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대로 당했군
눈동자를 뒤덮은 피로 인해 붉은색으로 보이는 게이트.
저곳이 지옥으로 들어가는 문일지라도 지금은 하는 수 없었다.
순간 정신을 다잡은 고영한이 주변 상황을 확인했다.
의식을 잃고 쓰러진 신입 헌터들.
그들과 고영한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그때 가장 가까운 신입 한 명이 살짝 고개를 돌려 고영한을 불렀다.
“선배님···.”
얼굴이 퉁퉁 부어 본래 모습을 알아볼 수가 없다.
“이제 어, 어떻게 해야···.”
“···들어가자. 저 안으로.”
고영한이 쉰 목소리로 나직이 대답했다.
한동안 무자비하게 헌터들을 내리치던 골렘이 지금은 공격을 멈췄다.
모두 쓰러져서 죽은 거라 판단했기 때문일 거다.
사실 고영한도 쓰러진 헌터들이 모두 살아있을 거라 확신할 수 없었다.
지금 구조대가 온다면 천만다행이겠지만, 3일간 야영하며 실습하는 일정이라
적어도 3일 안에는 올 리가 없다.
이곳에 가만히 있으면 정말로 전멸할 것이다.
돌아다니는 골렘에게 짓밟혀 죽거나, 부상이 악화되어 죽거나.
결국 지금으로서는 정체 모를 게이트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 최선이다.
응급조치라도 해야 살 가능성이 생길 테니까.
고영한은 아직 깨어있는 다른 신입 헌터와 함께 천천히 바닥을 기었다.
끊어질 듯한 팔로 온 힘을 다해 정신을 잃은 헌터들을 끌어당기면서.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다섯 명의 헌터가 모두 게이트 안에 들어섰다.
바로 직전, 그들을 발견한 골렘 하나가 쿵쿵거리며 달려왔으나 다행히도 게이
트 안까지 들어오지는 못하는 듯했다.
조금 전까지 깨어있던 이미 신입은 어느새 푹 꼬꾸라져 있었다.
여기로 들어오는 데 모든 힘을 쏟아부었을 테니 당연한 결과였다.
고영한 또한 지칠 대로 지쳐 뭔가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니었다.
이제야 알아챘는데, 그의 발목 한쪽은 90도가 넘게 꺾여있었다.
이대로 방치하면 돌이킬 수 없는 장애로 남게 될 것이다.
‘빨리 치료해야 하는데···. 안쪽도 확인해야··· 다른 몬스터가 나올지도···.’
의식이 점점 가물가물해졌다.
고영한은 결국 고개를 떨구고 기절하고 말았다.
* * *
내 앞에 선 호빵이, 찐빵이, 만두가 오들오들 떨고 있다.
호빵이는 죄를 지은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있고, 찐빵이와 만두는 콩알 같
은 눈을 제대로 뜨지 못하고 꼭 감고 있다.
이유는 바로 슬라임 인간들의 수십 배는 될 거대한 케르베로스 때문이었다.
“어차피 같이 지내야 하니까 빨리빨리 익숙해져야지. 얘들아 너무 겁먹지 마.
너네 안 잡아먹어.”
이 말만 지금 다섯 번째 하는 것 같은데, 슬라임들에게 전혀 먹히는 것 같지
않다.
킁킁.
베로가 만두의 얼굴에 코를 가져다 대고 씰룩거렸다.
“삐이이! 삐이익!”
만두가 기겁하며 소리쳤다.
“베로! 너무 가까이 가지는 말고. 애들이 무서워하잖아.”
“웡! 웡! 웡!”
베로는 억울한지 뒷걸음질 치며 짖어댄다.
어차피 이 던전에서 함께 생활해야 할 애들이다.
사실 지금까지도 같은 던전에 있긴 했지만, 그땐 슬라임들이 방 하나에 고립
되어 살고 있던 거였고.
이제는 계속 직접적으로 마주쳐야만 하는 상황이 되었다.
급이 어마어마하게 차이 나는 녀석들인 만큼 서로 편하게 지내기까지는 시간
이 걸릴 것 같다.
물론 슬라임들이 일방적으로 베로를 두려워하는 거긴 하다.
베로는 의외로 슬라임들을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였다.
뭐, 원래도 베로가 슬라임을 잡아먹을 거란 걱정은 없었다.
가끔 마계에 나가 몬스터를 잡아먹기도 하는 녀석이지만, 슬라임은 고기도 아
니고 먹는다고 영양분을 얻을 수도 없다.
나는 사실 베로가 아예 슬라임들을 무시할 줄 알았다.
그런데 모양이 보통 슬라임과 달라서 그런지 오히려 호감이 있는 듯하다.
아, 아니면 슬라임들에 담긴 내 마나를 느껴서 그러는 걸지도.
“자, 오늘은 여기까지만 하자. 호빵, 찐빵이, 만두, 이제 냇가로 돌아가도 돼.”
“삐이익!”
“삐이이이이!”
“삐잇!”
그 말만을 기다렸는지, 세 슬라임이 쪼르르 달려가 버렸다.
나는 그 뒷모습을 시무룩하게 쳐다보는 베로의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천천히 친해지면 되잖아. 천천히. 그나저나··· 너무 늦네.”
손목시계를 확인했다.
손님들이 처음 게이트로 들어오는 기운을 확인한 지 벌써 40분이 지났다.
게이트에서 식당 홀까지의 거리는 그리 멀지 않다.
통로가 구불구불해서 그렇지, 빠른 속도로 걸어 들어오면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다.
나는 팔짱을 낀 채 투덜거렸다.
“왜 이렇게 입구에서 안 움직이는 거야? 들어올 건지 안 들어올 건지 아직도
결론을 못 내린 건가?”
암만 조심스러워도 그렇지, 너무 미적거리는 거 아니냔 말이다.
“월?”
베로가 나를 올려다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네가 보고 올래?”
“웡!”
그걸 원했던 듯 신나게 소리친 베로가 후다닥 달려갔다.
보내고 나서야 드는 생각이, 아무리 나한테는 귀여워 보여도 명색이 몬스터인
데 괜히 헌터들과 싸움만 나는 거 아닌가 싶었다.
그냥 놀라서 달아나는 정도면 다행인데 괜히 싸움이라도 나면 골치 아플지도···.
싸우는 소리가 들리거나 마나의 흐름이 급격하게 바뀌면 바로 가봐야겠다고
생각하던 그때, 베로가 돌아왔다.
“헥헥헥!”
겨우 그 거리 이동했다고 이렇게 숨차 할 리가 없다.
아무래도 뭔가 불안해 보인다.
베로는 빙글빙글 돌다가 허공에 앞다리를 들고 벽을 긁는 듯한 행동을 취했다.
그리고 픽 쓰러져 죽은 척을 한다.
슬그머니 실눈을 뜨며 내 반응을 살핀다.
내가 알아들은 게 맞나 확인하려는 건가?
나는 볼을 긁으며 베로를 내려다보았다.
나름대로 뭔가 전달하고 싶은 것 같은데
솔직히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이해하긴 어렵다.
뭔가 먹고 싶다, 나가고 싶다 같은 단순한 요구는 직감적으로 알아듣겠지만
이런 건 좀···.
“끼이잉, 끼이잉.”
답답한 듯 우는 소리를 내는 베로.
“무슨 문제가 있긴 한가 보네.”
“끼이잉···.”
“그래. 같이 가 보자.”
그 말에 베로가 벌떡 일어나 앞장섰다.
녀석을 따라 간 끝에 내가 보게 된 것은 정신을 잃고 쓰러진 다섯 명의 헌터들.
게이트에 들어오자마자 기절한 것 같다.
이런 상태니 식당에서 오래 기다린다고 해서 찾아올 리가 없다.
“쯧쯧, 제대로 당했군.”
쓰러진 헌터들은 모두 혀를 찰 수밖에 없는 몰골들이다.
다들 기본적으로 피에 절어있었다.
팔도 부러졌고, 발목이 부러졌고··· 목이 안 꺾인 게 용할 지경이다.
콜록! 콜록!
또 한 명은 정신을 잃은 상태에서도 간헐적으로 기침하며 피를 토해내고 있다.
“그러게, 자기 수준에 맞는 던전에 들어갔어야지.”
“웡웡.”
베로가 동의하는 소리를 냈다.
결코 내가 기대했던 손님들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가 이 헌터들을 그대로 밖으로 쫓아내 버릴 정도로 인정머
리가 없진 않다.
밖으로 나가면 몬스터들에게 찢겨 죽을 것이고, 몬스터가 없더라도 얼마 못
버틸 것으로 보인다.
“웡! 웡!”
나를 올려다보며 또다시 짖는 베로.
눈동자가 그렁그렁한 것이 곧 울 것만 같다.
“그래그래. 너무 걱정할 필요 없어. 우선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 아니다.
이 상태에서 그냥 움직였다가는 부러진 곳이 덧나기만 하겠지.”
“월!”
“우선 집에서 담요라도 챙겨와야겠어···. 다섯 개까지 있을지 모르겠다.”
“웡!”
“포션이 몇 개 있더라···.”
“웡웡.”
착실하게 대답해주는 베로와 함께 나는 던전 안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몽롱했다.
‘나는 죽은 걸까?’
고영한의 비몽사몽 한 머릿속에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돌덩이처럼 무거운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린 눈에 보이는 건 무언가에 열중한 듯한 사람의 옆얼굴.
“누··· 구······.”
제대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는데, 눈앞의 누군가는 용케도 알아들은 듯했다.
“말할 기운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중얼거리는 목소리가 남자인 것 같다.
그는 고영한이 깨어나건 말건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았다.
“여··· 긴···.”
“이봐요. 그쪽 거의 죽을 뻔했어요. 그냥 조용히 치료나 받으시라고요.”
남자가 혀를 찼다.
“다른··· 헌···.”
“다른 헌터들은 응급조치해놨어요. 다 살아있으니까 걱정하지 말고.”
남자가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 순간, 아래쪽에서 끔찍한 소리가 들렸다.
으드드득!
“크헉!”
발목에서 느껴지는 엄청난 통증.
고영한이 제대로 소리도 내지 못하고 숨을 헐떡였다.
“발목 상태가 심각해서 일단 뼈만 맞춰놨어요.”
“···가, 감사···.”
“아니, 대답할 필요 없다니까. 말 더럽게 안 들으시네. 말할 힘 있으면 이거
나 마시든가.”
남자는 고영한의 입에 포션 입구를 과격하게 가져다 대고 기울였다.
왈칵 쏟아지는 포션을 고영한은 얼떨결에 꿀꺽 받아마셨다.
졸음이 몰려왔다.
‘수면 효과가 있는 건가···.’
이거면 일반 체력 포션보다 좀 더 빨리 몸 상태가 좋아질 것이다.
“난 전문가가 아니니까 나가서 제대로 치료받고요.”
고영한이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그러나 입 밖으로 소리가 나오기 전에 눈이 스르륵 감기고 말았다.
* * *
얼마나 지났을까.
고영한이 번쩍 눈을 떴다.
이번에는 정신이 맑았다.
예상치 못했던 골렘들의 등장.
놈들과 싸우다 처참한 몰골로 쓰러졌던 신입 헌터들.
발목의 극심한 통증.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스쳐 지나갔다.
“헉!”
고영한이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우고 두리번거렸다.
“선배님!”
“드디어 깨어나셨어! 정신이 드세요?”
어찌 된 일인지 죽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신입 헌터들이 쌩쌩하게 말을
건다.
얼굴과 옷은 꼬질꼬질하고 머리도 흐트러져 엉망이지만, 표정만큼은 밝았다.
흔들어도 눈 뜨지 못하던 그들이 멀쩡하게 살아있다.
그것도 네 명 모두!
이게 현실이길 간절히 바라며 고영한이 주먹을 들었다.
“선배님?”
퍼억!
“헉!”
“왜 그러세요!”
고영한의 행동에 신입들이 크게 놀랐다.
그가 갑자기 자기 얼굴에 강하게 주먹질을 한 것이었다.
얼굴이 홱 꺾일 정도로 세게 후려쳤다.
다행히도 엄청나게 아팠다.
다소 무식한 방식으로 꿈이 아니라 현실임을 확인한 고영한은 그제야 안도했다.
얼굴의 얼얼한 고통이 이토록 감사하게 느껴질 수 있다니.
“···어떻게 된 일이지?”
고영한은 그제야 표정을 풀고 주변을 둘러보며 물었다.
신입 헌터들이 그릇과 숟가락이 하나씩 들고 있었다.
“어떤 남자분이 저희를 구해주고 치료까지 해주신 것 같아요. ”
“저도 제대로 본 건 아닌데 대화했던 기억이 나요. 먹으라면서 죽을 두고 가
셨어요. 내장까지 충격이 심해서 부드러운 걸 먹어야 할 거래요.”
“선배님, 선배님도 이거 드세요. 아직 따끈따끈합니다.”
고영한은 옆자리의 남자 헌터가 건네는 그릇과 숟가락을 받아들였다.
그러다 번뜩 든 생각에 손바닥으로 그릇 위를 막으며 말했다.
“이런 냄새면 몬스터가 올지도···!”
“한참 동안 이렇게 있었는데, 여기서는 괜찮은 것 같아요.”
커다란 그릇에는 흰쌀로 만든 뜨거운 죽이 담겨있었다.
고소한 냄새가 갑자기 침샘을 자극했다.
꿀꺽.
극도로 피로한 몸이 이제는 음식을 요구하고 있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고영한이 죽을 한술 떠먹었다.
알맞게 간이 되어 있어 싱겁지 않았다.
부드럽게 뭉개진 밥알에서 은근한 단맛까지 났다.
고영한은 밥알 한 톨 남기지 않고 그릇을 달달 긁어 먹었다.
배를 채우고 나니 실감이 났다.
정말 모두가 무사히 살았다는 것을.
이상한 방향으로 90도 이상으로 꺾여있던 왼쪽 발목은 제자리를 찾은 상태였다.
치료가 완전한 건 아니었다.
타박상이나 찰과상 같은 건 그대로였고 당장에 조치하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
을 치명상만 치료되어 있는 것이었다.
이 정도만 해도 돌아가서 힐러와 병원의 치료를 받으면 큰 후유증이 없이 나
을 수 있을 것이다.
정말로 운이 좋았고 정말로 고마운 일이었다.
‘감사합니다···.’
그는 속으로 이름 모를 은인에게 진심 어린 감사 인사를 했다.
던전 밖으로 나가면 반드시 최대한으로 은혜를 갚을 생각이었다.
‘나가면··· 이런.’
그러고 보니 아직 모든 것이 해결된 상태가 아니었다.
이 동굴 밖으로 나가봤자 또 골렘들이 득실득실한 던전인 것이다.
어느 정도 몸은 회복했으나 그렇다고 또 고영한 혼자 열 마리가 넘는 골렘을
상대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B급 신입 헌터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밖에 있던 골렘이 다 사라졌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