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빙수 (20/125)

      빙수

모두가 자리에 앉았다.

“그럼, 지금부터 브리핑 시작하겠습니다.”

게이트 관리팀 팀장이 PPT 화면을 넘기기 시작했다.

팀장은 간결하고도 이해하기 쉽게 설명을 이어 나갔다.

그 자리에 고정된 일반 던전은 주기적으로 환경과 몬스터가 리셋된다.

밖에서 게이트만 볼 때는 던전이 리셋된 건지, 원래 상태 그대로인지 알 수가

없고 오로지 마나 감지기를 통해 판단해야 한다.

던전이 리셋되기 전부터 다음 나타날 던전 특유의 파동 형태가 나타나기 시작

하여 미리 확인하고 대비할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사건의 원인은 바뀌기 전의 오우거 던전과 바뀐 후의 골렘 던전이 놀랍

도록 유사한 파동을 가지고 있었기 때이었다.

“파동의 형태가 95% 이상 일치했습니다. 현재 시스템에서 5%는 오차범위 안에

들기 때문에 별다른 알림이 뜨지 않았던 거고요.”

세세한 부분에 대한 질의응답까지 마친 후, 길드장 한성진이 안경을 치켜올리

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결국 이번 일은 예측할 수 없는, 엄청난 우연으로 재수 없게 걸린 거란 말이

군.”

“재수 없게··· 네, 그것도 맞는 말씀이지요. 이 정도 유사성을 보인 경우는

해외 사례에서도 찾아볼 수 없으니까요.”

팀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길드장이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 일은··· 불가항력이었다고 봐야겠네. 여기서 잘잘못을 따지는 건 불필

요한 낭비에 불과할 것 같군. 그러나.”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왜인지 집중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다.

“있어서는 안 될 일이었고, 앞으로 일어나서도 안 될 일이라는 건 확실하지.

사실 헌터들이 사냥을 나가 다치거나 문제가 생기는 건 안타깝지만 일어날 수

있는 일이야. 몬스터와의 싸움에서 절대적인 안전은 없으니까. 하지만 이번

일은 실제 전투가 아니었어. 신입 헌터 실습은 반드시 안전하게 이뤄져야 해.

한성 길드에 대한 신뢰도를 떨어뜨릴 수도 있는 일이고.”

게이트 관리 팀장과 고영한이 죄지은 사람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 모습을 본 길드장이 부드럽게 웃으며 분위기를 풀었다.

“잘잘못을 따지자는 게 아니라고 했을 텐데. 그보다는 이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는 게 중요하지. 적어도 같은 원인으로는 말이야.”

팀장이 허리를 바로 세우며 대답했다.

“오차값을 좀 더 줄일 수 있도록 연구를 시작하려고 합니다.”

“좋은 생각이네.”

“예산, 일정 좀 더 정리해서 보고서 올리겠습니다.”

“오케이. 그리고···.”

이번에는 그의 시선이 유희진에게로 향했다.

“신입들과는 어떻게 이야기가 됐지?”

“네 명 중에 세 명은 모두 길드에 잔류하기로 결론 내렸어요. C급 헌터 한 명

은 조금 더 고민할 시간을 달라고 했고요.”

“네 명 중 세 명이라··· 의외의 결과인데. 생각보다 이탈이 적잖아?”

“그게···.”

유희진이 힐긋 고영한 쪽으로 눈짓했다.

“그냥 사람을 믿기로 한 것 같더라구요. 어차피 실제 던전에서는 다양한 돌발

상황을 겪게 될 테니까요.”

옆에서 성민혁이 킥킥 웃으며 놀리듯 말했다.

“영한이가 또 후배들이 의지할 만한 타입이긴 하지. 거기서 또 멋있는 모습

보여줬나 보네.”

고영한은 못 들은 척 앞만 보며 같은 자세를 유지했다.

“남은 한 명도 좀 더 설득해봐.”

“그래볼게요.”

유희진이 길드장의 말에 대답했다.

“아, 그리고 도움받았다는 헌터에 대해서는 아직 못 찾은 건가?”

이번에는 고영한이 대답했다.

“아예 게이트에 누군가 더 들어온 흔적이 없었습니다. 원래도 외진 곳인데 하

필이면 그때 근방의 CCTV가 고장 나서 뭐 잡힌 것도 없고. 게다가 그쪽 구역

관리자들은 아무 문제 없었다고 주장하는데,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아요.”

어쩐지 기시감이 느껴지는 상황이었다.

‘전에도 비슷한 일이 있었던 것 같은데···.’

유희진은 잠깐 얼마 전의 일을 떠올렸다가 다시 대화에 집중했다.

이번 일은 S급 던전이 알 수 없는 이유로 클리어되었던 것과는 별개의 일이었다.

그냥 느낌만으로 괜히 연관 지었다가 혼란만 가중될 수도 있다.

“던전에서 다른 사람을 만났다면, 분명 같은 게이트를 통해 들어갔을 텐데,

그걸 못 잡아낸다고? 말이 안 되는데···. 혹시 은신해서 들어간 거려나?”

“그럴 가능성도 있긴 합니다.”

“그 정도로 은신에 능한 헌터는 추릴 수 있을 것 같은데···. 어쨌든 이 건은

확실하게 해결해야 하는 부분이야. 우리 길드 던전을 타인이 마음대로 침범하

게 둬서는 안 되니까.”

고영한의 마음이 조마조마해졌다.

그에게 분명 은인이 맞긴 한데, 길드의 입장에서는 수상한 침입자이기도 했다.

그 사실을 떠올리니 마음이 복잡미묘해졌으나 겉으로 티 내지는 않았다.

“좀 더 알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죄송합니다.”

“그건 됐다니까. 어차피 누가 들어갔어도 그 순간을 위험하다 판단하고 바로

나오지는 못했을 거야. 이런 일은 한 번도 없었으니까.”

“···네.”

한성진이 고개를 푹 숙이며 대답하는 고영한의 어깨를 툭툭 두드려주었다.

“오케이. 그럼 회의는 여기서 마칩시다.”

그 말을 끝으로 회의는 완전히 마무리되었다.

* * *

사각사각사각.

얼음 갈리는 소리가 시원하다.

날이 점점 더 더워지고 있다.

지구와 내 던전은 아예 다른 세계라 계절의 영향을 받지는 않는다.

‘분명 더운 건 아닌데 이상하게 괜히 시원한 걸 먹고 싶다니까.’

그래서 나는 지금 빙수를 만들고 있다.

빙수도 종류가 참 다양하다.

내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르는 빙수는 어린 시절 처음 맛보았던 팥빙수다.

얼음을 갈고, 그 위에 팥과 연유, 후르츠 칵테일, 떡을 올려 먹었던 바로 그

옛날 팥빙수.

달달하고 시원한 맛이 좋아서 빙수를 휘휘 섞어 크게 한술 떠서 입에 넣었다

가 이가 시려 몸서리쳤던 기억이 있다.

그러면서도 너무 맛있어서 결국엔 큰 대접 한 그릇을 다 비웠었다.

‘엄마한테 더 해달라고 졸랐더니 배탈 난다고 혼만 났었지.’

그리운 기억에 입가에 미소가 맺혔다.

요즘은 훨씬 많은 종류의 빙수가 생겼다.

그냥 얼음이 아니라 우유 얼음을 쓰기도 하고, 신기할 정도로 다양한 재료들

이 들어간다.

내가 지금 만드는 것도 그 옛날 팥빙수는 아니다.

사각사각사각.

얼굴보다 훨씬 큰 대접에 얼음 가루가 소복이 담겼다.

사이사이에 연유를 미리 뿌려주었다.

그리고 그 위에 손질해둔 과일을 담아 올리기 시작했다.

수박에, 복숭아에, 망고, 체리, 키위까지···.

밋밋했던 얼음 위에 다채로운 색상이 얹어졌다.

마트에서 눈에 보이는 과일을 다 집어 온 거였다.

무슨 과일을 넣든 실패할 리는 없으니까.

이렇게 과일빙수가 완성되었다.

총 세 그릇.

다섯이서 함께 먹을 생각이다.

혼자 먹는 건 별로 선호하지 않는다.

생각해보면 옛날에는 분명 혼밥도 아무렇지 않게 즐겼던 것 같은데···.

수만 번의 끼니를 혼자 때우고 나니 이제는 그게 지긋지긋해진 것 같다.

이왕이면 누군가와 함께하는 식사가 좋지.

그릇 세 개와 숟가락 4개를 트레이에 담아 옮겼다.

발길이 향한 곳은 설거지 터와 가까운 던전의 작은 방.

가끔 편하게 휴식할 수 있도록 마련해둔 공간, 쉼터다.

바닥에 그냥 앉을 수 있도록 매트를 몇 개 깔고, 방석과 작은 탁자, 심심할

때 읽을 책도 몇 권 가져다 두었다.

보잘것없어 보이지만 앉으면 은근히 아늑하다.

“삐익!”

“삐이이!”

“삐잇!”

오는 길에 슬라임들을 불러 뒤따라오게 했다.

녀석들이 흥미롭게 공간을 구경한다.

나름의 매너가 있는 건지, 아니면 경계하는 건지 손대지는 않고 제자리에서

눈알만 굴리고 있다.

달칵.

커다란 그릇 하나와 숟가락 세 개를 구석자리에 두었다.

“호빵이, 만두, 찐빵이, 너희 셋이 같이 먹어. 과일빙수라고 하는 거야. 여기

숟가락 세 개 있으니까 퍼서 먹고.”

셋은 대답할 정신도 없는지 화려한 색감의 과일빙수를 뚫어지게 쳐다보고 있다.

나는 녀석들과 어느 정도 거리가 있는 내 자리에 앉아 가장 작은 그릇을 탁자

에 올려두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베로! 이리 와!”

약간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베로가 던전 안, 머지않은 곳에 있다는 건 기운으로 알 수 있다.

청각과 후각이 워낙 발달한 녀석이다.

이 정도로만 불러도 충분히 알아듣고 찾아온다.

처벅처벅처벅!

몇 초도 지나지 않아서 둔탁한 발걸음 소리가 짧은 간격으로 들려왔다.

베로가 빠르게 걸어오고 있는 거였다.

입구에서 베로가 빼꼼히 고개를 내밀었다.

“이쪽으로 돌아서 와.”

슬라임들과 가장 거리가 먼 경로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베로가 슬쩍 슬라임들을 쳐다보며 조심스럽게 걸어들어왔다.

혹시나 자기 때문에 또 오들오들 떨까 봐 호기심을 억누르고 최대한 조용히

움직이는 거였다.

털썩!

베로는 당연하다는 듯 내 허벅지에 궁둥이를 붙이고 앉았다.

녀석의 앞에 마지막으로 남은 가장 큰 빙수 그릇을 내려주었다.

슬라임들은 여전히 베로를 두려워한다.

지금 당장은 빙수에 정신이 팔린 것 같지만.

계속 이렇게 서로 신경 쓰면서 살게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이 정도 거리를 지키면서 조금씩 익숙해지도록 할 생각이다.

계속 지내다 보면 언젠가 편해질 수도 있지 않을까.

“먹자, 얘들아.”

···라고 말하며 슬라임들을 보았다.

‘이미 먹고 있잖아.’

호빵이, 찐빵이, 만두는 통통한 맨손으로 얼음이 묻은 과일을 덥석덥석 집어

입에 넣었다.

숟가락은 제자리에 그대로 놓여있다.

어떻게 쓰는 건지 시범이라도 보여줬어야 했던 것 같다.

일단은 이미 손 버렸으니 그대로 둬도 되겠지.

둘러앉아 빙수를 먹으면서 소리를 내는데, 아무래도 자기들끼리 대화를 나누

는 것 같다.

두 손으로 신나게 집어 먹는 걸 보니 확실히 입맛에 맞나 보다.

슬라임들의 식성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파악했다.

우선, 과일뿐만 아니라, 고기, 국물 요리, 유제품, 생선 등등 여러 종류의 음

식을 먹여 봤는데, 아예 먹지 않거나 몸에 이상이 생기는 건 없어 보였다.

다만 얘들도 미각이 확실히 있는지 맛있게 먹는 것과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이 있었다.

아주 단순하게 표현하자면, 애들 입맛에 가까웠다. 야채를 잘 먹는다는 점만

빼고.

달달한 맛을 좋아하고, 매운 건 선호하지 않는 듯했다.

우적우적 씹는 소리에 옆을 보았다.

베로도 맛있는지 얼음에 거의 코를 박아가며 먹고 있다.

분명 육식파고, 맛없는 몬스터 고기 같은 거나 먹는 녀석인데 이런 것도 또

가끔 주면 좋아한다.

알 수 없는 입맛이다.

내 앞의 빙수를 떠서 입에 넣었다.

어렸을 때 그랬던 것처럼 크게 한 숟가락.

얼음과 과일이 숟가락 위에 작은 산처럼 얹어졌다.

여러 달콤한 맛이 섞여 입안을 가득 채운다.

눈이 질끈 감기고, 뒷골이 당길 정도로 차갑다.

한술, 두술 먹으면 먹을수록 시원함이 온몸으로 퍼져나간다.

그 감각은 어릴 적이나 똑같아서, 괜히 돌아오지 않을 옛날 생각이 났다.

괜스레 씁쓸해지려는 중에, 허벅지에 닿은 베로의 궁둥이가 여전히 뜨뜻해서

조금 위안이 되었다.

* * *

오늘도 낚싯줄처럼 던져둔 게이트에 순조롭게 헌터들이 낚였다.

그런데 평소와는 조금 다른 분위기다.

홀에 들어서기도 전부터 시끄럽게 떠드는 소리가 들려온다.

“이게 진짜 있네?”

“신기하죠? 간판 보면서도 믿기지가 않았어요.”

등장한 헌터들은 모두 여섯 명.

크게 긴장하지도, 경계하지도 않고 모두 신기해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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