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희한하네 (19/125)

      희한하네

“뭐?”

“정신 들고 죽 다 먹고 나서 얼굴만 빼꼼 내밀어봤거든요? 골렘이 단 한 마리

도 없더라고요.”

“그럼 그 사람이···?”

B급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 같아요. 희미하게 들었는데, ‘정신 차리면 안으로 들어가지 말고 바

로 나가’라고 하더라고요. 이미 바깥을 다 정리해놓고 한 말인 것 같아요. 그

리고 아마도··· 이 동굴형 던전 안쪽에는 우리가 감당할 수 없는 게 있을 겁

니다.”

“감당할 수 없는···.”

그럴싸한 생각이었다.

고영한은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렇다면 빨리 나가보는 게 좋겠어. 끝까지 고마운 것밖에 없군. 아, 혹시

일행이 있던가?”

“아뇨. 못 봤어요. 그런데 없을 리가 없죠. 혼자 던전에 들어온다는 것 자체

가 특이한 S급 헌터나 할 수 있는 일인데, D급 던전에 그런 사람이 왜 있었겠

어요? 언뜻 봤지만 유명한 얼굴도 아닌 것 같았고···. 아마 동료들과 잠깐 떨

어져 우리를 보살핀 것 같아요.”

“그렇겠군. 다들 몸은 좀 괜찮나?”

“네. 어느 정도 움직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좋아. 그럼 이만 나가보자.”

“넵!”

고영한은 마음이 조급해졌다.

이렇게 큰 도움을 준 사람은 아마도 어떤 착오로 한성 길드 구역의 게이트에

잘못 들어온 게 분명하다.

그 파티 중 한 명이 이런 호의를 베풀었을 거로 생각한 것이다.

출입 기록이 남아있을지 모르겠지만 빨리 나가서 찾아봐야 했다.

어쩌면 벌써 길드에서 잡아내어 실랑이하고 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은인이 그런 일을 겪게 해서는 안 되지.’

최대한 서둘러 나가 도움받은 것에 대해 알리고, 충분히 갚아야 한다.

그때 주섬주섬 일어나던 C급 헌터 한 명이 갑자기 생각난 듯 고개를 두리번거

렸다.

“어? 내 가방이 어디 갔지?”

“응? 그러고 보니 나도 가방이 안 보이는데.”

모든 헌터들이 등에 짊어지고 있던 배낭이 사라졌다.

고영한 또한 마찬가지로 등이 허전했다.

“여기 있습니다!”

누군가 던전 한쪽 구석 바닥을 가리키며 소리쳤다.

일어선 헌터들이 그곳으로 다가가 각자의 가방을 집어 들었다.

가방을 뒤적이던 신입들이 당황한 듯 말했다.

“어··· 선배님? 제 마석이 모두 사라진 것 같습니다."

“저도···. 아티팩트도 하나 있었는데 없어졌어요.”

고영한의 가방 또한 마찬가지였다.

B급 헌터가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저, 그러고 보니 제가 어렴풋이 들었던 말이 있어요.”

“무슨 말?”

“왜 이렇게 마석을 조금 들고 다니냐고 뭐라 하더라고요. 이왕이면 현금도 좀

챙겨 다니라면서.”

그 말에, 거의 웃는 법이 없는 고영한의 얼굴에 약간의 미소가 떠올랐다.

“다행이네.”

“···다행인 건가요?”

“마석으로 이 은혜를 조금이라도 갚았다는 게 다행인 거지. 물론 목숨을 구한

대가로는 한참 부족하겠지만.”

“하긴 그러네요···.”

C급 헌터가 그 말에 동의하면서도 우울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 또한 갓 각성한 헌터였고, 아직 사냥을 나가본 적이 없으니 제대로 돈을

벌지도 못 했다.

그런 와중에 기껏 준비한 마석과 아티팩트를 잃었으니 자기 딴에는 통탄할 수

밖에 없었다.

그 생각을 읽어낸 고영한이 담담하게 입을 열었다.

“여러분이 잃은 건 내가 개인적으로라도 다 보상할 테니 걱정하지 않아도 됩

니다.”

“네? 정말요?”

“헉. 너무 큰 금액일 것 같은데요? 네 사람분을 합하면···.”

신입 헌터들은 어찌해야 할지 몰라 했지만, 고영한의 기준에서 그건 당연한

생각이었다.

“이런 일을 겪은 건 온전히 저에게 책임이 있습니다. 알아서 처리할 테니 혹

시나 불이익이 있을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됩니다.”

고영한의 말에 분위기가 약간 무거워졌다.

이를 환기하려 B급 헌터가 밝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선배님, 왜 어색하게 갑자기 존댓말을 하세요?”

그 말에 다른 헌터가 동조하며 웃었다.

“그러게요. 편하게 하세요, 아까처럼. 하핫.”

머쓱해진 고영한이 말했다.

“크흠. 아, 아까는 상황이 정신없이 돌아가서···. 그, 이름이 뭐라고 했죠?”

“오재영입니다.”

“저는 배현지라고 합니다!”

헌터들이 다시 한번 자기 이름을 말했다.

이번에는 모두의 이름을 머릿속에 새겨넣었다.

알게 된 지 겨우 몇 시간밖에 되지 않은 사이였다.

그런데 이 신입들이 어쩐지 굉장히 편하게 느껴졌다.

짧은 시간 동안 생사를 넘나드는 경험을 함께 했기 때문일까.

몇 년을 함께한 동료들과도 쉽게 마음을 터놓지 못하는 그였다.

유희진과의 관계가 오히려 예외적이었다.

고영한이 수염을 만지작거리다 입을 열었다.

“흠흠, 그럼 이만··· 나가볼까?”

“네! 돌아가시죠!”

은근히 다시 말을 놓는 그에게 헌터들이 밝게 대답했다.

* * *

“음···.”

헌터들의 가방에서 챙겨온 마석, 아티팩트, 그리고 내가 사용한 힐링 포션의

금액을 계산해보았다.

“얼추 맞아떨어지네.”

적당히 값은 받은 것 같다.

돈 좀 들고 다니라고 뭐라 그랬는데, 안 그래도 될 뻔했다.

내 육체는 웬만한 상처를 자가 치료할 수 있으나, 남의 몸까지 치료할 수 있

는 힐링 마법 쪽은 전혀 내 분야가 아니다.

그래서 전문성 있는 치료라기보다는 음식값으로 받았던 포션을 왕창 때려 붓

고, 어긋난 뼈만 맞춰준 정도였다.

그래도 거의 넝마나 다름없던 자들을 사람 모양으로 적당히 만들어줬으니 나

는 충분히 할 만큼 했다.

‘나가고 있군.’

게이트 앞에 한참이나 머물러있던 기운들이 사라지는 게 느껴졌다.

혹시나 안쪽으로 들어올까봐 바로 나가라고 말했는데, 정신 못차리는 와중에

도 누군가 들은 모양이다.

쿵!

뒤에서 들려오는 둔중한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베로가 발라당 배를 까고 누워있는 거였다.

기분이 좋은지 내 앞에서 등을 비비며 재롱을 떤다.

골렘들이 이 모습을 봤더라면 놀라 까무러쳤을지도 모르겠다.

“다 쫓아 보낸 거 맞지?”

“웡!”

베로가 누운 채로 당당하게 대답했다.

마계의 몬스터들은 서열이 꽤 명확하다.

예외도 있긴 하지만, 대부분은 자신보다 강한 몬스터에게 절대복종한다.

골렘들은 내가 전혀 건드리지 않았다.

나는 게이트 밖에 놈들이 있는 것만 확인하고 들어왔고, 베로가 나가서 호통

을 좀 쳤더니 멀리 도망가 버렸다.

며칠 한산하다가 이후에 다시 원상복구 될 것이다.

던전에는 던전의 규칙이 또 있으니까.

예상은 하고 있었다.

내 던전 게이트로 다친 헌터들이 들어오는 거 말이다.

안전이 보장된 일이 아니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길 수 있지 않을까··· 정도로.

생각보다 상태가 처참하긴 했다.

“이제 시작해볼까?”

나는 마계의 기운을 찾기 시작했다.

색다른 이벤트는 끝났고, 이제 다시 영업을 해야지.

* * *

잠깐 쉬는 시간, 간식으로 사과를 먹던 중이었다.

문득 작은 호기심이 생겼다.

나는 사과 한 개를 챙겨 슬라임들을 찾아갔다.

열심히 그릇을 가지고 낑낑대던 슬라임들이 나를 쳐다본다.

“잠깐 쉬자.”

그 말에 당장에 그릇을 놓고 나에게 달려온다.

셋은 내 앞에 나란히 엉덩이를 깔고 앉았다.

“찐빵아. 이거 먹어볼래?”

나는 간식으로 먹던 사과 한 조각을 찐빵이의 손에 쥐여주었다.

던전 벽의 이끼 같은 걸 먹고 살던데 이런 과일도 잘 먹을지가 궁금했다.

작은 사과 조각을 두 손으로 받아 든 찐빵이가 고개를 갸웃했다.

이게 뭔지를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모양이었다.

“사과라는 과일인데 한 번 먹어 봐. 맛있어.”

찐빵이가 사과 조각을 살짝 입에 넣었다.

옆에 있던 호빵이와 만두의 눈길이 입에 들어가는 사과 조각을 향해 따라 움

직였다.

사과의 절반 정도를 입 안에 넣은 찐빵이가 입을 우물거린다.

샥샥샥샥.

사과 갉아 먹는 소리가 났다.

“아니, 이빨이 없는데 왜 이런 소리가 나지?”

나는 입에 아무것도 없는 호빵이의 입을 살짝 벌려보았다.

역시 이빨 같은 건 없고 입 안쪽도 그냥 물렁물렁한 젤리 같다.

“희한하네, 희한해.”

슬라임의 구강구조에 대한 생각으로 빠져들려는 중에, 호빵이와 만두가 소리

내기 시작했다.

“삐이!”

“삐이이익!”

왜 자기들은 사과를 안 주냐는 거다.

‘그래. 이런 건 공평하게 해줘야지.’

나는 사과를 좀 더 조각내서 호빵이와 만두에게는 양손에 하나씩, 찐빵이에게

는 한 개만 더 주었다.

찐빵이는 자기만 하나를 들고있게 되자 잠시 놀란 듯 보였으나, 곧 본인의 몫

임을 받아들였다.

샥샥샥샥.

나는 야무지게 사과 먹는 슬라임들을 구경했다.

뒤쪽에서 기척이 느껴졌다.

슬쩍 고개를 돌려보니 저 멀리 코너에서 베로가 빼꼼 얼굴을 내밀고 있다.

자기도 여기 와서 어울리고 싶은 것이다.

애들이 무서워하니 근처로 오면 안 된다고 했더니 저기서 몰래 보고 있다.

그 모습이 귀여워서 몰래 웃었다.

대놓고 웃으면 또 삐쳐서 조심해야 한다.

“그거 먹고 마저 일 해야 된다.”

“피이익!”

입 안의 사과 때문에 바람 빠진 소리로 대답하는 슬라임들.

나는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쓸쓸해 보이는 베로와 좀 놀아줘야겠다.

* * *

고영한과 신입 헌터들이 D급 던전에서 수난을 겪은 지 3일이 지났다.

한성 길드 회의실에서, 게이트 관리팀장은 발표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핵심 임원들이 모두 모이기로 한 터라 잔뼈 굵은 그녀도 긴장한 기색이었다.

그때 목발 짚은 남자가 회의실로 들어왔다.

가장 먼저 도착해있던 유희진이 벌떡 일어섰다.

“고영한! 너 진짜 왔어? 그 꼴을 하고?”

“···아무리 그래도 안 올 수가 있나. 내가 사건 당사자인데. 이제 걸을 수 있

으니 당연히 와야지.”

고영한은 다리에는 깁스를, 양팔에도 붕대를 꽁꽁 감은, 누가 봐도 환자인 모

습이었다.

유희진이 기가 막힌 듯 팔짱을 꼈다.

“너 이런다고 누가 반겨줄 줄 알아? 하여간 고지식해 가지고! 지금까지 쉬는

날도 없이 일했는데, 좀 쉰다고 뭐라고 할 사람 없어! 이 멍청아.”

“이 회의만 참석하고 다시 병원에 갈 거야.”

고영한이 무뚝뚝하게 말하며 자리에 앉아 목발을 정리했다.

유희진은 그를 보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진짜 징하다, 징해.”

철컥.

한성길드의 길드장 한성진과 S급 헌터 성민혁이 함께 등장했다.

“오셨어요!”

유희진이 반갑게 일어났다.

“일찍들 왔네. 아직 시간 남았는데.”

한성진이 부드러운 미소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반면, 성민혁은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하품을 했다.

“하암. 회의 시간이 왜 이렇게 일러. 좀 뒤로 잡지.”

“민혁아, 지금 오후 2시야.”

두 사람의 대화가 오가는 중에 고영한은 목발을 다시 집어 들며 일어서려 했다.

길드장 한성진이 그를 향해 손사래를 쳤다.

“아니, 일어나지 마. 앉아있어.”

“그래도 인사를···.”

“아니, 됐으니까 제발 그대로 움직이지 마. 보는 사람이 더 힘드니까.”

제발 소리가 나오고 나서야 고영한이 서는 걸 포기하고 고개만 꾸벅 숙였다.

성민혁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형, 내가 영한이 나올 거라 했지?”

“···그러네. 이번엔 내가 졌어. 그렇게 나오지 말라고 했는데 안 들을 줄은···.”

“고영한 쟤, 덩치만 황소 같은 게 아니라 고집도 황소고집이라니까.”

한성진의 패배 선언에 성민혁이 신나서 말을 이었다.

그 대화에 유희진이 어깨를 들썩이며 키득거렸다.

그들의 말에 공감한다는 의미.

고영한은 할 말이 없어 창밖으로 눈길을 돌려야 했다.

한성 길드의 길드장 한성진, 그리고 한성길드 유일한 S급 헌터 성민혁.

두 사람은 12년 전에 한성 길드를 창립하여 지금껏 키워온 개국공신이자 공동

대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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