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슬라임 (15/125)

      슬라임

대부분의 S급 헌터들은 그걸 이용해 많은 권력과 인기를 누렸다.

그러나 모든 S급 헌터들이 대중에 노출되는 걸 즐기지는 않았다.

성향상 눈에 띄는 것을 싫어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까.

어느 조직에도 소속되지 않은 채 독립적으로 활동하는 S급 헌터들도 있었는

데, 특히나 그들에 대한 정보는 더욱 제한적이었다.

그럼에도 눈에 띄지 않을 수 없는 능력인지라, 소문만큼은 무성했다.

‘아까 그 손님도 그런 부류이려나.’

이 정도로밖에 짐작할 수 없었다.

사실 나는 딱히 S급 헌터에게 관심을 가지지 않았다.

진짜 관심이 없어서라기보다 의식적으로 알고싶지 않아했다.

박탈감 때문이었다.

차라리 일반인이었다면 연예인 보듯 봤겠지만, 같은 분야의 가장 밑바닥에서

위를 올려다보는 건 타격이 상당히 커서···.

때문에 각성 이후 새로 등장한 헌터들에 대해서는 거의 모른다.

‘뭐, 이제 와서 굳이 알아야 할 것도 아니긴 하지.’

잘 먹고 계산 잘 하고 갔음 그걸로 된 거 아닌가.

S급이건 뭐건 상관없다.

“웡! 웡!”

작게 나를 부르는 베로의 소리.

불러놓고 뭐하냐는 의미의 짖음인 것 같다.

베로는 어느새 원래의 안정적인 상태로 돌아와 살랑살랑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베로야, 이거 봐라?”

나는 아까 여자에게서 받은 A급 마석을 베로에게 보여주었다.

베로가 마석을 향해 고개를 쭉 내밀었다.

“멸치국수 세 개 팔고 번 거야. 세상에 나만큼 멸치국수를 비싸게 판 사람은

없을걸?”

신이 나서 베로에게 주절거렸다.

이걸 지수한테 말할 수도 없고, 자랑할 상대가 베로밖에 없다.

“아니, 내 요리가 얼마나 맛있었으면 이렇게까지 더 얹어서 계산하냔 말이야.

그렇지? 대단하지?”

베로는 내 말을 귀 기울여 듣는 듯했다.

그리고···.

와앙-

크게 입을 벌리고 마석과 내 손을 함께 덥석 물려고 하는 게 아닌가.

“이크!”

나는 급하게 손을 빼 들었다.

다시 한번 입을 들이미는 베로를 다른 손으로 저지했다.

‘···깜빡했다.’

몬스터들이 마석을 좋아한다는 걸.

조금 전부터 내가 자꾸 얼굴 앞에 들이밀어서 자기한테 주는 거로 착각한 것

같다.

저급 마석에는 관심 없는 녀석이라서 얘도 마석을 좋아한다는 걸 완전히 까먹

었다.

“···미안하다. 이건 네 거 아니야. 대신 다른 맛있는 거 줄게.”

“우우우우-!”

베로가 서글프게 우는 소리를 냈다.

서러운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는 녀석.

한순간에 마석을 줬다 뺐는 나쁜 주인 꼴이 되어버렸다.

나는 베로의 기분을 풀기 위해 내가 먹으려고 큰맘 먹고 사놨던 한우 등심까

지 녀석에게 넘겨야 했다.

* * *

다음 날 아침.

오늘도 역시 던전 식당으로 출근했다.

“오늘은··· 문을 열기 전에 그거부터 해결해야겠지.”

바로 설거지 및 잡일 문제.

어제 생각해본 결과, 나는 아무래도 요리에만 집중하는 게 맞는 것 같다.

식당을 하는 게 내 새로운 꿈이었던 것은 맞다.

다만, 내가 하고 싶었던 일이 식당 운영 전체가 아니었던 거다.

요리를 만들고 사람들이 맛있게 먹는 걸 보고 그 대가로 돈을 버는 것!

이게 내가 하고 싶었던 거지, 그 외 잡다한 일들은 애초에 머릿속에 들어있지

도 않았다.

하면 할수록 하기가 싫어져서 빠른 대책이 필요했다.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가장 단순한 방안은 직원을 고용하는 거겠지만···

현실적으로 좀 무리가 있다.

일반적인 식당에서는 이게 당연한 건데, 내 식당은 아무래도 특수한 경우니까.

돈을 떠나서 내 던전에 대해 많은 걸 오픈해야 하는데, 누굴 믿고 그런 짓을

할 수 있겠는가.

‘안 되지, 안 돼.’

적어도 헌터 관리국에서 먼저 이 식당을 찾기 전까지는 안 된다.

이 신뢰에 대한 부분을 신경 쓰지 않으려면, 가족인 최지수를 알바로 쓰면 된다.

하지만 이것도 아직은 이른 것 같다.

아직도 종종 내가 몰래 사냥 나가는 거 아닌가 의심하는 애다.

설득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릴 거고, 무엇보다도 아직 학기 중이니 공부가 더

중요하다.

따라서, 나는 지금 아예 다른 방법을 시도해보려 한다.

‘이게 잘 되려나 모르겠네.’

고개를 갸웃하며 걸음을 옮겼다.

이론적으로는 가능할 것 같은데 또 직접 해봐야 알 것 같다.

내가 도착한 곳은 던전 깊은 곳에 있는 어느 넓은 방.

미약한 생명의 기운을 따라 도착한 곳이다.

“라이트.”

캄캄한 어둠 속에서 불빛이 생기자 던전 안이 소란스러워졌다.

“삐이-!”

“삐이! 삐삐!”

“삐이이잇!”

놀란 듯한 고음의 소리들.

눈앞에 드러난 공간에는, 거대한 호빵 같은 모양의 슬라임들이 가득 차 있었다.

꾸물꾸물거리며 빛을 피해 구석으로 숨어들고 있다.

계속 어둠 속에서 생활했던 터라 갑작스러운 불빛이 조금 충격인 모양이다.

“좀 약하게 켜줄 걸 그랬나.”

이렇게까지 놀랄 줄은 몰랐단 말이다.

옹기종기 모인 반투명한 푸른색의 슬라임들이 콩알만 한 두 눈들을 꼭 감고

있다.

구석에서 오들오들 떠는 놈들도 있는 것 같다.

아무래도 어느 세계에서나 미물 취급받는 약한 녀석들이다.

이런 별거 아닌 작은 변화에도 예민하게 반응하는 게 당연하겠지.

나는 잠시동안 녀석들의 반응을 관찰했다.

대부분의 슬라임들은 얼마 지나지 않아 제각각 흩어졌다.

놈들은 마치 물방울처럼 꾸물거리며 서로 하나로 합쳐졌다가 다시 둘로 나누

어지기도 했다.

은근히 신기해서 그 모습을 구경하고 있자니, 3마리의 슬라임이 나에게 다가

왔다.

혹시나 하는 생각으로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키며 질문해 보았다.

“너희 나 알아?”

“삐··· 삐이···.”

“삐이이이···.”

“삐잇···!”

가냘픈 소리로 대답한다.

호의로 가득한 눈동자들이다.

확실이 알 수 있었다.

이 녀석들은 이해하고 있는 거다.

내가 이 던전의 주인이고, 이들이 한 공간을 차지하고 사는 것을 허용해줬다

는 것을.

세 마리의 슬라임이 혹은 통통 튀면서 내 주위를 맴돌았다.

아마도 감사의 의미를 표현하고 싶은 거겠지.

이 셋 이외의 나머지 대부분의 슬라임들은 자기들끼리 흐느적거리며 땅이나

벽을 기어다닐 뿐이었다.

각자 행동하는 게 다른 걸 보니, 의외로 슬라임들도 성격이나 지능 차이가 있

는 것 같다.

개체성이 거의 없을 줄 알았는데 좀 의외였다.

‘그렇다면, 이왕이면 똑똑한 놈들로 골라야겠지.’

내 주변을 맴돌며 아는 척하는 슬라임들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너희 셋은 날 따라와 봐. 뭐 좀 시킬 게 있거든.”

선택받은 슬라임들이 머리끝을 옆으로 휘며 눈을 깜빡거린다.

머리와 몸이 따로 있는 놈들은 아니니, 저 정도가 고개를 갸웃하는 동작인가

보다.

“내 가게에 일손이 필요해서 그래. 뭐, 싫으면 다른 슬라임이 하면 되니까 안

따라와도 되고.”

어깨를 으쓱하며 이야기하자, 세 슬라임들은 의아해하면서도 순순히 내 뒤를

졸졸 따라왔다.

나는 바로 옆의 빈 동굴 방으로 이동한 뒤, 슬라임들을 일렬로 서게 했다.

내 계획은 사람이 아니라 이 슬라임들을 잡일을 처리할 직원으로 쓰는 것이다.

이 물렁거리는 놈들이 얼마나 일을 잘할지는 미지수지만.

“자, 앞에 나란히 서 봐. 간격을 좀 띄우고!”

슬라임들이 내 지시에 따라 흩어져 자리를 잡았다.

나는 녀석들에게 동시에 마나를 주입하기 시작했다.

젤리에 열을 가한 것처럼, 통실한 호빵같은 슬라임들이 점점 끈끈한 액체처럼

녹아내렸다.

얼마 지나지 않아, 슬라임들은 던전 바닥에 고인 물웅덩이처럼 되었다.

형태가 좀 바뀐 것뿐 죽은 건 아니다.

웅덩이 하나에 슬라임들의 눈알 2쌍이 보인다.

어리둥절한지 그저 눈을 깜빡깜빡하며 나를 쳐다보고 있다.

“피이이···.”

입으로 보이는 것이 뻐끔거리는데 바람 빠진 것 같은 소리가 난다.

“좀만 기다려 봐. 내가 새 모습으로 태어나게 해줄 테니까.”

“피이이이이···.”

또 한번 마나를 불어넣었다.

이번엔 납작하게 녹았던 슬라임이 치덕치덕 위로 솟아오른다.

내 허벅지쯤의 높이로 솟아오른 푸른 젤리가 이제 꿈틀거리며 갈라진다.

아래에서부터 갈라지며 다리가 생겨나고 팔과 머리의 모양도 나타난다.

즉, 점차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어 가는 중인 것이다.

처음에는 머리, 몸, 팔, 다리만 있는 대충 만든 찰흙 덩어리 같은 모양이었다.

거기서 내가 조금 더 섬세한 모양이 되도록 마나로 길을 만들어주었고, 슬라

임은 본능적으로 내 마나를 따라 몸을 변형시켰다.

팔 끝부분이 갈라지며 다섯 손가락이 생겨났고, 발은···.

“흠··· 발가락은 생략하자.”

불필요한 디테일까지 살릴 필요는 없지.

이렇게 해서 내 눈앞에 슬라임 인간이 탄생했다.

꼭 푸르고 투명한 젤리로 만든 인간 모형처럼 보인다.

동그란 얼굴에는 기존에 가지고 있던 콩알만한 눈이 콕콕 박혀있다.

현재로서는 진짜 사람을 구하는 것보다 던전 내부에서 해결하는 게 나을 것

같아서 선택한 방법이다.

물렁물렁한 몸체를 가진 슬라임의 특성을 이용해본 거다.

진짜 될지 확신은 없었는데 생각보다 괜찮은 형태가 되었다.

물론 겉보기에만 인간 모양일 뿐이고, 내용물은 흐물텅한 슬라임 그대로다.

슬라임 인간은 자기 몸이 신기한지 새로 생긴 두 손을 이리저리 구경하고 있다.

나는 그 옆에서 똑같은 작업을 두 번 더 반복했다.

그렇게 해서 완성한 것은 내 허벅지까지 오는 키의 슬라임 인간 셋.

세 마리의 슬라임이 세 명의 슬라임 인간이 된 것이다.

“자, 자!”

내 목소리에 세 슬라임 인간이 나를 올려다본다.

올망졸망한 모습이 꽤 귀엽다.

“이제 너희 셋이 힘을 합쳐서 식당일을 돕는 거다.”

“삐이!”

새 몸으로 태어난 슬라임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호빵, 찐빵, 만두. 너희 이름이다.”

생각나는 대로 즉석에서 이름을 지어주었다

슬라임의 원래 모습을 볼 때 저절로 떠오르는 것들이었다.

“해본 적 없는 일이니 처음엔 어려울 거야. 그래도 적응하고 연습하다 보면

할 수 있을 테니 시키는 대로 잘 따라오도록. 하는 거 보고 잘하면 보상도 해

줄 테니까 열심히 해봐.”

“삐이!”

“삐!”

“삐!”

슬라임들이 이 안전한 던전에서 살게 내버려 두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배려다.

솔직히 따로 손대기도 귀찮고 그럴 필요성도 못 느껴서 냅둔 거긴 하지만, 어

쨌든 결과적으로는 은혜를 베푼 거나 마찬가지다.

그러니 주는 것 없이 일만 시켜도 열심히는 할 것 같은데, 그래도 추가적인

목표가 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 덧붙인 말이었다.

“그럼 최대한 빨리 그 몸에 적응하도록 해. 며칠 뒤에 다시 올테니까 그때까지.”

“삐!”

“삐이이!”

대답 후 어설프게 몸을 움직이기 시작하는 슬라임들을 잠깐 보고 통로로 나왔다.

이 흐물거리는 놈들이 얼마나 일을 잘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뭐, 잘 안되면 그때 다른 방법을 찾으면 되는 거니까.

* * *

다음 날 오전, 아침 일찍 집에서 가장 가까운 마트에 나왔다.

오늘 살 건 식당에서 쓸 건 아니고, 집에서 먹을 거다.

시험공부 하느라 거의 폐인이 된 최지수에게 뭐라도 제대로 된 걸 먹일 생각

이다.

거의 일주일 내내 도서관에서 살았다.

학비 아깝다고 열심히 공부하는 게 기특하긴 한데, 자기 몸을 안 챙기는 게

불만이다.

오전에 마지막 시험 치고 집에 바로 오겠다고 하니, 점심으로 보양식이라도

해줄까 싶다.

‘이게 좋아보이네.’

나는 차가운 바람을 맞고 있는, 통통하고 뽀얀 생닭을 집어 들었다.

그때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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