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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계 구경 (23/125)

      마계 구경

말린 멸치와 서랍에 쟁여둔 말린 레비아탄 가루를 함께 넣고 육수를 끓이기

시작했다.

다른 냄비에도 물을 올리고, 끓기 시작할 때 소면도 한 움큼 크게 집었다.

“흐음···.”

뭔가 조금 아쉬운데.

나는 소면을 조금 더 추가한 다음 끓는 물에 투입했다.

두 개의 냄비가 보글보글 끓는 동안, 국수 위에 올릴 고명을 만들었다.

몇 분 걸리지 않아 국물이 우러나고, 소면이 익었다.

이제 다 되었다

소면을 찰지게 씻고, 모든 것을 한 그릇에 옮겨 담기만 하면 된다.

하지만, 하나 더 할 일이 있지.

달그락.

작은 그릇을 하나 꺼냈다.

고춧가루, 고추장, 간장, 설탕, 식초, 다진 마늘 등을 넣었다.

여기에 육수도 한 숟갈 추가하고 작은 숟가락으로 슥슥 잘 섞어주었다.

간단하게 비빔국수용 양념장을 만든 것이다.

나는 주방 밖으로 얼굴을 내밀고 물었다.

“혹시 비빔국수는 못 드시는 건가요?”

생각에 잠긴 듯 멍하니 있던 여자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 비빔국수요?”

“네. 매운맛을 싫어한다거나···.”

“아뇨. 그런 건 아닙니다.”

“그럼 맛보기로 비빔국수도 서비스로 드릴게요. 이것도 맛있거든요.”

“아, 네···.”

여자는 전혀 생각 못했다는 듯 당황하며 말을 흐렸다.

조금 작은 그릇에 소면을 두 입 정도로 작게 덜고, 양념과 고명을 깔끔하게

담았다.

그리고, 멸치국수 곱빼기와 맛보기 비빔국수를 함께 가져다주었다.

“맛있게 드세요.”

“···감사합니다.”

여자가 조그맣게 대답했다.

싫은 눈치는 아니고 이런 상황이 조금 어색한 듯했다.

쓸데없는 오지랖이었나 싶기도 한데···.

그래도 내 음식을 맛있게 잘 먹는 사람이라, 괜히 다른 맛도 더 보여주고 싶

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건 입맛이 안 맞는다면··· 뭐, 할 수 없지.

여자는 오늘도 홀로 국수를 먹었다.

후루룩.

후룩.

크게 소리 내지 않고 먹는 타입이었지만, 던전이 조용해서 혼자 국수 먹는 소

리만 들렸다.

다른 헌터들은 항상 파티로 무리 지어 다니니 이런 상황은 참 드물었다.

여자는 지난번과 달리, 조금 느리게 맛을 음미하며 먹는 듯했다.

비빔국수는 중간에 먹었는데, 먹고 고개를 끄덕이는 게 보였다.

다행히 입맛에 맞는 것 같았다.

그릇을 깨끗이 비운 여자가 눈을 감고 깊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 상태로 잠깐 있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 가까이 다가와서 입술을 달싹이다가 말했다.

“맛있었습니다. ···둘 다.”

그러면서 꺼내는 게 또 대충 봐도 1급 마석이다.

지난번과 같이 저 마석 하나를 그대로 지불하려는 것이다.

솔직히 탐나긴 하는데, 지나치게 과한 금액이기도 했다.

‘이걸 받아야 하나 말아야 하나···.’

속으로 잠깐 고민하다가 입을 열었다.

“국수는 6만 원입니다. 저번에 1급 마석을 주셨으니 그 가격에서 제하도록 할

게요. 이번에는 계산 안 하셔도 됩니다.”

여자가 무표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닙니다. 받으세요. 직접 받지 않으실 거면, 여기 두고 가겠습니다.”

“예에?”

그러고는 내 손에 건네는 대신 옆의 탁자 위에 마석을 올려둔다.

“저한테는 이 마석 이상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황당해서 할 말을 잃은 사이에, 고갯짓으로 꾸벅 인사하고 휭하니 떠나버린다.

아니, 무슨 국수 하나 가지고 이렇게까지···.

나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마석을 내려다 보았다.

“고집이 세네. 하긴 그러니까 계속 저렇게 혼자 다니는 거겠지만···.”

양심상 꼴랑 국수 한 그릇에 이런 돈을 받기가 좀 뭐해서 거절했었다.

왜 이러는지 살짝 찝찝하기도 하고.

그런데 뭐, 본인에게는 그만한 가치가 있다고 하니···

“받아둬야지, 뭐.”

나는 마석을 챙겨 들었다.

입꼬리가 내 의지를 벗어나 씰룩거린다.

아니, 과한 게 맞긴 한데, 그리고 진심으로 안 받아도 된다고 생각하는데···.

또 막상 돈이 들어오니 좋은 감정과는 살짝 별개일 뿐이다.

‘워낙 못 벌었던 시절이 길어서 그런 건가.’

진지하게 스스로에 대해 고찰하는 중에, 둔탁한 소리가 들려왔다.

처벅처벅처벅.

자리를 피해 있던 베로가 나를 찾아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우웡···?”

요상한 소리를 내면서 식당홀로 들어오는 베로.

눈알만 또르르 굴리며 주변을 확인한다.

“베로. 오늘은 좀 괜찮았나 보네?”

그 모습이 귀여워서 웃으며 말을 걸자 다가오는 걸음이 조금 더 빨라진다.

저번에 아까 그 손님이 왔을 때는 베로가 상당히 겁을 먹었었다.

그런데 오늘은 꼬리가 살짝 아래를 향해있긴 해도, 지난번과 비교하면 훨씬

덜하다.

얼굴도 그렇게 굳어있지는 않다.

“역시, 두 번째 보니까 좀 덜 무섭지?”

“헥헥.”

내 말에 살짝 웃는듯한 얼굴로 꼬리를 살랑살랑 흔든다.

역시 사람이건 몬스터건 두 번, 세 번, 네 번 보다보면 익숙해지는 게 당연하다.

그런데 이 당연한 것이 슬라임과 베로 사이에는 잘 되지 않는 듯했다.

아무래도 같은 몬스터끼리라서 그런 것도 있고, 힘의 격차가 너무 심하게 크

다는 이유도 있는 것 같다.

베로는 슬라임과 가까워지고 싶은데 그게 잘 안돼서 시무룩해한다.

반면, 슬라임들은 베로와 볼 때마다 겁에 질려 얼어버린다.

모두가 이해되고 안타까운 상황이다.

“흠···. 뭔가 특단의 조치가 필요하겠는데.”

문득 예전에 봤던 TV 프로그램이 생각났다.

말썽부리는 반려견을 교육시키는 프로그램.

지수가 애청자라 나도 가끔 봤었다.

가족들 중 한 사람만 유달리 싫어하는 개가 있었다.

훈련사는 그 개가 싫어하던 사람을 의지하고 좋아하도록 만들었었다.

‘그 방법을 이용해 봐야겠군.’

씨익 웃으며 베로를 불렀다.

“우리 호빵이, 찐빵이, 만두한테 가볼래?”

베로의 꼬리가 더 위로 올라가 살랑거린다.

“웡! 웡! 웡!”

아주 좋다는 거다.

“그래, 같이 가자.”

“월!”

내 말에 신이 나서 앞장서서 달려간다.

‘저렇게 좋을까.’

겨우 슬라임에 내 마력을 조금 불어넣은 특이한 개체들일 뿐이다.

물론 이게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던전 보스급인

케르베로스가 저리 좋아하는 것도 희한한 일이다.

개천이 가까워지자 베로의 걸음이 느려진다.

발소리도 작아지고 행동 자체가 조심스러워졌다.

슬라임들이 놀라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하는 것이다.

이 안쓰러운 녀석을 위해서라도 오늘의 작전이 성공해야 할 텐데 말이다.

“삐이이!”

“삐이?”

“삐이이이잇!”

가까이 갈수록 슬라임들의 높은 목소리가 들려온다.

자기들끼리 뭐라 뭐라 쫑알대고 있다.

안쪽을 들여다보니, 호빵이와 찐빵이는 쪼그려 앉아있고 만두는 아예 엎드려

서 다리를 까딱거리고 있다.

옆의 그릇이 깨끗한 걸로 봐서 설거지는 모두 마친 것 같다.

“호빵···.”

“삐이이이이!”

“삐이익!”

“삐이이이잇!”

이름을 다 부르기도 전에 소리를 지르며 벌떡 일어난다.

허둥지둥거리는 것이 당황스러워 보인다.

그래도 그중에서 가장 침착한 편인 호빵이가 앞으로 한걸음 걸어 나와 공손하

게 고개를 숙인다.

“됐어. 다 했으면 편하게 쉬어도 된다니까.”

“삐, 삐이이이···.”

“괜찮아, 괜찮아. 그러지 말고, 우리 다 같이 바깥 구경이나 가볼래?”

“삐이이이?”

“우엉?”

갑작스러운 제안에 세 슬라임과 조금 떨어진 곳에 선 베로가 고개를 갸우뚱한다.

“호빵이, 찐빵이, 만두는 이 동굴에서만 살았을 테니 바깥 구경 제대로 해본

적이 없을 거고, 베로도 혼자 나가는 것보다 이렇게 여럿이 가는 게 더 신날

거 아니야.”

슬라임 인간들의 콩알 같은 눈동자에 호기심이 솟아났다.

베로는 흥분해서 소리 없이 짖으며 빙글빙글 제자리를 돌았다.

“다 동의 한 거네? 그럼 가자, 얘들아!”

나와 베로, 그리고 세 슬라임은 함께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 *

게이트 밖으로 나왔다.

금방이라도 비가 올 듯 우중충한 하늘.

칙칙한 색의 식물들 어딘지 음산한 느낌을 내뿜고 있다.

이곳은 마계, 정확한 지역은··· 모르겠다.

그냥 대충 찍어서 아무 곳으로나 나왔다.

어딜 가든 위험할 건 딱히 없으니 상관없지.

“삐, 삐이이?”

“삐이이잇!”

“삐삐이!”

슬라임들은 진짜 세상에 처음 나와보는 건지 모든 것을 놀라워하며 두리번거

렸다.

그 모습이 재미있어서 잠시 구경하다가 짝, 박수를 치자 모두 나를 쳐다본다.

“호빵이, 찐빵이, 만두. 이런 데 구경 처음 해 보지? 너희 가고 싶은 방향으

로 가 봐. 단, 셋이 손잡고 같이 움직여서. 나랑 베로는 뒤에서 따라갈 테니까.”

내 말에 세 슬라임들이 통통한 손으로 꼬물꼬물 서로 손을 잡는다.

“삐이.”

“삐이이잇”

“삐이익.”

서로 잠시 의논하더니 방향을 잡고 걷기 시작한다.

그 뒤를 베로가 뒤따르고, 나는 베로의 뒤를 따르는 모양이 되었다.

베로에게 살짝 눈짓을 줬는데, 얘가 이 계획을 제대로 이해했을지 모르겠다.

아까 미리 말해둘 걸 그랬나?

‘생각보다 안 무서워하네.’

동굴형인 내 던전과는 아예 다른 야외라 좀 두려워할 줄 알았다.

낯선 곳에 혼자 있게 된 반려견은 불안해하고 두려워하기 마련이다.

그때, 평소 싫어하던 가족 구성원이 나타난다.

그러면 반려견은 얼굴이라도 아는 그 가족에게 의지하게 되고, 그런 방식으로

점차 마음을 연다.

내가 TV에서 봤던, 이 방법을 이용해서 슬라임들이 베로를 의지하게 하려고

했었다.

그런데 이게 제대로 되려나 모르겠다.

이 녀석들이 태생적으로 겁은 많은 주제에 마계를 이렇게 돌아다니는 게 위험

하다는 지식은 없는 것 같다.

“삐이이이!”

“삐이잇!”

“삐이이익!”

자기들끼리 뭔가 신기한 걸 발견한 건지 흥분에 차 소리 지르는 슬라임들.

병아리처럼 삑삑거리는 이 소리가 누군가에게는 귀엽게 들리겠지만, 이 구역

에 사는 몬스터들은 그리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감히 하찮은 미물들이 이곳에서 소란을 떤 것을 괘씸히 여겨 당장에 잡아 죽

이러 찾아오겠지.

‘역시나, 오고 있군.’

무언가 빠른 속도로 다가오고 있다.

곧이어 화를 억누른 듯한 소리가 들려왔다.

“크으으으으.”

우리가 가던 길 바로 앞쪽의 거대한 바위 뒤에서 나타난 것은 미노타우로스

한 마리였다.

소음이 많이 거슬렸는지 두 눈이 아주 시뻘게져 있다.

당장에라도 슬라임들을 터트려 죽일 기세.

그제야 호빵이, 찐빵이, 만두가 놀라 몸을 움츠렸다.

미노타우로스의 몸에서 울룩불룩 근육이 솟아오른다.

공격을 가하기 전, 분노를 한 번 표출하려는 듯 미노타우로스가 고개를 들어

포효하려 했다.

“크으으아아···! 아···?”

그러다 나와 눈이 마주쳤다.

다음은 베로와.

“······.”

분명 포효하기 직전, 기를 모으는 듯한 소리였는데 한순간에 뚝 멈췄다.

멍하니 이쪽을 보던 미노타우로스의 눈에 동공 지진이 일어난다.

갈피를 못 잡던 눈동자가 어느 순간 부자연스럽게 다른 방향으로 향한다.

“크으으우우웅······.”

미노타우로스는 어색한 소리를 내며 슬쩍 몸의 방향을 틀었다.

그리고 마치, 처음부터 여긴 그저 지나가는 길목이었던 것처럼 스르륵 지나쳐

버렸다.

슬라임이나 케르베로스나 나는 아예 보지도 못한 척, 뿔을 벅벅 긁으면서.

그렇게 어느 정도 멀어지자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 버린다.

오들오들 떨던 슬라임들이 하나둘 고개를 들었다.

“삐이?”

“삐이이익?”

“삐이이잇!”

서로 작게 대화를 나누던 녀석들이 웅크렸던 몸을 폈다.

뭔가··· 자세가 아까보다 한층 당당해진 것 같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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