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구더라 (수정)
근심 가득한 목소리로 중얼거리던 그가 멋쩍게 입을 열었다.
“아이고, 제가 괜히 무거운 얘길···. 바쁘실 텐데 괜히 붙잡고 있었네요.”
“괜찮아. 급하게 어디 가는 것도 아니었고.”
황진규는 고기가 가득 담긴 검은 봉투를 내 손에 쥐여주었다.
“형님, 여기 있습니다. 특별히 좀 더 넣었어요. 아시죠?”
“고맙다.”
웃으며 대답하자 황진규가 더더욱 밝게 웃는다.
하지만 그게 평소와 달리 억지로 짓는 미소인 게 보인다.
정육점을 나서려던 나는 다시 황진규를 돌아보며 말했다.
“혹시라도 동생이 좀 이상하거나 말썽 피우거나 하면 나한테 얘기해. 도와줄
테니까.”
“이상할 때요?”
“그냥 평소랑 좀 다를 때.”
“제가 볼 땐 항상 이상해요··· 종잡을 수가 없거든요.”
“어쨌든, 혼자 감당이 안 되면 말이야.”
“에이, 아닙니다. 제 동생인데 제가 알아서 해야죠. 신경 써주셔서 고마워요.
형님.”
황진규는 싱글싱글 웃으며 대답했다.
나는 그를 뒤로하고 정육점을 떠났다.
아직 지나치게 미미한 마나였다.
각성하려면 조금은 더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 * *
게이트를 통과하여 식당을 향해 걸어오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여기 진짜 들어와도 되는 거 맞아요? 저는 들어본 적이 없어서···.”
“그럼요. 저는 건너건너 몇번 들었거든요. 이게 원한다고 눈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고 하니까 더 궁금하잖아요. 저는 사실 안 믿었는데 이제 안 믿을 수가
없네요.”
“와, 그럼 우리 운 엄청 좋은 거구나.”
“그러니까요!”
그렇게 등장한 헌터들에게 나는 싱긋 미소 지으며 인사했다.
“어서 오세요.”
그런데, 그중 한 남자가 눈을 크게 뜨며 나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어어?! 어어어어?”
뭔가 싶어 쳐다보고 있자니, 놀란 얼굴에 점점 반가워하는 듯한 표정이 나타
났다.
“이야···! 이게 누구야! 여기서 다 보게 되네. 소문의 주인공이 너일 거라고
는 상상도 못 했는데! 와하하하!”
얼굴이 어쩐지 익숙하긴 한데···.
가물가물한 것이, 기억이 흐릿하다.
나에게는 50년이라는 세월의 차이가 있으니, 아무래도 스쳐 가는 인연이었다
면 기억하기가 어렵지.
느낌상으로는 별로 좋은 인상은 아닌 것 같은데.
“누구더라?”
중얼거리는 내 말에 남자의 미간에 깊은 주름이 새겨졌다.
“이봐. 장난치지 마. 나 홍재훈이잖아. 몇 달 전까지만 해도 같이 사냥 다녔
었는데.”
“아아, 맞다.”
“농담이 뭐 그따위야? 여전히 재미없네. 쯧쯧. 뭐, 원래 이래저래 부족한 게
많았지. 내가 다 알고 있으니까 한 번 봐준다.”
장난투로 어깨를 으쓱하면서 말하는데, 목적은 속을 긁겠다는 게 느껴진다.
내가 기억하지 못했다는 것에 자존심이 많이 상한 것 같다.
물론 저런 말을 해봤자 타격감은 전혀 없다.
나는 피식 웃으며 다른 사람들을 훑어보았다.
더 눈에 익은 사람은 없다.
몇 달이 지났으니 또 함께하는 파티원이 바뀐 모양이었다.
길드 소속도 아니고 비교적 승급이 쉬운 낮은 등급의 헌터들은 일반적으로 그
렇게 활동했다.
뭐, 우선은 손님이다.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그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오늘의 메뉴는 보쌈이었다.
냄비에서 김이 펄펄 나는 고깃덩이를 꺼냈다.
잡내 없이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후각을 자극한다.
‘완전 잘 익었네.’
흐뭇한 기분으로 고기를 먹기 좋은 크기로 썰기 시작했다.
그런데, 부엌 너머에서 유난히 큰 목소리가 귀에 거슬린다.
“이야, 저 친구 저거, 안 보인다 했더니 이런 걸 하고 있었네. 난 또 이제 헌
터 생활 포기한 줄 알았는데!”
홍재훈이다.
그는 어떤 무리에 있든 목소리를 크게 내며 주도권을 잡으려는 타입이었다.
조금씩 옛날 생각이 떠올랐다.
모르는 목소리가 작게 속삭인다.
“아, 저 사람이 전에 말했던 그 사람? F급에서 올라오질 못하고 있다는···.”
“맞아요. 에프, 에프! 진짜 오랜만이네. 몇 달 만에 보는 거지? 모르겠다.
뭐, 그게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지!”
홍재훈이 또 쩌렁쩌렁 소리친다.
되려 질문했던 사람이 그의 팔을 치며 말린다.
“아니, 재훈 씨. 조용히 얘기해. 뭐 좋은 얘기라고···.”
“에이, 괜찮아요. 틀린 말도 아니고. 쟤도 별생각 없을걸요. 뭔 소릴 해도 반
응을 안 해요.”
“그래도 그렇지···.”
볼수록 기억이 새록새록 솟아난다.
그래. 그랬었지.
승급하지 못하는 F급 헌터로 살면서 몇몇에게 저런 취급을 받았었다.
누군가를 깔아뭉개는 걸로 만족감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
누가 봐도 가장 무능력했던 나는 종종 그들의 타깃이 되었다.
굳이 트러블 일으키고 싶진 않아서 무시로 일관했었다.
나서서 싸워봤자 더 불쌍해 보일 거란 생각도 있었고, 당시에는 내가 못난 놈
이라는 생각에 빠져있었으니까.
솔직히,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건 아니다.
앞에서 농담인 척 조롱하고, 뒷담하고, 무시와 경멸의 눈빛을 받았을 뿐.
저렇게 친한 척, 반갑게 구는 걸 보니 본인은 크게 의식하고 한 짓이 아닐지
도 모르겠다.
그냥 그 은근한 괴롭힘이 재미있고, 그럴수록 자신은 잘난 사람처럼 느껴졌겠지.
그 재미로 던진 돌에 나는 마음고생을 좀 했었다.
······생각할수록 열받는데?
주먹에 살짝 힘이 들어간 것을 의식적으로 풀었다.
지금 당장에 폭력을 쓸 수는 없지 않은가.
나는 쟁반에 고개를 가지런히 올리고, 채소와 무김치를 함께 내어갔다.
음식에는 죄가 없으니까.
내가 봐도 먹음직스러운 보쌈 한 상이 차려졌다.
“와아. 너무 맛있겠어요.”
“빨리 먹어보자. 던전에서 이게 웬 호강이야.”
상추에 깻잎을 겹쳐 들고, 윤기 나는 고기를 두 점 올린다.
그 위에 새빨갛게 양념 된 무김치와 쌈장을 얹고, 크게 입을 벌려 쌈을 한입
에 넣는다.
부드럽게 익은 고기와 신선한 채소의 맛.
거기에 오드득 씹히는 맛이 좋은 매콤달콤한 무김치.
“으음!”
감탄이 절로 나오는 맛일 거다.
“술 한잔하면 딱 좋겠는데!”
“에이, 아무리 그래도 사냥 중인데요. 오늘 안에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나가서
마십시다.”
“그래, 그래야지.”
홍재훈 또한 입안 가득 보쌈을 집어넣고 우물거렸다.
“오오, 제법인데?”
조금 놀란 듯 나를 쳐다본다.
그리고 한쪽 입술을 비뚜름히 올리며 말한다.
“진작에 장사를 하지 그랬어. 3년 동안 시간 낭비하는 것보다 더 나았을 것
같은데. 역시 다 자기한테 맞는 일이 있는 거구나. 하핫!”
누가 봐도 일부러 비꼬는 거였다.
주변인들의 표정이 좋지 않은데 그건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저런 말에 동조하는 사람도 있지만, 정상적인 사람들은 적어도 눈앞에서 조롱
하고 모욕하는 걸 좋아하지 않는다.
이놈도 평판이 좋지는 않을 거다.
나는 별다른 대꾸 없이 할 일을 했다.
그러자 홍재훈의 표정이 좀 의기양양해진 것 같았다.
다음 문제는 계산할 때 일어났다.
“에이, 이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안 그래?”
홍재훈이 내 팔뚝을 건드리며 말한다.
“재훈 오빠. 왜 그래요. 괜찮아요. 여기 계산할게요.”
“아니, 잠깐 있어봐. 나 얘랑 친하다니까? 공짜도 아니고 반값 정도면 나쁘지
않잖아? 아니, 나라면 이렇게 우연히 만난 게 반가워서라도 공짜로 대접하겠다!”
그러고는 내 어깨에 자기 팔까지 척 걸친다.
“그렇지? 에프야? 친구 좋다는 게 뭐냐!”
친구라···. 그런 관계는 전혀 아니었는데 말이야.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저 빙그레 미소 지었다.
웬만하면 그냥 넘어가려 했는데, 이건 제발 그러지 말아 달라고 애원하는 수
준 아닌가.
홍재훈이 내 어깨를 살짝 누르며 은근히 압박을 가한다.
나는 미미하게 마나를 발산했다.
“응?”
홍재훈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이게 무슨 상황인지 정확히 파악하지 못한 얼굴.
하지만 뭔가 이상하다는 건 분명히 느꼈을 거다.
슬쩍 어깨에서 손을 떼고 눈알을 굴린다.
그리고 과장되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하하핫! 야, 농담이지 농담. 그래.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줘야지, 뭐.”
태연한 척 가방을 뒤지는 홍재훈 이마에서 삐질 땀이 흘러내린다.
그 짧은 순간 사이 등 뒤는 식은땀으로 흠뻑 젖었을 것이다.
본능은 두렵고 겁이 나지만, 그럴 리가 없다는 생각으로 최선을 다해 아닌 척
하고 있겠지.
자기 자신조차 속이면서.
홍재훈이 떨떠름하게 마석을 내밀었다.
나는 그걸 받아들면서 덥썩 그의 손을 붙잡았다.
“어어?”
“오랜만에 다시 만나서 반가웠다.”
“어, 어어? 그래. 뭐, 나도···.”
그래. 오랜만에 만났는데 이대로 그냥 보내기는 너무 아쉽지.
자연스럽게 악수하는 척, 마나를 훅 불어넣었다.
홍재훈은 아무것도 모르고 손을 슥 빼버렸다.
특이한 경험에 나름 아는 사람이라 과시하기 위해 친한 척했던 거였다.
내심 자기가 생각해도 이 정도로 반가워할 사이가 아니긴 할 거다.
“잘 가.”
나는 씨익 웃으며 그를 배웅했다.
* * *
“와, 진짜 별일이 다 있네.”
홍재훈은 게이트 밖으로 나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F급 최현호가 여기 있었다니.
몇 달 전 던전에서의 사고 이후로 나타나지 않기에 더는 헌터로 살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런데 요즘 화제인 던전 식당의 주인이 저놈일 줄이야.
직접 보고도 아직도 믿기지 않는다.
홍재훈은 짜증스럽게 머리를 벅벅 긁었다.
“와씨. 개부럽잖아. 저러면서 완전 돈 쓸어 담는 거 아니야?”
지치고 힘든 사냥 도중 나타나는 식당을 반기지 않을 헌터는 없다.
자신도 헌터이기에 잘 알고 있다.
음식 가격이 얼마든 기꺼이 지불할 헌터들이 널렸을 것이다.
어찌 보면 몬스터와 직접 싸우는 자신보다 훨씬 잘 벌 수도 있을 것 같다.
‘저런 능력은 대체 어디서 얻은 거지.’
생각할수록 배가 아파왔다.
한심하게 생각했던 놈인데, 전투 능력은 분명 자기보다 아래인데, 상황이 이
렇게 되니 갑자기 자기보다 더 잘나게 된 것 같다.
홍재훈은 괜히 침을 퉤 뱉었다.
“하, 참. 그 능력으로 한다는 게 겨우 식당이라니 웃기네. 나라면 훨씬 더 잘
쓸 수 있을 텐데. 하긴, 결국 무슨 능력이든 제대로 못 쓰면 도루묵이지. 딱
자기 수준만큼 활용할 수 있는 거니까.”
양껏 비꼬아주니 속이 좀 뚫리는 것 같다.
‘그런데 아까···.’
문득 마지막 계산할 때 최현호가 생각났다.
만만한 놈이라 적당히 휘두르면 먹힐 줄 알았는데 의외로 잘 안됐다.
아니, 생각해보면 최현호가 막 정색을 한 것도 아니고 안 된다고 하지도 않았
던 것 같다.
그냥 갑자기 몸이 이상해졌다.
순간적으로 온몸에 소름이 돋았고 땀이 줄줄 흘러내렸다.
뭔가 이상하다 싶어서 자신이 그냥 먼저 뒤로 물러나 버렸다.
그리고 지금 몸 상태에는 아무 이상이 없다.
그래서 아까 갑자기 왜 그랬던 건지 더 이해가 안 되었다.
‘병원에라도 가봐야 하나.’
그때 앞서나가던 동료가 그를 불렀다.
“재훈 씨. 빨리 와요!”
“예예. 갑니다!”
홍재훈은 잡생각은 털어버리고 이제 사냥에 집중하기로 했다.
어찌 됐건 오늘은 흔히 하기 어려운 경험을 한 건 사실이고, 맛있는 음식으로
배도 잘 채웠다.
그렇게 생각하니 기분이 좋아지기까지 했다.
아무 문제 없는 하루였다.
“······어? 왜, 왜 이거 왜 이래?”
자신의 모든 스킬이 발동되지 않는다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