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습
던전 한구석에 자기들끼리만 모여 살던 이 슬라임들은 정말 아무것도 모르는
백지상태나 마찬가지이다.
나는 아주 기초적인 것부터 가르치기 시작했다.
촤륵!
바가지에 시냇물을 퍼서 대야에 담는 시범을 보였다.
그것조차 신기한지 슬라임들의 눈이 조금 커졌다.
“이렇게 물을 담는 게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야. 너희가 이 바가지 하나를
혼자 들기가 힘들 것 같으니 둘이 힘을 합치는 게 낫겠네. 호빵이랑 찐빵이,
둘이 같이 한 번 해봐.”
“삐이!”
“삐이이!”
의욕 넘치게 대답한 두 슬라임이 몸에 비해 통통한 팔을 내밀었다.
바가지를 내미니 총 네 개의 손이 손잡이를 함께 잡는다.
호빵이와 찐빵이는 낑낑대며 흐르는 시냇물을 퍼서 대야에 담았다.
촤악!
물이 절반 정도는 대야 밖에 쏟아졌다.
뭐가 뿌듯한 건지 두 슬라임이 당당하게 어깨를 펴고 칭찬해달라는 눈빛을 보
낸다.
“···일단 넘어가자.”
아무래도 이 부분은 내가 해주는 게 낫겠다.
“자, 이제 그릇을 씻어야 하는데··· 여기 다 앉아 봐.”
내 말에 세 슬라임이 철푸덕 엉덩이를 깔고 둥글게 주저앉았다.
“각자 할 일을 정해줄게. 호빵이는 접시가 흔들리지 않게 잘 잡고 있고, 찐빵
이는 수세미로 접시를 닦고 만두는 접시에 물을 부어서 헹구는 거야.”
“삑!”
알아들었나 보다.
나는 녀석들이 어떻게 하는지 지켜보았다.
이번에는 혼자 맡아야 하는 임무라 그런지 모두 긴장한 기색이 역력하다.
모두 접시와 수세미를 아주 꽉 쥐고 내가 시킨 대로 움직이고 있다.
부들부들 떨릴 정도로 힘주고 있는 게 보인다.
그렇다고 그릇이 깨질 걱정은 없다.
슬라임의 살 자체가 몰랑몰랑하게 충격을 흡수하는 재질이인데다가, 그만한
악력을 가지고 있지도 않을테니.
허벅지 높이도 안 되는 슬라임 인간들이 설거지를 하기 위해 열심히 움직이고
있다.
“푸훗!”
그 모습이 귀엽고 우습기도 해서 살짝 웃었다.
녀석들이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나를 쳐다본다.
뭔가 잘못한 게 아닌가 눈치 보는 거겠지.
최약체로 살아가야 하는 슬라임의 본능일 것이다.
“잘했어. 그렇게 계속하면 되는 거야.”
“삐익!”
“삐이이이이!”
칭찬하자 그제야 안심해서 크게 대답한다.
‘일’이라는 걸 해본 적 없을 슬라임들이었다.
특히나 안전하기만 한 이 던전 속에서는 먹고 자는 것만이 녀석들이 평생 해
온 활동이겠지.
그렇게 살아가기만 하는 것보다는 이런 사소한 일이라도 도맡아 하는 게 더
낫지 않을까?
특히나 이놈들은 다른 슬라임보다 지능이 높으니 이렇게 사는 게 더 잘 맞을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내가 슬라임이라는 종의 속성을 다 파악할 수 없으니 이것도 추측일 뿐
이지만.
“좀 느려도 되니까 깨끗하게만 해. 힘들면 쉬었다 해도 되니까 너무 눈치 보
지 말고.”
“삐이이!”
“삐익!”
“삐이잇!”
맡겨달라는 듯 힘차게 대답하는 슬라임들이었다.
* * *
한성 길드의 A급 헌터 고영한.
오늘 그는 평소와 달리 조금 긴장한 상태였다.
평소 하지 않는 특별한 직무를 맡았기 때문이다.
바로 새로 들어온 신입 길드원들을 이끌고 던전 실습을 가게 된 것.
원래 다른 담당 헌터가 있었으나,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며칠간 부재중이어서
일이 그에게까지 넘어오게 되었다.
“난 이런 일에 진짜 안 맞는다는 거 너도 알잖아. 차라리 그냥 싸우는 게 낫지.”
한숨을 내쉬며 고영한이 입을 열었다.
유희진이 재밌다는 듯 키득키득 웃으며 대답했다.
“알지. 그래도 지금 상황에선 어쩔 수가 없어. 하필 오늘 한가한 게 너밖에
없는데 어떻게 하겠어?”
“후우···.”
고영한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턱수염이 덥수룩한 터프한 외모에 말수도 굉장히 적은 편이었다.
때문에 길드 내에서 입이 무겁고 묵묵히 자기 일에만 집중하는, 믿음직한 사
람으로 평가받고 있었다.
사실 그의 입이 무거운 이유는 의외로 쑥스러움을 타는 성격 때문이기도 했
고, 스스로 말주변에 자신이 없어서이기도 했다.
그나마 친한 유희진과 있을 때는 농담을 던지기도 하지만, 친하지 않다고 생
각되는 사람들과는 잘 어울리지 않는 편이었다.
유희진이 보호구를 착용하며 장난처럼 물었다.
“오늘 신입들 데리고 나가는 거지? 준비는 좀 했어? 뭐, 특별히 준비할 것도
없긴 하지만.”
“대충··· 커리큘럼은 준비했지. 이걸 입 밖으로 잘 내뱉을 수 있을지는 또 다
른 문제지만.”
“에이, 왜 또 자신이 없어! 어차피 실전은 말이 아니라 행동으로 보여주면 되
는 거니까 너무 부담 가지지 마!”
“그게 나한테 그렇게 쉬운 일이···.”
“화이팅! 난 먼저 가야겠다!”
이 상황이 그저 재밌는지 유희진은 싱글싱글 웃으며 떠나버렸다.
‘후···. 가보자.’
가볍게 목을 까딱인 고영한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S급 던전 사냥 보조보다 오늘이 더 긴장되는 것 같다.
약속 장소에 도착한 그가 만난 건 4명의 신입 헌터였다.
“자, 그···. 저는 오늘의 실습을 이끌게 된 고영한이라고 합니다.”
고영한이 어색하게 입을 열자 헌터들이 초롱초롱한 눈으로 그를 주목했다.
그들은 대체로 어린 나이였으며, 그중 두 명은 각성한 지 아직 한 달도 안 된
초짜 중의 초짜였다.
의지에 불타는 신입들의 자세는 칭찬할 만 하지만, 그들이 고영한을 주목할수
록 고영한은 부담스러워질 뿐이었다.
고영한은 헌터들의 눈길을 살짝 피하며 말했다.
“···오늘 우리가 들어갈 던전은 D급 오우거 던전입니다. 한성 길드 구역의 일
반 던전으로 신입들이 들어오면 항상 실습 장소로 활용하는 곳입니다. 우리는
그곳에서 이론적으로만 배웠던 한성 길드의 사냥 전술을 직접 연습할 겁니다.”
잘 듣고 있음을 어필하기 위해 네 신입 헌터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뒤이어 설명을 추가하려던 고영한이 이내 입을 다물었다.
아무래도 이런 건 적성에 안 맞다.
그냥 자기 스타일대로 하는 게 최선인 것 같다.
고영한이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그냥··· 들어가죠. 예. 직접 부딪치면서 배우는 게 제일 좋겠네요.”
“옙!”
“열심히 하겠습니다!”
그렇게 다섯 헌터는 함께 D급 던전 게이트로 진입했다.
* * *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답이 나오지 않는 의문이 고영한의 머릿속을 가득 채우고 있었다.
분명 초반에는 순조로웠다.
오우거 한 무리를 발견했고, 신입 헌터들이 가장 기초적인 전술로 가뿐하게
해치웠다.
실전이 아닌 실전 연습인 만큼 이 D급 던전은 신입들의 각성 등급에 비하면
한 두 단계는 낮았다.
약간 실수하는 정도는 A급 고영한이 혼자서 가뿐하게 커버할 수 있는 수준이
라는 의미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오우거는 인간을 피해 숨는 몬스터가 아니었다.
오히려 인간이 던전에 들어가면 그들도 인간을 공격하려 다가오는 경우가 많
았다.
그런데 처음 발견했던 한 무리 이후로, 오우거들이 더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
이다.
‘그걸 알아챘을 때 나갔어야 했는데.’
만만하게 생각했던 D급 던전이었기에 놈들을 찾아내려 더 안쪽으로 들어오고
야 말았다.
그 결과···.
“선배님! 저, 저런 게 원래 나오는 게 맞아요···?”
“이, 이제 어떻게 해야 하죠, 선배님?”
“······.”
애써 떨리는 목소리를 숨기며 질문하는 신입 헌터들.
고영한은 아무 대답도 해줄 수 없었다.
‘왜 여기에 저런 게···! 겨우 D급 던전일 뿐인데!’
그의 눈길이 향한 곳에는 몸집이 큰 고영한의 두 배는 될 정도의 골렘들이 벽
처럼 서 있었다.
골렘은 B급 던전에서나 나오는 몬스터.
이곳에서 저렇게 많은 골렘들이 나타나는 일이 일어나서는 안 되는 거였다.
잘 모르는 비각성자 중에는 A급 헌터라면 당연히 B급 던전을 클리어할 수 있
을 거라 여기는 사람도 있었다.
현실은 전혀 그렇지 않았다.
1대 1이라면 A급 헌터가 B급 몬스터를 사냥할 수 있지만, B급 몬스터가 둘 이
상만 되어도 A급 헌터에게 버거울 수 있다.
그렇기에 항상 파티를 맺어 다니는 거였고.
‘지금 신입들이···.’
B급 1명에 C급 3명.
C급은 지금 도움이 될 수가 없고, B급 헌터는 각성한 지 한 달밖에 안 됐다.
각성 등급이 B급인 경우도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정보를 얻자마자 바로 스카
웃했던 것이다.
즉, 여기서 골렘을 상대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고영한뿐이었다.
제일 앞쪽에 서 있는 것만 8마리.
뒤쪽에도 여러 마리가 더 있는 걸로 보인다.
이 놈들올 홀로 이기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도망치는 것만이 살길이었다.
그러나 이놈들이 전술이라도 짠 건지 우연인지, 하필이면 뒤쪽에서 나타난 것
이다.
게이트로 향하는 방향을 틈 없이 막고 있어서 도망치기도 요원한 상황이었다.
“뒤로 물러서 있어. 내가 어떻게든 길을 뚫어볼 테니까 틈이 보이면 달려! 뒤
돌아보지 말고 무조건 게이트 밖으로! 그게 안 되면 아예 기척을 죽이고 바깥
쪽으로 빙 돌아나가!”
“선배님은요?!”
“······.”
고영한는 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희생을 각오하고 있었다.
운이 나쁘고 뭐고 변명할 것도 없이 결국은 판단 미스였고 자기 책임이 있었다.
자신은 어떻게 되어도 관계없지만 신입 헌터들은 어떻게든 살려보내야 했다.
콰콰콰쾅!
골렘과 고영한이 맞붙었다.
C급 헌터가 버프 마법을 걸어주고, B급 헌터가 화염 마법을 날렸으나 큰 도움
은 되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덩치가 커서 골렘 여러 마리가 고영한을 동시에 공격할 수
는 없다는 점 하나였다.
쿠웅!
몇 번의 격전 끝에 골렘 한 마리가 쓰러졌다.
그 모습에 신입 헌터들의 얼굴이 조금 밝아졌다.
이런 기세면 무사히 나갈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희망은 빠르게 꺾였다.
“허억. 허억.”
네 마리째 골렘을 쓰러트린 고영한이 힘겹게 숨을 몰아쉬었다.
그러나 뒤쪽에 골렘들이 더 있다는 것만 확인했을 뿐, 도망갈 틈 같은 건 보
이지 않았다.
“크윽.”
고영한은 빠르게 포션을 마시고 경련이 나는 팔뚝을 움켜쥐었다.
몸이 점점 한계에 다다르고 있다. 이제 남은 포션도 없다.
후우우웅!
골렘 한 마리가 크게 손을 휘둘렀다.
거대한 주먹이 정확히 신입 헌터들을 향했다.
기척을 숨긴 채 꼼짝도 않고 있던 그들을 발견한 것이다.
고영한의 몸이 본능적으로 튀어 나갔다.
콰아앙!
두 손을 들어 간신히 골렘의 손을 멈췄으나, 충격이 너무 컸다.
게다가 골렘은 손을 뒤로 물리지 않고 오히려 고영한에게 더 힘을 가했다.
온몸의 근육이 불거졌다.
우지지직.
“크으으윽!”
팔과 어깨에 뭔가 이상이 생겼는지 통증이 심각하다.
안 그래도 지금까지 무리한 상태에서 방금의 충격은 너무 컸던 것이다.
고영한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견뎠으나 결국 골렘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바닥
에 처박혔다.
“안돼···!”
하필 머리부터 떨어졌다.
겨우 고개를 들자 이마에서 흘러내린 핏물이 시야를 붉게 물들였다.
이 정도로 피가 흐르는 거면 분명 두피가 크게 찢어진 것 같다.
고영한은 다시 일어섰지만 이제는 골렘을 쓰러트릴 힘이 없었다.
그 이후는 아수라장이었다.
골렘의 공격을 피하려던 신입들이 하나둘 바닥을 나뒹굴었다.
고영한도 몇 번을 더 바닥에 처박혔다.
이제 정상적으로 일어설 수 있는 헌터는 없었다.
‘도망가야···.’
겨우 정신을 차린 고영한이 쓰러진 상태로 멍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어디로 가야 하는가?
도망칠 길이 없다.
이대로라면 그들은 이 던전에서 죽을 운명이었다.
그때, 기적 같은 일이 일어났다.
그의 눈앞에 새로운 게이트가 나타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