결하는 통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말.
나는 이 특별한 던전을 내 맘대로 유용하게 사용해볼 생각이다.
안쪽 깊은 곳에 들어가 넓게 트인 공간에 도착했다.
“흠··· 역시 여기가 좋겠지?”
널찍하고 천장도 높은 편이라 동굴인데도 갑갑한 느낌이 전혀 없다.
아무리 봐도 여기가 딱인 것 같다.
나는 이곳에 식당을 차릴 생각이다.
바로 이 던전 안에서, 사냥 중인 헌터들을 대상으로 하는.
식당 홀로 사용할 공간을 천천히 거닐며 구체적으로 구상해보았다.
“보자···. 여기에 카운터를 놓고, 식탁은 세 개? 네 개 정도면 되려나? 그
래···. 혼자 하려면 너무 손님이 너무 많은 것도 별로지. 주방은 그냥 오픈형
으로 하고, 환기는··· 아, 다른 입구 쪽으로 빠져나가도록 바람길을 만들어주
면···.”
혼자 중얼중얼거리다 피식 웃다가 흐뭇하게 고개를 끄덕이기도 했다.
누가 보면 미친 사람인 줄 알겠군.
어느 정도 인테리어를 구상해놓고, 다시 들어왔던 곳으로 되돌아갔다.
게이트를 넘어가자 내 방이 나타났다.
방문은 닫혀있고, 밖은 조용하다.
아직 지수가 잘 시간은 아니니, 내 잠을 방해하지 않으려 신경 쓰는 거겠지.
끼익.
방 한구석의 낡은 침대에 몸을 뉘었다.
몸과 마음이 모두 이완되는 게 느껴진다.
싸구려 침대가 뭐 이리 편한 건지.
나는 잔잔한 미소를 띤 채, 눈을 감고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다음 날 아침, 침대에 눌어붙은 것 같은 몸을 겨우 일으켰다.
“12시간을 잤네.”
50년 만에 진짜 잠을 잔 기분이다.
거실로 나가보니 아무도 없다.
평일이니 최지수는 아침 일찍 나갔을 것이다.
식탁 위에 뭔가 놓여있는 게 보였다.
인스턴트 볶음밥 봉지, 그리고 옆에 쪽지 한장.
[아침은 이걸로 챙겨 먹어. 사실 뭐 만들어보려고 했는데 실패했음 ㅠㅠ 아직
몸 멀쩡한 거 아닐 테니까 괜히 요리하지 말고. 집안일도 하지 마! - 지수]
피식 웃음이 났다.
몸이야 당연히 멀쩡하지만 이런 성의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
그릇에 푸슬푸슬한 상태의 볶음밥을 담아 전자레인지에 돌렸다.
좋은 세상이다.
전자레인지에 몇 초 돌리는 걸로 밥이 짠 나오고.
띠 띠 띠 띠-
다 데워진 볶음밥을 꺼내 먹었다.
맛은 그저 그렇지만 배 채우기에는 적당하다.
맛은 그저 그렇다니, 내가 생각해놓고도 피식 웃음이 났다.
돌아온 지 겨우 하루 지났다고 기준이 조금 올라간 모양이다.
잠은 완전히 다 깼고···.
꺼진 핸드폰을 켜 보았다.
어제 집에 와서 보니 방전되어 있어서 충전시켜 뒀었다.
문자가 몇 개 와 있는 것 같다.
연락 올 곳이 없으니, 스팸이겠지.
띠리리링!
갑자기 핸드폰이 울리며 화면에 모르는 번호가 떴다.
“음···. 어차피 광고 전화일 것 같은데.”
받지 말까 하다가 나열된 숫자가 개인 번호 같기도 해서 받았다.
누가 잘못 전화 건 거면 이 번호 아니라고 말해줄 요량으로.
- 현호 씨! 괜찮아요?
여자 목소리다.
나를 이렇게 걱정해줄 아는 여자는 최지수뿐인데.
“···누구시죠?”
나는 경계하며 되물었다.
모르는 번호로 걸려 온 전화가 내 이름을 부르다니.
보이스피싱이란 의심이 들었기 때문이다.
- 저 이정연이예요. 한 달 전에 같이 사냥 갔었던 헌터! 구조 소식 전해 듣고
연락드렸는데, 무사하신 거죠? 걱정 엄청 했어요. 안 좋은 일 생길까 봐···.
너무 다행이에요.
이정연···.
기억났다. 각성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그 헌터.
솔직히 조금 놀랐다.
물론 던전에 갇히기 직전까지 함께 사냥했지만, 그날 처음 본 사람이었다.
당연히 50년간 한 번도 떠올려본 적도 없었고.
“예. 아무 이상 없고 아주 건강합니다. 아, 구조 신고해주셨죠? 감사해요.”
- 그거야 당연한 거죠! 그때 나가자마자 신고했는데 던전이 불안정하다고 바
로 구조가 힘들다고 해서 진짜 한 달 동안 잠도 제대로 못 잤어요.
기분이 좀 묘했다.
전혀 생각지 못 한 사람이 나를 걱정하고 있었다는 게.
그렇게 걱정해줘서 감사하다, 아니다 살아있어 줘서 더 감사하다 등의 덕담
몇 마디를 주고받았다.
그리고 전화를 끊자마자, 또 한 번 폰이 울렸다.
이번에는 아는 번호다.
“여보세···.”
- 현호 씨!
박 씨 아저씨다.
- 몸은 괜찮은 거야? 어제 나왔다면서!
“네. 괜찮아요. 어제 구조된 것도 맞고요.”
- 괜찮으면 괜찮다고 연락이라도 주지 그랬어!
타박하는 것 같지만, 목소리에는 걱정이 잔뜩 묻어있다.
“죄송해요. 어제는 좀 정신이 없어서. 아무튼 몸에는 아무 문제 없으니 걱정
마세요.”
- 죄송은 무슨! 그냥 걱정돼서 한 말이지. 어쨌거나 진짜 다행이다. 앞으로
일이 잘 풀리려고 액땜 크게 한 모양이야. 정연이도 엄청 걱정했었어.
박 씨 아저씨랑 정연 씨도 그날 처음 만났던 것 같은데.
이름 부르는 걸 보니 그새 친분이 생긴 모양이다.
“연락 벌써 받았어요.”
- 그래? 번호 알려준 지 몇 분 안 됐는데 빠르기도 하지.
아저씨가 알려준 거였구나.
정연 씨랑 끊고 나서야 내 번호를 어떻게 알아낸 건지 궁금해졌는데 이렇게
알게 되었다.
- 지금은 괜찮은 것 같아도 속은 어떨지 몰라. 그러니까 자만하지 말고 병원
가서 정밀 검사도 받아보고. 몸조리 잘 해야 돼.
“네. 그럴게요.”
- 건강이 최우선이라니까. 젊다고 과신하면 큰일 날 수가 있어. 아, 맞다. 그
리고 너 좀 안정되고 나면 셋이 한번 보자.
- 셋이요?
“그래, 셋. 나랑 정연이랑 너랑 이렇게. 그때 멤버들끼리 얼굴 한번 봐야지.
“아아, 알겠어요.”
- 어이쿠, 나 이제 사냥 가봐야겠다. 아무튼간에 건강이 최고라는 거 명심해
야 한다. 명심!
“하하, 네. 아저씨. 끊을게요. 빨리 들어가세요. 누가 부르는 것 같은데.”
- 그래그래. 이만 끊자. 아, 가고 있잖아! 재촉 좀 하지 말라고!
연달아 받은 두 통의 전화.
물론 사고 당시 같이 있긴 했지만 이들이 나를 걱정하고 있을 거라고는 예상
못했다.
이정연은 딱 한 번 봤고, 박 씨 아저씨는 번호는 알아도 사적으로 연락하는
사이는 아니었다.
헌터들의 세계에서 이런 위험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고, 신고한 지 한 달이
나 지났으니 잊을 만도 했는데.
“으차!”
마음 한켠이 뜨뜻해지는 걸 느끼며, 기지개를 켜고 몸을 좀 풀어주었다.
“한번 시작해 볼까.”
놀아서 뭐 하겠나. 뭐 할 것도 없는데.
당장에 작업에 들어가 보기로 했다.
어제와 같이, 방 한쪽 구석에 게이트를 만들어 들어갔다.
내가 향한 곳은 어제 식당으로 꾸미기로 정한 곳이 아닌 다른 방향이었다.
구불구불 휘어진 길을 따라가다 보니 저 멀리서 새어 나오는 빛이 보인다.
가까이 다가갈수록 밝아진다.
마치 방처럼 보이는 막다른 길에 도달했다.
어두컴컴한 동굴의 다른 장소와는 대조적으로, 살짝 눈을 찌푸려야 할 정도로
밝게 빛나는 곳.