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이유가 뭔데 (24/125)

      이유가 뭔데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비슷한 상황이 몇 번 더 반복되었다.

파스스슷.

풀숲을 헤집고 나타난 리자드맨은 눈을 내리깔고, 다시 풀숲 뒤로 사라졌다.

음침하게 웃으며 흑마법을 쓰려던 리치는, 이미 거의 다 모은 마나를 폭죽인

척 공중에 흩뿌리고 도망쳤다.

호빵이, 찐빵이, 만두의 눈이 점점 휘둥그레졌다.

그러면서 점점 더 걸음걸이에 자신감이 붙는다.

어찌나 어깨를 쫙 펴는지, 내가 만들어줬던 몸보다 10% 정도는 더 커진 것처

럼 보였다.

어이없는 광경에 실소가 터졌다.

‘이런 상황이 될 줄이야.’

이게 바로 호가호위(狐假虎威)인가.

케르베로스의 위세를 등에 업은 슬라임을 보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슬라임들이 이 상황을 제대로 알고 저러는 건 아니겠지만.

슬라임들 입장에서는 진짜 세상에 이게 무슨 일인가 싶을 거다.

자기들이 약하디약한 미물인 줄만 알고 살아왔는데, 막상 동굴 밖으로 나오니

완전히 다른 상황이 펼쳐진다.

무시무시한 괴물들이 나타나서 깜짝 놀랐는데, 공격은커녕 알아서 슬슬 자리

를 피한다.

얼마나 놀랍고 신기하고 뿌듯할까.

소리 죽여 키득키득 웃으며 녀석들의 뒤를 따라갔다.

재미는 있는데, 오늘의 목표는 이룰 수 없을 것 같다.

베로와 슬라임이 가까워지는 건, 또 다른 방법을 생각해봐야겠다.

그렇게 결론을 내리고 이만 던전으로 돌아가려는데···.

“키에에에!”

“킬킬킬킬킬!”

“크르르륵!”

불쾌한 소리를 내며 다가오는 못생긴 몬스터.

고블린들이다.

호빵이, 찐빵이, 만두는 이제 더 이상 웅크리지 않는다.

몇 번의 경험으로 머리끝까지 자신감이 차오른 것이다.

지금까지처럼 고블린도 자기들이 알아서 슬슬 길 거로 생각하겠지.

하지만···.

‘이놈들은 그렇게 똑똑하지 않은데.’

고블린은 지능도 낮고 눈치도 없어서 보는 것만으로 덤빌만한 상대인지 아닌

지 판단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내가 3년간 하급 고블린만 잡아봐서 안다.

그리고 역시나, 사리 분별 못하고 덤벼드는 고블린들.

“키이이이잇!”

“캬아아악!”

깜짝 놀란 호빵이, 찐빵이, 만두가 놀라 비명을 지른다.

그제야 뭔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챈 녀석들이 서로를 껴안고 눈을 꼭 감았다.

이건 좋은 기회다.

그리고 베로도 그걸 깨달은 모양이다.

“크릉···!”

베로가 날렵하게 몸을 던진다.

고블린 한 마리를 물어 던지고, 한 마리는 두툼한 앞발로 후려쳐 저 멀리 날

려버린다.

또 한 마리는 뒷발로 밟아 으깨버렸다.

마지막으로 남은 고블린 한 마리가 뒤늦게 달아나려 하지만 이미 늦었다.

베로는 한 번의 도약으로 가볍게 놈을 따라잡아 단숨에 목을 꺾었다.

그리고 별일 아니라는 듯 머리를 털며 이쪽으로 돌아온다.

“삐이···?”

오들오들 떨며 쫄아있던 슬라임들이 고개를 든다.

두리번거리며 무슨 일인지 파악하고 있다.

슬라임들의 시선이 바닥을 나뒹구는 고블린들을 뒤로하고 늠름하게 걸어오는

베로에게 닿았다.

“삐이이익!”

“삐잇!”

“삐이이이이!”

이제야 무슨 상황이 벌어진 건지 이해한 것 같다.

슬라임들의 올망졸망한 눈동자에 존경과 감동의 빛이 차오른다.

그 시선에 베로의 콧대가 한껏 위로 솟았다.

날카로운 눈빛, 듬직한 덩치.

몸을 곧게 편 베로는 내가 봐도 멋있어 보인다.

‘그런데 꼬리가···.’

표정과 달리 너무 기쁘게 흔들리고 있다.

아무래도 저 부분은 이성으로 제어가 힘든 것 같다.

'어쨌든 이만하면 성공적인 것 같은데?’

생각했던 것과는 조금 다르게 흘러갔지만, 결과적으로 목표는 어느 정도 달성

한 것 같다.

나는 슬라임들의 뒤쪽에서 베로에게 엄지를 척 들어주었다.

* * *

한성 길드의 헌터 휴게실.

음료를 마시거나 의자에 앉아 쉬는 헌터들 사이에, 제 집인 양 편안한 자세로

소파를 차지한 헌터가 있다.

A급 헌터 유희진이었다.

그녀는 지루한 듯, 짧은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리며 멍하니 허공을 보고 있었다.

그때, 어려 보이는 남자가 조심스럽게 휴게실로 들어와 그녀에게 다가왔다.

“저, 선배님, 혹시 바쁘십니까? 전달드릴 게···”

“응. 바빠.”

“헛, 죄송합니다. 나중에 다시···.”

무표정한 대답에 깜짝 놀란 신입 헌터가 고개 숙여 사과했다.

그리고 서둘러 나가려는 그를 유희진이 붙잡았다.

“잠깐, 잠깐. 뭐 이렇게 동작이 빨라? 사실 안 바빠. 다음 일정은 오후 늦게

시작이거든.”

“아, 아아, 네···.”

신입 헌터는 당황한 표정을 애써 감추며 대답했다.

유희진은 그를 보며 재미있다는 듯 웃었다.

이런 유치한 장난이 먹히는 것도 다 한 때다.

조금만 머리가 굵어지면 들은 척도 안 하겠지.

유희진이 상체를 일으켰다.

“이름이 오재영이였지?”

“네.”

“22살이고.”

“맞습니다.”

“B급 화염 마법 계열.”

“···네.”

“내가 맞게 알고 있었네.”

생각보다 자신에 대해 자세히 알고 있는 것에 오재영은 속으로 조금 놀랐다.

이제 막 각성한 그에게 A급 중에서도 꼭대기에 있는 유희진은 상당히 멀게 느

껴지는 인물이었다.

“급한 건 아니지?”

“네. 그냥 정보만 알려드리려고···.”

“그럼 전화로 해도 되는데.”

“아, 그, 그러네요. 하하···.”

오재영이 민망해했고, 유희진은 그게 또 재밌어서 키득거렸다.

“장난이야, 장난. 이런 기회에 친해지는 거지. 뭐 마시면서 쉬엄쉬엄 얘기하자.”

유희진은 오재영을 음료수 자판기에서 데리고 갔다.

덜컹. 덜컹.

자판기가 커피와 탄산음료를 뱉어냈다.

음료를 건네며 유희진이 물었다.

“몸은 좀 괜찮아? 그때 너도 많이 다쳤다면서. 고영한이랑 실습 갔을 때.”

“많이 좋아졌습니다. 일주일 정도만 더 쉬고 던전에 가도 된대요.”

오재영이 씨익 웃으면서 말했다.

그는 고영한과 마찬가지로 부상이 제대로 완치되려면 어느 정도 재활 기간이

필요하다는 진단을 받았다.

그래서 완전히 나아질 때까지만 사무일을 돕기로 한 상태였다.

“잘됐네. 다음 주부터가 진짜 시작이겠어.”

“그렇죠. 그런데 고영한 선배님은··· 계속 치료받고 계신 건가요? 요즘 안 보

이는 것 같은데.”

오재영이 안부를 묻자 유희진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짜증이 나는 것 같다.

“하여튼 그 인간 진짜 말 안 들어. 의사고 힐러고 길드장이고 다 좀 쉬라고

했는데 괜찮다고 나왔다가 또 다쳤잖아.”

“헉. 그러셨어요?”

몰랐던 모양인지 오재영이 깜짝 놀랐다.

“그랬다니까. 진짜 어이없지? 그래서 이번에는 진짜 제대로 경고 먹었어. 절

대 나오지 말고 한 달간 강제로 휴식! 정밀 검사해 보니까 이번에 다친 발목

말고도 여기저기 몸이 엉망이었대. 8년 동안 쉬지도 않고 쌓아왔던 부상의 흔

적인 거지. 그러게 내가 항상 몸 좀 챙기라고 했는데.”

유희진이 혀를 차며 말했다.

“치료받으면 괜찮아지는 거예요?”

오재영의 조심스러운 질문에 유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뭐, 한 달 정도 집중적으로 치료하고 재활하면 완전 회복 되는 건가 봐. 이

걸 지금이 아니라 더 늦게 발견했으면 또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지. 그 털

보는 이제 자기도 건강 챙겨야 할 나이인데 그걸 모르는 건가?”

“많이 걱정되시나 봐요.”

“걱정? 걱정이 아니라 한심해서 그래. 그 자식은 자기 몸이 무슨 기계인 줄

아는 것 같아. 그 자식 하는 거 보면 옆에서 보는 사람이 더 힘들다니까.”

그것도 다 걱정인 것 같은데.

오재영은 굳이 생각을 입 밖으로 내지 않고, 살짝 웃는 걸로 이야기를 넘겼다.

유희진이 커피를 홀짝이며 물었다.

“그래서, 아까 하려던 얘기는 뭐였어?”

“아, 팀장님이 전달하라고 하신 게 있어서요. 혹시 S급 헌터 윤설아에 대한

최신 정보 공유 받으셨어요?”

“윤설아?”

“네.”

유희진은 윤설아에 대해 떠올렸다.

윤설아, 혈영(血影).

피 그림자라는 섬뜩한 별칭은 그녀가 지나간 자리에 항상 몬스터들의 피가 그

림자처럼 뒤따르고 있다는 의미에서 붙여졌다.

1년 전에 혜성처럼 등장한 S급 헌터로, 당시 한성을 포함한 4대 길드에서 서

로 스카우트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었다.

‘길드 간의 경쟁이 계속 과열되어 계약금과 혜택이 천정부지로 치솟았었지.’

그런데 당사자인 윤설아는 전혀 흔들리지 않고 모든 스카우트 제안을 거절했다.

이후 혼자 조용히 활동하는 걸로 알고 있다.

“음, 내가 아는 건 1년 전 처음 나타났을 때 이야기 정도인데, 최신 정보면

언제를 얘기하는 거지?”

“요 몇 주 사이의 일이에요.”

“오, 그래? 궁금하네. 얘기해 봐.”

“S급 헌터 윤설아는 지난 1년간 크게 눈에 띄는 특이한 점 없이 조용히 활동

해오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약 한 달 전부터 이상한 행동을 하기 시작했어요.”

“어떤?”

“사냥 패턴이 완전히 바뀌었습니다. 하루에 던전을 기본 7개, 8개씩 클리어하

고 다니는 중입니다. 그것도 혼자서요.”

“뭐?”

유희진이 귀를 의심하며 되묻자, 오재영이 다시 한번 이야기하고 설명을 덧붙

였다.

“거의 폭주하고 있는 것 같아요. 주로 B, C급 던전 위주로 돌고 있고요.”

“인간 맞나···.”

유희진이 황당함을 감추지 못하고 중얼거렸다.

S급은 역시 다르다지만, 이건 너무한 거 아닌가.

“그렇게까지 하는 이유가 뭔데?”

유희진의 질문에 오재영이 대답했다.

“그건 아직 밝혀지지 않았습니다. 워낙 신출귀몰해서 접근 자체가 어려운데다

가 물어본다고 해도 답해주지 않을 가능성이 큽니다. 지금까지는 홀로 사냥한

다는 점만 빼면, 사냥 주기 자체는 다른 헌터들과 크게 다르지 않았어요. 너

무 갑작스러운 변화라 이걸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난감한 상황이에요.”

“그렇게 돌아다녔으면 다른 길드도 알고 있겠네?”

“네. 다들 이유는 모르고 혼란스러운 상태인 것 같습니다. 선배님 혹시 뭔가

짚이는 거 없으신가요?”

유희진이 고개를 저었다.

“글쎄, 나도 모르겠는데···. 확실히 이상한 일이네···. 너무 말도 안 되는 행

보잖아? 음···. 뭔가 찾고 있는 건가? 희귀한 아티팩트나 특정 몬스터 같은 거.”

“그럴 가능성도 있다고 봅니다.”

“확실한 건 우리가 아직 캐치하지 못한 무언가가 있다는 거네.”

“네. 갑자기 무슨 일이 생길지도 모르니 선배님도 알아두셔야 한다고, 공유하

라고 하셨어요.”

“알았어. 염두에 두고, 나도 생각 좀 해볼게.”

오재영을 돌려보내고 유희진은 이마를 짚었다.

요 근래 기묘한 일들이 유난히 많이 생기는 것 같다.

최근 몇 년간 던전에서의 전투로 고생한 적은 많았지만, 이렇게 이유를 알 수

없는 사건들로 머리가 아픈 적은 없었는데.

“이상해.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거야?”

* * *

“나 왔어···.”

밥때가 조금 지난 저녁 시간.

최지수가 흐느적거리며 집에 들어왔다.

“아, 배고파 죽을 거 같아···.”

“늦게까지 놀지 말고 좀 일찍 들어오지 그랬어.”

“놀다 온 게 아니라 과제하고 왔단 말이야. 끝나고 애들이 같이 놀자는 것도

거절하고 왔어.”

입을 비죽거리며 억울해한다.

나는 더 뭐라 하지 않았다.

한창 놀고 싶을 나이에 혼자 집으로 돌아온 이유는 뻔하다.

돈.

돈이 없어서, 친구들과 더 놀고 싶은 것도 참고 혼자 집에 들어온 것이다.

아직도 우리 집이 쪼들리는 줄 알고 있으니, 늘 하던 것처럼 돈을 계속 아끼

고 있다.

심지어 내가 계속 노는 줄 알고 더 그러는 것 같다.

‘안 되겠다.’

안 그래도 조만간 용돈 좀 넉넉히 줄 생각이었는데 타이밍을 못 잡았다.

오늘은 꼭 줘야겠다.

“반찬 많으니까 냉장고에서 꺼내 먹어.”

“엉···.”

최지수에게 말하고 방으로 들어왔다.

밖에서 지수가 놀라는 목소리가 들린다.

“헉! 오빠! 무슨 반찬이 이렇게 많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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