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있었으면 좋겠네 (30/125)

      있었으면 좋겠네

“우웡?”

베로가 고개를 갸웃 기울이며 나를 이상한 눈빛으로 쳐다보았다.

그제야 내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는 걸 알아챘다.

“···이거 생각보다 후련한데?”

내 속에 생각보다 홍재훈에게 쌓인 게 있었던 것 같다.

하긴 속으로 무시하거나 뒷말만 하던 다른 사람들에 비해 그놈이 좀 유난히

나를 괄시하긴 했었지.

떠나기 전 악수를 할 때, 홍재훈이 능력을 발휘하지 못하도록 약간 손을 썼다.

간단히 말하자면 각성자인 홍재훈이 가진 고유의 마나가 본인의 의도대로 흘

러가지 못하도록 내 마나로 살짝 묶어놓은 것이다.

물론 영원한 건 아니다.

딱히 마법을 쓴 것도 아니고, 그냥 마나를 불어넣은 것 뿐이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르면 자연적으로 흩어질 것이다.

그러고 나면 아무 이상 없이 원래의 상태로 돌아올 거고.

‘한 달쯤 지속되려나.’

정확한 기간은 지나 봐야 알겠지만 한 달 정도면 엄청나게 긴 기간은 아니다.

일시적인 현상이라는 걸 알면 좀 넉넉한 휴가 정도로 생각하고 여유롭게 쉴

수도 있을 거다.

하지만 그렇게 마음 편하게 지낼 수 있을 리가 없지.

자기 몸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원인이 뭔지, 영원히 힘이 사라진 건

지 알 수 없을 테니까.

알고 보면 별일 아닌 일이지만, 모르는 상태에서는 하루하루가 힘들 것이다.

‘마음고생 꽤 할 것 같네.’

자기 성질 못 이기고 길길이 날 뛸지도 모르겠다.

흡족하게 혼자 웃고 있는 나를 베로가 계속 고개를 갸웃거리며 보고 있었다.

아무래도 평소와 좀 달라 보이나 보다.

커다란 머리를 쓰다듬어주자 눈을 감고 헥헥거린다.

나는 베로가 내 무릎에 머리를 놓고 잠들 때까지 양껏 쓰다듬어주었다.

* * *

한성 길드 길드장 한성진.

유약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꽤 결단력 있는 그는 오랜만에 고민에 빠져있었다.

그는 책상 앞에 앉아 종이를 한 장씩 넘기며 작게 중얼거렸다.

“흐음···. 이걸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그때, 똑똑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오세요.”

문이 열리고 들어온 건 유희진이었다.

“저 부르셨다고 들었어요.”

“아아, 맞아. 거기 편하게 앉아.”

유희진이 책상 앞 회의용 탁자에 앉자, 한성진도 그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한성진과 마주 앉은 유희진은 살짝 긴장감을 느꼈다.

그녀가 한성 길드에 들어온 지도 어언 8년째.

많은 일을 함께 한 사이인데도 길드장은 왜인지 어려운 면이 있었다.

길드장과 비슷한 나이대에, S급 헌터이기도 한 성민혁과는 말까지 트고 지내

는데 이 사람에게는 꼭 예의를 지켜야 할 것 같았다.

크게 화내는 걸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부드러운 사람인데, 전혀 만만한 느낌이

없었다.

그러나 편한 정도와 관계없이 그는 한성 길드에서 가장 의지할 수 있는 사람

이었다.

그녀뿐만 아니라 다른 길드원들도 비슷한 생각일 것이다.

“여기.”

한성진이 유희진에게 종이 뭉치를 하나 건넸다.

“얼마 전에 보고받은 건인데··· 의견 좀 들어보고 싶어서. 이런 이야기 들어

본 적 있어?”

그가 내민 보고서에서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던전 식당’이라는 글자였다.

“던전 식당? 아, 들어봤어요. 길드원들도 한 번씩 말 꺼내더라구요.”

“우선 한 번 읽어보고 얘기하자.”

유희진은 보고서를 훑어보았다.

내용은 좀 부실했다.

식당을 다녀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와 이런 특수한 스킬이 과연 존

재할 수 있을지에 대한 분석이 다였다.

그리고 결론은 이 소문이 진실일 가능성은 매우 희박하다고 마무리되었다.

유희진이 마지막 장을 덮으며 고개를 들었다.

“결론은 보고서에 나와 있네요? 던전 식당이 실제로 존재할 가능성은 극히 희

박하다고.”

“그렇지.”

“그런데 저한테 굳이 의견을 물어보시는 이유는, 그 결론에 동의하지 않기 때

문이신가요?”

유희진의 질문에 한성진이 싱긋 웃었다.

“완전히 동의하지 않는 건 아니야. 이성적으로 생각하면 그런 게 있다는 게

더 이상한 소리지. 처음에는 완전히 무시했는데, 자꾸 실제 식당을 경험했다

는 사람이 늘어나고 있어서 확인차 네 의견을 물어보는 거야. 만에 하나 이

소문이 진짜라면 환각을 보여주는 신종 몬스터가 나타났다는 주장에 더 큰 힘

이 실린 것 같더라고.”

사실, 이번 소문이 그리 특별한 일은 아니었다.

세월이 꽤 흘렀음에도 던전과 각성 능력은 여전히 신비롭게 여겨지는 면이 있

었다.

때문에 출처를 알 수 없는 소문은 언제나 존재했다.

특히나 이번 일처럼 말도 안 되는 스킬과 관련한 소문은 모두 거짓으로 판명

났었고.

‘하지만···.’

유희진은 오랜 세월 헌터로 일하면서 이제 던전과 몬스터에 대해서는 꽤 빠삭

하다고 스스로 생각했다.

평소의 그녀였다면 이런 허무맹랑한 소리는 당연히 거짓 소문 취급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그런 확신을 내리기 어려웠다.

‘최근 들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발생하고 있지.’

알 만큼 아는 줄 알았는데, 그게 오만이었다는 생각이 드는 요즘이었다.

유희진이 말했다.

“···저는 실제 존재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왜지?”

“사실 그냥 감이에요. 지금까지 많이 익숙해졌지만, 사실 던전에 대해서는 완

벽하게 밝혀진 게 없잖아요. 우리가 알고 있는 것, 예측하는 걸 넘어서는 일

이 또 얼마든지 있을 것 같아서요.”

그 말을 듣고 잠깐 침묵하던 한성진이 입을 열었다.

“만약 이게 정말 실존한다면, 절대 놓쳐선 안 되겠지. 검토해 봐야겠네. 이런

능력이 존재한다면 우리에게 어느 정도 이익이 될지, 그리고 얼마까지 투자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본 적 없는 부분이었기에 정확히 산출하기도 어렵고, 꽤 시간이 드는

일일 것이다.

다른 길드에서는 애초에 시간 낭비로 여겨 시행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리고 실제로 시간 낭비, 인력 낭비가 될 가능성이 훨씬 더 컸다.

영웅 길드장이 봤으면 쓸데없는 짓 한다고 코웃음 쳤을 것이다.

“혹시라도 추가적인 정보가 들어오면 우리가 가장 빨리 행동할 수 있도록 대

비해놓고.”

“···네. 알겠습니다.”

한성진의 말에 유희진이 답했다.

평소와 달리 목소리에 힘이 좀 없었다.

아무래도 자신의 대답이 길드장의 결정에 영향을 준 것 같다.

대답을 잘못해서 쓸데없는 일이 벌어진 게 아닌가 싶기도 했다.

유희진은 속으로 생각했다.

‘···진짜 있었으면 좋겠네. 던전 식당.’

* * *

홍재훈이 병원에서 터덜터덜 걸어나왔다.

우리 병원의 장비로는 몸에 이상을 찾을 수 없다.

아주 건강한 상태로 보이고 이상이 있다면 정신적인 문제일지도 모른다.

우선은 식사 잘 챙겨먹고 운동하고 푹 쉬어보라는 말만 듣고 나왔다.

벌써 7번째 병원 방문인데 다들 비슷비슷한 소리만 하고 있다.

의사의 말을 곱씹던 홍재훈이 머리를 헝클이며 발악하듯 소리쳤다.

“와아아악! 진짜 미치겠네!”

지나가던 사람들이 미친놈처럼 보며 그를 피해 갔지만, 지금 그런 걸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왜! 왜! 대체 이유가 뭐냐고!”

최근 2주간 그는 거의 지옥에서 살았다.

아무리 스킬을 쓰려고 안간힘을 써봐도 그게 되지 않았던 것이다.

당황하는 사이 오크가 덤벼들었고, 동료가 도와주지 않았더라면 크게 다칠 뻔

했다.

컨디션이 안 좋아서 그런 건가 싶어서 하루 정도 기다려봤지만 나아지는 게

없었다.

병원을 가봐도, 아는 힐러를 만나봐도 소용이 없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밥이 넘어가지 않고 스트레스로 잠도 제대로 잘 수 없었다.

‘오늘은 진짜 해결될지도 몰라 아니 반드시 해결해야지.’

홍재훈은 애써 마음을 다잡았다.

몇 시간 후, 친척을 통해 소개받은 A급 힐러가 그의 증상을 확인해보기로 한

것이다.

겨우 D급 헌터인 그가 이렇게 A급 힐러의 치료를 받을 수 있게 된 건 기적 같

은 기회였다.

홍재훈은 이번에야말로 이 이상한 몸 상태의 원인을 알아낼 수 있을 거라 기

대했다.

그러나 상황은 생각대로 흘러가지 않았다.

A급 힐러 차주희가 그의 팔뚝에 얹었던 손을 떼며 고개를 갸웃했다.

“음···. 저는 전혀 모르겠어요. 정상적인 헌터들과 크게 다른 점이 없는 것

같은데요.”

“아니, 그러지 말고 한 번만 다시 봐줘요.”

“벌써 세 번짼데···.”

“뭐 놓친 걸 수도 있잖아요. 제발 좀···!”

얕은 한숨을 내쉰 차주희가 다시 한번 그의 손목을 잡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몇 분 후, 또 한 번 고개를 저었다.

“역시 정상입니다.”

“아니, 분명히 문제가 있는데 어떻게 정상입니따. 그, 그럼 저는 계속 이렇게

살아야 하는 거예요? 어떻게 D급까지 올라갔는데 다시 비각성자로 살라고요?

각성해서 직장도 그만둔 건데 인제 와서 어떻게 돌아갑니까!”

“그걸 저한테 얘기해봤자···.”

“아니, 제발 저 도와줘요. 진짜 왜 이런 건지 이유라도 알고 싶어요.”

애걸복걸하는 홍재훈을 보며 차주희가 잠깐 생각에 빠졌다.

“가능성이라면... 흠, 혹시 S급 헌터나 몬스터를 마주친 적이 있나요?”

“네? 그럴 리가요. S급 몬스터를 만났으면 전 이미 죽어있겠죠.”

“그렇죠? 그럼 S급 헌터는요?”

홍재훈은 고개를 저었다.

전국에 몇 명 되지도 않는 S급 헌터가 일개 하급 헌터인 자신과 접점이 있을

리 없었다.

“그럼 이 가설은 전혀 가능성이 없어요. 그래서 굳이 얘길 안 했던 건데.”

“아뇨. 말해주세요! 그게 제 증상이랑 무슨 상관있는지!”

지푸라기라도 잡아야했기에 홍재훈이 거의 울듯한 표정으로 말했다.

“흠···. 이건 정말 확실하지 않은, 그냥 진짜 만에 하나의 가능성에 대한 얘

기라는 건 알아두세요.”

“네. 일단 얘기해줘요.”

차주희는 자신의 생각을 간단히 풀어놓았다.

힐러가 체력이나 마나 회복, 외상 치료를 할 경우에는 대상이 누구에게 공격

당했는지 전혀 관계없다.

그러나, 신체에 지속적인 영향을 주는 공격, 즉 디버프 마법이나 독성 효과가

있는 마법의 경우 그걸 치료하는 데는 일부 제약이 있다.

힐러보다 등급이 지나치게 높은 자가 행한 공격일 경우에는 치료가 어려운 것

이다.

능력의 차이가 클수록 치료의 어려움은 점점 더 커지고, 심한 경우에는 무슨

문제가 있는지 진단하는 것조차 어렵다.

“사실 저는 여태까지 그런 적이 없었어요. 자랑은 아니지만 저는 A급 힐러고,

S급 몬스터의 저주 마법에 걸린 헌터도 치료해본 적 있지요. 시간이 오래 걸

리긴 했지만 결국은 완전히 해결했고요. 그런데 제가 아예 감지조차 하지 못

할 정도의 문제면 S급 이상의 누군가에게 당한 거여야 하는데 사실 그럴 가능

성은 없으니까요. 그래서 굳이 말하지 않으려 했던 거고요.”

“······.”

“말씀하셨다시피 S급 몬스터를 만났을 리도 없고 설령 정말 뛰어난 S급 헌터

와 마주쳤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당신에게 이런 일을 할 이유가 없을 테니까.”

차주희의 말이 맞았다.

이건 가능성 없는 가설이었다.

본인이 감당할 수 있을 만한 던전만을 다닌 그는 A급 힐러보다 뛰어난 무언가

를 만난 적이 없다.

문득 말도 안 되는 생각이 떠올랐다.

처음에 의심했다가 우연히 시기가 겹친 것뿐이라고 생각했던 일.

그의 몸 상태가 이상해지기 시작한 건 에프 놈의 그 요상한 던전식당에서 나

왔을 때부터였다.

처음에는 당연히 던전 식당에서 먹었던 음식을 의심했었다.

그러나 그 의심은 빠르게 접어야 했다.

함께 식사한 헌터들 중 문제가 생긴 건 오직 자신뿐이었다.

심지어 한 그릇씩 따로 먹었던 것도 아니고 한 접시에 담긴 보쌈을 같이 먹었다.

그러니 음식의 문제는 아닐 거라는 결론이 타당했다.

하지만 만약에··· 그 에프 놈이 자신에게 따로 무슨 수를 쓴 거라면?

‘말도 안 돼.’

그놈한테 그런 능력이 있을 리가 없다.

그 요상한 던전 식당을 얻은 것만 해도 엄청난 행운인데, 거기에 뭔가 더 가

지고 있리가.

3년 내내 F급으로 어느 파티에서도 달가워하지 않던 놈인데···.

“그럼 이만 일어날게요. 전 다음 일정이 있어서.”

“예···.”

자기 생각에 빠져 건성으로 대답하는 홍재훈을 두고 차주희는 빠르게 자리를

떴다.

홍재훈은 한참만에 결론을 내렸다.

설마설마 했는데 이쯤이면 의심되는 사람이 그놈밖에 없다.

직접 한 일이 아니라도 뭔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홍재훈은 빠르게 핸드폰을 열어 연락처를 뒤지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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