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호는 강하다 (수정)
베로와 눈을 마주친 현호가 단단히 경고했다.
“베로. 잘 들어. 이 마석은 먹으면 안 되고 빼지도 마. 단단히 묶어놨으니 빠
지진 않겠지만 억지로 벗으려고 하지 말란 말이야.”
“웡?”
고개를 갸우뚱 기울이는 베로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현호가 말을 이었다.
“너는 충분히 강하지만 마계는 너무 넓어. 너보다 강한 몬스터들을 만나면 위
험할 수 있지. 베로 혼자라면 충분히 몸을 피할 수 있겠지만, 호빵이, 찐빵
이, 만두랑 함께 다니는 거면 그게 어려울 수도 있으니까 이건 만약을 위한
거야.”
그런 거구나!
알아들었다.
베로는 믿어달라는 눈빛을 하고 꼬리를 살랑거렸다.
“잘 갔다 와.”
현호가 씨익 웃으며 엉덩이를 툭툭 두드렸다.
“웡! 웡! 웡!”
베로는 신이 나서 달렸다.
개천에 모여있는 슬라임들을 향해.
그리고 슬라임들에게 아까와 비슷한 동작을 보여주었다.
“······?”
슬라임들은 전혀 알아듣지 못한 듯 고개만 갸웃거렸다.
하는 수 없다. 바로 행동으로 옮길 수밖에.
베로는 호빵이, 찐빵이, 만두에게 따라오라는 신호를 보냈다.
이번에는 알아듣고 다가온다.
베로는 세 슬라임을 데리고 마계로 나섰다.
“삐이이이!”
“삐이잇!”
“삐이이이익!”
또다시 바깥 구경을 하는 것에 신이 나서 세 슬라임이 기쁘게 소리쳤다.
그들에게도 지난번의 산책이 즐거운 기억이었던 것이다.
“삐삐이!”
“웡웡!”
“삐이이잇.”
“우우우웅?”
“삐이익!”
잘 통하지 않는 대화를 하며 그들은 마계를 거닐었다.
켈켈거리며 다가오던 오크들이 베로의 눈빛에 쫄아 멀리 달아났다.
먹이를 찾던 검은 덩굴이 만두의 발목을 잡아채려 해서 베로가 날카로운 이빨
로 거칠게 찢어주었다.
늪지대를 뛰어넘을 때는 세 슬라임을 머리와 등에 올리기도 했다.
슬라임들이 너무 재밌어해서 베로는 또 뿌듯해졌다.
그때였다.
스윽.
베로의 머리 위로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공기를 장악하는 음습한 분위기가 순식간에 그들을 휘감았다.
“가암히···!”
분노를 담은 목소리가 천둥처럼 세상을 울렸다.
베로는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그곳에는 베로보다 훨씬 거대한 존재가 있었다.
머리의 양쪽에 난 두 개의 뿔은 아래로 꺾여있었고, 어두운 빛을 띤 피부는
그 무엇으로도 흠집 낼 수 없을 것 같다.
그는 팔짱을 낀 채, 이글거리는 붉은 눈으로 그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슬라임들은 너무 놀라 몸이 굳어버렸다.
베로는 크릉 소리를 내어 반항하려 했으나 목이 막힌 것처럼 소리가 잘 나지
않았다.
두려운 존재가 이를 갈며 말했다.
“감히 이 칼로스의 땅에 함부로 발을 내딛다니···. 하찮은 미물들이 겁도 없
이···!”
치이이잉!
그가 팔을 뻗자 불타오르는 장검이 나타나 손에 턱 붙었다.
칼로스가 한 발짝 앞으로 다가왔다.
“그것도 머리가 하나뿐인 생기다 만 케르베로스와 희한한 몰골을 한 슬라임이
라니. 어이가 없군. 아주 기가 막힌다고. 마계가 대체 어찌 돌아가고 있는 것
인지.”
“크릉···.”
불쾌한 발언에 베로가 으르렁 소리 냈으나 그게 다였다.
눈앞의 마족은 너무 강했다.
베로는 이런 상대와 1대 1로 마주해본 적이 없었다.
혼자 다닐 때는 기민하게 마족의 영지를 피해 다녔는데, 오늘은 너무 신나고
말았던 것이다.
등에 올라탄 슬라임들은 거의 녹아내렸다.
마족의 기운을 이기지 못하고 원래의 찐빵 같은 모양이 되어갔다.
휘익!
칼로스가 검을 치켜들었다.
“하찮은 미물들이여! 이 몸의 손에 죽는 것을 영광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베로는 놀라 몸을 움츠렸다.
도망치고 싶은데 다리가 잘 움직이지 않았다.
······!
그때, 베로의 머릿속에 현호가 목에 묶어준 마석이 생각났다.
현호는 강하다.
현호의 기운은 평소에 잘 드러나지 않고 친숙하지만, 그가 화났을 때의 기운
은 이 마족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하다.
베로는 쫄지 않고 당당하게 가슴을 폈다.
그리고 앞발을 들어 턱 아래 달린 마석을 툭툭 쳤다.
그 모습이 턱을 긁는 것처럼 보여 칼로스는 화가 더욱 치솟았다.
“이, 이런 건방진 놈이···! 이 칼로스가 네놈을 가루도 남지 않을 정도로 갈
기갈기 찢어···!”
그때 케르베로스의 목에 반짝이는 무언가가 보였다.
마석이다.
그걸 인식하는 순간 칼로스는 극심한 압박감을 느꼈다.
“허억···!”
그저 보는 것 만으로도 자신의 미약함을 자각하게 되는 강력한 힘이었다.
고작 마석 하나였다.
그 마석 하나에 이렇게 쫄아버리는 자신이 답답하고 분했다.
그런데 그렇다고 다른 행동을 취할 수는 없었다.
이토록 무력한 감각은 처음이었다.
칼로스는 확신할 수 있었다.
이놈들은 절대 건드리면 안 된다.
이 녀석들의 털끝 하나라도 건드리는 자는, 반드시 죽을 것이다.
그게 누구든 관계없이, 세상에서 제일 끔찍하고 고통스럽게.
칼로스가 주춤 한 발 물러서며 입을 열었다.
“새, 생각해보니 그동안 내 영지가 너, 너무 폐쇄적이었던 것 같군. 가끔은,
손님도 좋지. 얼마든지 구, 구경하고 가라. 내 땅에는 볼거리가 꽤 많으니
까······.”
겨우 말을 끝낸 칼로스가 거대한 날개를 펼쳤다.
그리고 강하게 발돋움하며 보랏빛 하늘을 향해 날아올랐다.
빨리 들어가서 흐트러진 마기를 다스려야 했다.
칼로스는 열심히 날갯짓하며 떠났다.
이곳에, 하필 자신의 구역에 침입한 저 녀석들의 주인이 제발 찾아오지 않길
바라면서.
베로는 고개를 들어 저 멀리 작아지는 칼로스를 보았다.
“워우우우우우!”
베로가 승리의 하울링을 했다.
“삐이···!”
“삐이잇!”
“삐삐이익!”
찐빵 같은 본 모습으로 돌아간 슬라임들도 작게 따라 소리쳤다.
역시 현호는 강하다.
베로의 가슴속에 자랑스러운 마음이 퐁퐁 솟아났다.
그들은 한껏 의기양양해져서 던전으로 돌아왔다.
“왔네? 잘 놀다 왔어?”
하던 일을 다 끝낸 건지, 현호는 이제 좀 한가해 보였다.
“워우워우워우워!”
마음속의 자랑스러움을 표현하고 싶어 베로가 마구 소리쳤다.
“응. 그래그래. 잘했어.”
현호는 알아들은 것 같지 않다.
“그런데 슬라임들은 왜 이렇게 된 거야. 만두는 슬라임도 아니고 인간도 아니
고 모양이 왜 이렇지?”
“삐이잇!”
“삐이이이익!”
“삐이이이!”
그 질문에 할 말이 많은지 슬라임들이 통통 튀며 소리쳤다.
“응. 그래그래.”
역시 알아들은 것 같지 않다.
오늘 있었던 일은 설명하기 좀 복잡했다.
“일단 가자. 다시 마나 주입해 줄테니까.”
“삐잇!”
슬라임들이 힘차게 대답했다.
“웡!”
베로도 덩달아 대답했다.
그리고 번쩍 몸을 세우고 현호의 어깨에 두툼한 발을 턱턱 얹었다.
꼬리를 흔드는 것만으로는 부족했다.
베로는 현호가 너무 좋았다.
“하하! 그렇게 재밌었어? 자주 놀러 나가야겠네.”
얼굴을 핥는 베로의 등을 현호가 웃으며 토닥여주었다.
* * *
유리문을 열고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칼질을 하던 남자가 나를 보고 사람 좋게 웃으며 인사한다.
“현호 형님, 오셨어요?”
이곳은 대광 정육점.
내가 가장 많이 들리는 정육점이다.
집에서 가장 가깝기도 하지만, 무엇보다도 고기 질이 좋다.
정육점 주인은 20대 후반 청년, 황진규.
그는 나를 단골이라 여기는지, 형님이라 부르며 살갑게 굴었다.
거의 하루 이틀에 한 번꼴로 오고 있으니 단골이 맞긴 하지.
계속 보다 보니 그냥 영업용 친한 척이 아니라 실제로 사람을 좋아하는 타입
인 듯했다.
가게를 오가면서 만날 뿐이지만 어느새 꽤 편한 관계가 되어있었다.
“형님, 오늘은 뭐가 필요하십니까?”
“수육용 통삼겹살이랑 국거리.”
“아, 수육 만드시려고요? 그거 좋지요. 저도 비계가 좀 있는 걸 좋아하거든
요. 그래야 부들부들하고 맛있죠. 잠깐만요. 이 분 거 먼저 드리고 빨리 챙겨
드릴게요.”
황진규가 먼저 온 손님을 가리키며 눈을 찡긋했다.
그는 능숙한 손놀림으로 붉은 고기를 손질했다.
칼질이 참 시원시원하고 거침없다.
젊은 나이에 벌써 베테랑 같다.
열심히 살아왔다는 게 한눈에 보인다.
왜인지 기특해서 흐뭇하게 지켜보았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세요!”
황진규는 앞의 손님을 보내고 나서 내 고기를 챙기기 시작했다.
콰앙!
그때 문이 과격하게 열렸다.
발로 문을 차고 들어온 것은 고등학생 정도로 보이는 소년이었다.
샛노란 머리에 촌스러운 무늬의 화려한 셔츠를 입고 있었다.
양손을 두 주머니에 넣고 건들건들한 자세를 취하고 있는데 영 보기 좋지 않다.
‘아무래도 손님은 아닌 것 같은데.’
나는 고개를 돌려 황진규를 보았다.
항상 밝게 손님을 맞이하던 그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있다.
황진규가 화를 참는 듯 낮은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황진성.”
황진성이라 불린 소년이 귀를 후비적거리며 피식 웃는다.
“뭐야, 반응이 왜 그래? 내가 못 올 데 왔어?”
“너 그동안 어디 있었어.”
“그냥 친구 집에 있었지. 지금 그런 게 중요한 건 아니고 나 돈 좀 줘.”
“뭐라고? 또 무슨 사고를 쳤는데!“
“아니, 별거 아닌데 그 새끼가 자꾸 물어내라고 난리를 쳐서···. 아오, 생각
하니까 또 짜증나네.”
“황진성! 너는 진짜 대체 왜···!”
“새삼스럽게 구네. 이런 일이 한두 번인가 뭐.”
“그게 무슨···! ······아니다. 일단 들어가 있어. 조금 있다가 얘기하자.”
화를 내려던 황진규가 내 존재를 의식했는지 소년의 말을 끊었다.
소년은 전혀 타격이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하고 가게 안쪽으로 껄렁하게 걸음
을 옮긴다.
‘음? 좀 이상한데.’
나를 스쳐 지나가는 소년에게서 마나가 느껴진다.
각성자라 하기에는 너무 미약한데, 또 비각성자라 하기엔 과하다.
우연히 다른 헌터의 마나가 스쳐 간 정도도 아니다.
분명 본인에게서 흘러나오는 것이다.
‘곧 각성하려나.’
별로 좋은 징조는 아니다.
각성을 하면 하는 거고 안 하면 안 하는 거지, 그 중간 단계가 있다는 건 무
언가 불안정하다는 의미니까.
가게 안쪽으로 들어가는 소년의 뒷모습을 보고 황진규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러다 내가 있다는 걸 깨닫고, 황급히 표정을 가다듬었다.
뒤이어 얼굴에 민망한 미소가 떠올랐다.
“···죄송합니다. 지금 이럴 게 아니었는데, 저 녀석이 하도 속을 썩여서 저도
모르게 울컥했네요.”
“동생인가 보네?”
“네. 제 친동생이에요. 한 달 동안 보이지도 않던 놈이 갑자기 나타나서
는···. 후···.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에요.”
“나이 차이가 좀 나 보이는데. 아직 학생이야?”
“맞아요. 18살인데, 학교도 안 가고 저러고 있어요. 자기 맘대로 자퇴해버렸
거든요. 어디서 나쁜 친구들이랑 어울리는 것 같은데 제가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알 수가 없네요. 아무리 말을 해도 제 말은 안 듣습니다. 이번엔 또 무슨
일일지······.”
얼굴에 수심이 깊어졌다.
황진규는 아버지가 안 계시고, 어머니는 현재 투병 중이라고 했었다.
그럼 형인 그가 실질적인 보호자인 건데, 엇나가는 동생을 어떻게 바로 잡아
야 할지 혼자 고민이 많은 모양이었다.
“어릴 땐 진짜 착했거든요. 웃기도 많이 웃고, 말도 잘 듣고, 형아, 형아 하
면서 절 엄청 따랐어요. 그땐 참 귀여웠는데 어쩌다 이렇게 된 건지··· 도저
히 모르겠어요. 뒤늦게 사춘기라도 온 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