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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이 변했네 (수정) (27/125)

      많이 변했네 (수정)

테이블을 정리하던 중, 문득 어제의 남자 헌터가 생각났다.

푸념처럼 내뱉은 그의 말들이 남 일처럼 멀게 느껴지지 않았다.

상황은 다르지만, 나도 그런 비슷한 좌절을 겪어봤기 때문이겠지.

모든 일이 제대로 안 풀리는 것 같은 시기.

나만 뒤처지고 못난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

아무리 발버둥 쳐도 삶이 구렁텅이로 빠져드는 듯한 순간.

이 고통이 언제쯤 끝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더더욱 힘들지.

아주 잘 알고 있다.

F급 헌터일 때도 그랬고, 이세계로 넘어가서도 마찬가지였으니까.

절망적인 상황에 부딪혔을 때, 좌절감에 매몰되면 어느 순간 주변의 다른 것

들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그러다 보면 극단적으로 흘러가게 되는 거고.

거기서 벗어나 조금만 생각을 환기시키면 완전히 다른 쪽으로 결론을 내릴 수

도 있는 것이다.

‘잘 들어갔겠지.’

아마도 그럴 것이다.

축 처진 채 들어왔던 처음과 달리 생기 넘치는 눈빛을 하고 돌아갔으니까.

어쨌든 어제 일 덕분에 오랜만에 좋은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아버지가 통닭을 태워 먹었던 기억이.

아주 오래전 일인데 막상 떠올리니 그 기억이 생생하다.

“그런 때가 있었지···.”

혼자 작게 중얼거리자 베로가 스윽 눈을 맞춘다.

그런 녀석의 머리를 거칠게 쓰다듬었다.

그러다가 장난기가 생겨서 얼굴을 두 손으로 뭉개듯이 만지작거렸다.

“우옹?”

살이 밀려 못생긴 표정이 된 베로가 눈만 끔뻑끔뻑하며 이상한 소리를 낸다.

순하고 착한 녀석이다.

뭐, 몬스터들은 그렇게 생각 안 하겠지만.

“흐음···. 그러고 보니, 거긴 어떻게 됐으려나.”

지금껏 굳이 떠올리지 않았던 그 세계.

딱히 좋은 기억이 없어서 지구로 돌아온 후, 바로 관심 꺼버렸는데, 그래도

어떻게 변했을지 궁금하긴 하다.

‘다른 급한 일도 없고, 잠깐 가볼까?’

사실 실행하지 않았을 뿐이지 하면 어려울 거 하나 없는 일이다.

나는 생각난 김에 바로 실천해 보기로 했다.

베로의 머리에서 손을 떼면서 말했다.

“베로, 형 잠시 어디 다녀올게.”

“웡?”

베로가 고개를 갸웃한다.

“따라오지 말고, 이거 하나 줄게. 혼자 놀고 있어.”

서랍에 남아도는 마석 하나를 꺼내 던져주었다.

텁!

쿠웅!

일부러 다른 방향으로 던졌는데, 녀석은 가볍게 몸을 날려 잡아챘다.

착지하는 소리는 둔중하지만.

꼬리를 흔들며 자리에 앉아 마석을 핥기 시작하는 베로를 확인하고 걸음을 옮

겼다.

* * *

나는 지금은 내 것이 된 이 던전을 통해 아스키나 대륙으로 넘어갔었다.

그 길은 여전히 열려있으며, 내가 게이트를 열고 닫을수도 있다.

한 걸음만 내디디면 언제든 그리로 가볼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딱히 그러고 싶지 않아서 하지 않았던 것뿐.

50년의 세월을 그곳에서 보냈지만, 정이 들거나 돌아가고 싶다거나 하는 생각

은 전혀 없다.

그 긴 세월 동안 좋은 기억이랄 게 없으니 당연한 거였다.

그냥 몇 달이 흘렀으니 그 세계가 어떻게 변했을지 약간 궁금한 정도?

스륵.

아스키나 대륙으로 건너갈 수 있는 게이트가 내 눈앞에 나타났다.

나는 오른손을 게이트 밖으로 내밀었다.

‘안정적이다.’

과거 아스키나 대륙의 대기 중에 흩어져있던 마나는 엉망으로 흐트러져 있었다.

당시에는 그게 시간의 흐름과 관계있을 거라는 생각을 못 했었다.

지구로 돌아온 후, 그곳과 비교해 지구의 시간은 거의 흐르지 않았다는 걸 알

고 나서야 그 상관관계를 깨닫게 됐다.

내가 대륙으로 넘어가게 됐을 때부터, 그곳은 이미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때와 달리 지금은 아주 충만하고, 안정된 상태라는 게 단숨에 느껴졌다.

확실하다.

현재의 아스키나 대륙의 마나는 안정을 되찾았고, 지구, 마계의 시간과 동일

하게 흘러가고 있다.

나는 망설임없이 게이트 밖으로 몸을 밀어넣었다.

쏴아아아-

선선한 바람이 머리를 흩트렸다.

싱싱한 풀과 꽃들이 흙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땅을 가득 채우고 있다.

풀들이 바람의 방향에 맞춰 허리를 굽힌다.

조금 더 위로 시선을 올리자, 매연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듯한 푸르고 청량한

하늘이 보인다.

피부에 와닿는 따사로운 햇볕.

폐를 가득 채우는 깨끗한 공기.

눈 앞에 펼쳐진 건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자연이었다.

“···놀랍네.”

겨우 4개월 만에 이렇게까지 바뀔 수 있다니.

50년 전, 내가 뭣도 모르고 처음 이 땅에 발을 내디뎠을 때, 이곳은 마치 지

옥과도 같았다.

날씨가 어떻든 하늘은 항상 음산한 빛을 띠었다.

식물은 시들어 죽거나 기괴하게 변형되어 거무죽죽했고, 먹을 만한 열매도 만

들어내지 못했다.

산짐승도 없었고, 오직 몬스터만이 가득했다.

마계에 완전히 잠식당한, 죽음의 기운만이 가득했던 끔찍한 세상.

50여 년이 흐른 후에도 몬스터만 사라졌을 뿐, 풍경이 크게 달라지지는 않았다.

그런데 지금 내가 서 있는 이곳이 그 지옥 같던 세계와 동일한 곳이라니.

보고도 믿기 힘들 지경이다.

‘회복력이 엄청나군.’

이 모습이 몬스터에게 장악당하기 전, 원래 대륙의 모습이었겠지.

그때 갑자기 묘한 시선이 느껴졌다.

방향은 아래쪽.

시선을 내리니 눈에 들어온 것은···.

“···넌 뭐냐?”

다람쥐 한 마리가 도토리를 두 손에 쥐고 나를 올려다보고 있다.

내가 아는 다람쥐보다 약간 큰 느낌이 있다.

볼이 볼록한 것이 입안에 이미 뭔가 들어있는 상태인 것 같다.

다람쥐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얼음이 된 것처럼 멈춰 있었다.

툭.

시선이 마주치자 녀석은 도토리를 바닥에 놓고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한쪽 다리를 접어 앉으며 반대 팔을 척 들어 올린다.

마치 중세 시대 기사가 예를 다해 인사하는 느낌이었다.

워낙 몸에 비해 팔다리가 짧아서 확실히 인식하기 어렵긴 한데 아무래도 맞는

것 같다.

어이가 없어 중얼거리니 다람쥐가 살짝 고개를 든다.

양 볼은 여전히 볼록한 상태다.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자세를 잡는 걸로 봐서, 내가 그만하라고 할 때까지 저러

고 있을 거 같다.

“그만하고 일어나.”

또 슬쩍 눈치만 보고 다시 고개를 숙인다.

왜 이러는 건가 잠깐 생각해보고 다시 입을 열었다.

[일어나라.]

“찍!”

제국어로 말하니 그제야 일어선다.

한국말을 못 알아들었던 거구나.

“찍, 찌직! 찍찍.”

다람쥐는 공손하게 두 손을 모은 채 뭐라 뭐라 열심히 소리 냈다.

뭔가 전달하고 싶은 것 같은데 뭐라는 건지 모르겠다.

태도와 상황으로 유추해보는 수밖에···.

나는 허리를 숙여 녀석과 조금 가까워진 상태로 물어보았다.

[??]

또 고개를 끄덕인다.

[그럼 고맙다는 건가?]

“찍찍찍찍!”

이번에는 아까보다 더 빠르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며 대답한다.

고맙다는 말이 맞는 것 같다.

어찌저찌 대화가 되긴 한다.

하긴 나는 베로, 호빵이, 찐빵이, 만두 모두와 언어로 대화하는 것이 아니라

대충 이런 느낌으로 의사소통을 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말 안 통하는 놈들과 눈치로 대화하는 이상한 스킬이 생긴 것 같다.

쓸모가 있긴 한데 뭔가 하찮은 것 같기도 하고··· 넘어가자.

‘뭐가 고맙다는 건지는··· 대충 알 것 같네.’

[너희 세계를 구해줘서 감사하다는 말을 하고 싶은 건가···?]

“찌찍! 찍!”

격렬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거구나···.]

나는 조금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아스키나 대륙을 구원하는 건 내가 의도한 것이 아니라 그냥 얻어걸린 거기

때문에.

50년 전 나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 우연히 이 세계로 넘어왔다.

이곳이 어떤 세계인지, 어떤 위험에 빠졌는지 그런 건 알 리가 없었고, 그래

서 세상을 구하겠다는 사명감 같은 걸 가질 이유도 없었다.

그저 내가 살기 위해, 어떻게든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악착같이 버티고 버텼

을 뿐.

그냥 그렇게 살았는데 지나고 보니 그 결과가 이 세계를 구한 것뿐이었다.

그래서 감사 인사를 해봤자 잘 와닿지 않는다.

[뭐, 고마워 할 건 없고 난 이만 가야겠다.]

다람쥐가 공손하게 고개 숙이며 소리 냈다.

“찌직!”

또다시 기사처럼 무릎을 꿇는 다람쥐다.

못 본 척 고개를 돌렸다. 좀 부담스럽다.

궁금증은 대충 해결했다.

그냥 이 세계의 상태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냥 확인해보는 게 목적이었으니까.

대충 손짓해주고 게이트로 몸을 밀어 넣었다.

내일 메뉴나 생각해봐야겠다.

* * *

베로는 현호의 옆에 철퍼덕 엎드려 앉은 채 꼬리를 휘적휘적 흔들었다.

즐겁고 신이 나서가 아니라 무료함에 그냥 움직이는 거였다.

오늘따라 유난히 심심했다.

툭. 툭.

이번에는 커다란 발바닥으로 현호의 발을 건드려 보았다.

의자에 앉아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던 현호가 베로에게 시선을 주었다.

“왜 그래, 베로?”

“후웅···.”

“심심해? 조금만 혼자 놀고 있어. 지금 빨리 해야 할 게 있거든.”

현호가 베로의 머리를 쓱쓱 쓰다듬고 다시 일에 집중했다.

바쁜가보구나.

베로는 아쉬워하며 고개를 바닥에 다시 떨구었다.

뒹굴 몸을 반 바퀴 돌려 배가 하늘을 향하도록 했다.

몸을 이리저리 뒤틀다가 다시 반 바퀴 굴렀다.

전혀 심심함이 사라지지 않는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뭘 하고 놀아야 잘 노는 걸까?

홀로 궁리하던 베로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얼마 전의 즐거웠던 일이 기억난 것이다.

“히- 히-“

평소 내지 않는 소리를 내는 베로를 현호가 이상하게 쳐다보았다.

“베로?”

“히이- 히잉.”

“얘가 갑자기 왜 이러지?”

“히이이-! 히잉- 히-”

고개를 갸웃거리던 현호가 설마설마하며 물었다.

“혹시 슬라임 소리를 내고 싶은 거야?”

“웡웡!”

드디어 알아들어 줬다.

베로는 신이 나서 꼬리를 격하게 흔들었다.

현호가 밝게 웃으며 말했다.

“하하하하! 그게 슬라임이었어? 난 또 갑자기 숨쉬기가 힘든건가 해서 깜짝

놀랐잖아.”

그가 웃으니 베로도 좋아서 헥헥 웃었다.

베로는 현호가 좋았다.

이번에는 벌떡 일어서서 크르릉 소리를 냈다.

그리고 옆으로 조금 이동해 아까 일어섰던 자리로 펄쩍 달려들어, 뭔가 물어

흔드는 시늉을 했다.

그 모습을 유심히 하던 현호가 미소 지었다.

“얼마 전에 고블린 공격했던 걸 표현하고 싶은 거야? 흠, 슬라임들이랑 밖에

놀러 갔던 거 얘기하고 싶은 거구나.”

이번에도 맞았다.

자기 말을 어쩜 이렇게 딱딱 알아들어 주는지 모르겠다.

또 너무 신이 나서 펄쩍펄쩍 뛰었다.

베로는 얼마 전의 마계 구경이 재미있었다.

늘 혼자 나가서 가던 곳만 들리는 게 아니라 슬라임들과 함께 나가는 게 즐거

웠다.

슬라임을 괴롭히려는 다른 몬스터들을 혼내주면, 슬라임들이 삑삑 소리 내며

그를 반짝반짝 빛나는 눈빛으로 바라보는 게 좋았다.

현호는 조금 난감한 듯 턱을 만지작거렸다.

“흠, 내가 지금은 좀 바쁜데··· 너희끼리 나갔다 올래?”

“웡웡!”

물론 좋다.

“잠깐 기다려봐.”

베로는 얌전히 그를 보며 기다렸다.

현호가 서랍을 열고 뭔가 꺼내 만지작거렸다.

그리고 베로의 목에 그것을 두르고 묶어주었다.

단단해 보이는 끈에 마석을 연결한 것이었다.

베로의 목에 묶인 마석에서 현호의 마나가 짙게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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