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서열 (33/125)

      서열

스켈레톤은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칼로스에게로 접근했다.

“···크르르륵. 크륵.”

“뭐냐. 내가 쓸데없이 귀찮게 하지 말라고 했을 텐데.”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으나 날카로운 반응이 되돌아왔다.

스켈레톤이 조금 주춤거리다가 굽신거리며 다시 입을 열었다.

“끄, 크크르···.”

“뭐라고?”

“크르르륵. 끄으···. 크크르.”

칼로스가 벌떡 일어나 불같이 화를 냈다.

“뭣! 또? 또 돌아다니고 있다고? 아까 한 번 왔다 갔잖아! 이제 하루에 두 번

씩 찾아올 셈인가!”

스켈레톤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한마디 덧붙였다.

“크르르···. 켁, 크르.”

“···다른 놈이 하나 더 있다고?”

“크륵···.”

으드드득.

칼로스의 손에 의자의 손잡이가 종잇장처럼 으스러졌다.

“···다녀오겠다.”

타앗!

칼로스가 땅을 박차고 날아올랐다.

감히 그에게 공포심을 줄 정도의 힘을 가진 그자가 누구인지, 멀리서라도 확

인해 볼 생각이었다.

* * *

“아주 재미가 붙었네.”

베로와 호빵이, 찐빵이, 만두는 얼마 전부터 나를 빼고 마계에 놀러 다니기

시작했다.

안전을 위해 베로에게 마석을 걸어주고 알아서 다녀오라고 한 이후부터 그게

자연스러워진 것 같았다.

심지어 최근 4일간은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매일 나가서 놀다 들어온다.

자기들끼리 뭐가 그렇게 재미있는지 궁금해서 오늘은 나도 따라가 보기로 했다.

“웡웡웡.”

“삐이이이?”

“웡!”

“삐이잇!”

“삐이이이익!”

“······.”

뭔가 자기들끼리 신나보이기는 한데, 솔직히 뭘 재미있어하는 건지는 모르겠다.

별것도 아닌 썩은 나무줄기 같은 걸 보면서 신기해하는 걸 보면 아마 나는 영

영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나는 마계를 둘러보며 잠자코 뒤따라 걸었다.

딱히 구경할 게 많은 세상이란 생각은 들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음산하고 어두운 분위기였고, 어차피 내가 처음 넘어갔을 때의 아

스키나 대륙과 별 다를 것 없는 느낌이라 새롭지도 않다.

그렇게 베로와 슬라임들을 따라 한동안 마계를 거닐던 중, 무언가 수상한 감

각이 느껴졌다.

나는 신나게 통통 튀며 앞서 나가는 녀석들을 내버려 두고, 자리에 멈추어 섰다.

저쪽 절벽 위 바위 근처에서 뭔가가 이쪽을 뚫어져라 노려보고 있다.

정체는 알 수 없으나 결코 호의적이지 않은 시선임은 확실하다.

타앗!

단숨에 발돋움하여, 그놈과의 거리를 좁혔다.

검은 덩치가 순식간에 내 시야를 가득 들어왔다..

내 1.5배 정도는 될 것 같은 거대한 몸집.

짐승의 가죽처럼 단단해보이는 검은 피부.

사람보다는 동물에 가까운 얼굴.

관자놀이쯤에서 시작해 아래로 꺾인 커다란 두 개의 뿔까지.

‘마족인가?’

아스키나 대륙에서 이와 비슷하게 생긴 놈들을 몇 번 마주친 적이 있었다.

이놈과 비교하자면 좀 작고, 약한 느낌이었던 것 같간 하다.

‘강했었지.’

놈들은 일반적인 몬스터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

었다.

아마 대륙으로 넘어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놈들을 마주쳤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해보지도 못하고 즉사했을 것이다.

운 좋게도 수십 년 후에나 만나게 되어, 나의 아주 든든한 자양분이 되어주었

지만.

“허억!”

가까이서 마주한 마족은 기겁하여 눈을 크게 뜨고 얼굴을 상체를 뒤로 뺀 채

굳어버렸다.

그러나 몇 초 지나지 않아, 놈은 빠르게 정신을 차리고 도망치려는 듯 거대한

검은 날개를 펼쳤다.

나는 놈이 날아오르기 전에 좀 더 다가가 덥썩 멱살을 붙잡았다.

악력으로 목 가죽을 쥐어뜯듯이 잡았더니 속절없이 허리가 굽혀진다.

“크윽! 뭐··· 무슨 짓을 하려고···!”

당황한 것 같지만 성급히 힘을 쓰진 않는다.

사리 분별은 할 줄 아는 놈인 것 같다.

“넌 뭔데 우릴 지켜보고 있었지?”

싸늘하게 묻자 마족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리고 아닌 척 낮은 목소리로 되묻는다.

“너야말로 정체가 무엇이냐!”

“너부터 밝혀라. 내가 먼저 물었다.”

“나, 나는 마계 제1군단장 칼로스님이시다.”

위엄있게 말하려고 한 것 같은데, 처음부터 더듬어버려서 많이 없어 보였다.

게다가 자기보다 덩치가 작은 나에게 멱살이 잡혀 끌려내려 온 자세라, 더더욱.

“왜 날 지켜보고 있었지?”

내 말에 마족의 못생긴 얼굴이 일그러지며 억울함으로 가득 찼다.

억울?

아니, 자기가 몰래 숨어 노려보고 있었으면서 이건 또 뭐 하자는 건가.

황당해하며 보고 있자니, 마족이 입을 열었다.

“네놈들이 먼저 내 영지에 쳐들어온 것 아닌가! 한두 번도 아니고 계속! 저,

저, 이상한 슬라임과 케르베로스를 앞세워서···! 그래서 나는 그냥 네 정체를

좀 확인해보려고···.”

“아, 여기가 네 땅이었구나.”

“그렇다···!”

동조해주니 열심히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까지 베로와 슬라임들이 이쪽으로 계속 산책을 나왔지만 아무 일도 없었다.

그런데 말하는 거 보니 전부터 알고 주시하고 있었던 것 같다.

베로도 마계 군단장이라는 이놈에 비하면 한없이 약한데, 전혀 손대지 않았던

거다.

그럼 내가 준 마석의 힘을 이미 확인했을 거라 짐작할 수 있다.

어느 정도 눈치 있고 상황판단은 할 줄 아는 놈인 것이다.

그리고 말도 할 줄 안다.

‘···괜찮겠는데?’

사실 마계에 대해 그리 자세히는 모른다.

하지만 정확히 아는 게 하나는 있다.

마계는 모든 것이 힘의 논리로 해결되는 세계라는 점.

그 무엇보다도 서열이 중요한 곳이다.

앞으로 편해지려면 한 번 눌러줄 필요가 있을 것이다.

‘마침 잘됐네.’

자기 땅도 가지고 있고, 군단장이 어쩌니 하는 걸 보니 이곳에서 꽤 높은 자

리를 차지하고 있는 것 같다.

우우우웅.

주변의 공기가 약하게 진동했다.

마족이 흠칫 놀라며 눈알을 굴렸다.

“왜, 왜··· 갑자기···.”

대화할 것처럼 하다가 마나를 일부 개방했더니 크게 당황한 것 같다.

“이름이 뭐랬지?”

“카, 칼로스. 마계 제1군단장이다.”

굳이 굳이 저 말을 덧붙이는 거 보면 자부심이 대단한 모양이다.

“칼로스.”

“어디 감히 나의 이름을 함부로···!”

칼로스가 눈을 시뻘겋게 뜨며 나를 노려본다.

마나를 조금 더 개방했다.

“칼로스.”

“······.”

다시 한번 불러보니 이번에는 대답 없이 고개를 푹 숙여버렸다.

“좀 맞아볼래? 아님 그냥 항복할래?”

“······.”

“대답 없으면 맞아보고 싶은 걸로 알겠다. 힘 조절은 못해.”

흠칫 놀란 칼로스가 아까보다 현격히 작아진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 그, 머리가 하나뿐인 케르베로스가 가진 마석의 주인이 맞습···?”

“그래.”

“그럼 저는 당신을 이길 수 없···. 항복하겠···.”

자존심을 억누르는 듯 이를 악물고 말한다.

나는 차가운 목소리로 받아쳤다.

“진작에 굽힐 것이지 왜 버틴 거야?”

“그건··· 아깐 워낙 교묘하게 기운을 숨기고 있어서···. 솔직히 긴가민가 했

습···. 그보다, 대체 누구신지···.”

누구냐니, 보통 자기소개라고 해봤자, 이름, 나이, 하는 일이 전부인데 이놈

이 그걸 궁금해하는 건 아닐 것 같은데.

나는 대충 마족이 알아들을 법한 정도로 말했다.

“최현호. 지구인이고, 얼마 전까지는 아스키나 대륙에서 살았었지.”

“······아!”

칼로스가 뭔가 떠오른 듯 감탄사를 내뱉었다.

“나를 알고 있는 건가?”

“누구의 도움도 없이 스스로 초월자의 경지에 다다른 인간에 대해 들은 적이

있···. 그게 바로 당신···.”

아마 내가 맞는 것 같다.

그보다, 아까부터 굉장히 거슬리는 부분이 있다.

나는 칼로스를 가만히 노려보았다.

“저기···.”

“왜.”

“이것 좀 놔주시면···. 목 가죽이 늘어날 것 같습···.”

“···그런데 너 말을 왜 끝까지 안 하는 거냐?”

“······예?”

“말끝을 왜 다 잘라먹느냔 말이다.”

“······.”

대답을 안 한다.

차마 자존심을 못 내려놓겠다 이거다.

“그래, 그럴 수 있지. 보아하니 부하들 거느리고 명령하는 재미로 살았던 놈

같은데, 이런 상황이 많이 낯설거야.”

“···마, 맞습···!”

“내가 좀 도와줄게.”

“······?”

“그 자존심 내려놓을 수 있게. 아무래도 조금 맞는 게 좋겠다.”

“예? 아, 아니··· 그럴 필요는···.”

이미 늦었다.

아무래도 이놈은 좀 강하게 다뤄야 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퍼억!

“잠깐···! 아니, 으아아아아악!”

퍽! 퍽! 퍼억! 콰앙!

칼로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크게 힘 조절하지 않아도 버틸만한 상대라 타격감이 꽤 좋았다.

그 와중에 이놈은 주변에 결계를 쳐서 소리가 영지까지 퍼져나가지 않도록 했다.

자기 부하들에게 이런 꼴을 들키는 게 엄청나게 싫은 모양이었다.

그렇게 한참이 지났다.

칼로스가 울퉁불퉁 혹이 난 얼굴을 매만지며 말했다.

한쪽 눈꺼풀은 퉁퉁 부어 제대로 뜨지도 못한다.

아까보다 더 못생겨졌다.

“···무슨 일이든 협조하겠습니다. 최현호 님. 케르베로스와 슬라임에게는 혹

시 모를 공격을 하지 않도록 단단히 경고하고 필요하다면 경호도 붙여드릴 수

있습니다.”

한층 더 고분고분해진 칼로스를 나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바라보았다.

“아니, 그럴 것까진 없고 그냥 마음대로 돌아다니게 놔둬. 놀라서 도망치는

척하면 좋아하니까 가끔 그런 거나 해주고.”

“아, 알겠습니다.”

슬쩍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웡! 웡! 웡!”

“삐이이이이!”

베로와 슬라임들이 두리번거리며 나를 찾는 것 같다.

실컷 놀고 나서야 내가 없어진 걸 알아챈 모양이다.

“일단은 가봐야 할 것 같네. 나중에 궁금한 게 생기거나 필요한 거 있으면 다

시 찾아올게.”

“네. 저 그런데 현호 님···. 부탁 하나만 들어주시면 안 되겠습니까···. 무리

한 건 아닌데···.”

“뭔데?”

“제가··· 그래도 체면이 있지 않겠습니까. 여긴 제 땅이기도 하고···.”

“그래서?”

“그, 부하들 앞에서는··· 제 체면 좀 세워주십시오.”

“하는 거 보고.”

“······.”

칼로스가 급격히 시무룩해졌다.

아까부터 하는 거 보면 진짜 그게 죽기보다 더 싫은 모양이다.

나는 씩 웃으며 칼로스에게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지내보자고.”

“예···.”

“싫어?”

“아, 아닙니다! 너무 좋습니다! 이런 기회가 생기다니 정말 행복합니다! 하하

핫···.”

엉망이 된 얼굴로 칼로스가 기분 좋은 척 웃는다.

아무래도 이제 자존심 세우기는 포기한 것 같다.

* * *

오늘은 등급을 재측정하기로 한 날이었다.

당연히 혼자 갈 생각이었는데, 강남웅 과장이 함께 가자고 연락을 해왔다.

헌터 관리국에서 내 일에 대해 신경 쓰고 있다는 티를 내는 게 아닐까 싶다.

어차피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궁금하기도 해서 굳이 거절하지는 않았다.

“잘 지내셨습니까.”

“네. 덕분에요. 과장님은···.”

차마 잘 지냈냐는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불과 4일 정도 지났을 뿐인데 사람 상태가 말이 아니었다.

묻지 않아도 던전 식당과 관련한 일로 고생 중이란 건 알 수 있었다.

“많이 바쁘시죠?”

“하하, 예. 사실 그렇긴 해요.”

제대로 정리되지 않은 까칠한 수염을 만지며 민망한 듯 웃는다.

깔끔했던 첫 만남 때와 달리 셔츠도 구깃구깃하다.

아니라고 말해봤자 못 믿을 몰골이란 걸 본인도 알고 있나 보다.

“그런데 사실 저보다 팀장님이 더 바쁘시죠. 저는 서류작업 위주로 하고 있

고, 팀장님은 다른 사람들이랑 직접 부딪치고 있거든요. 국장님과도 벌써 여

러 번 직접 만나 얘기하고 계세요.”

“고생 많이 하시네요. 아무래도 식당 관련한 일이 복잡해서···.”

“헛, 현호 씨 부담 가지시라고 한 말은 아니었습니다. 절대!”

강남웅 과장이 두 손을 내저으며 말을 이었다.

“원래 저희가 하는 일이 이런 건데요. 사실 일주일이 좀 무리한 건 맞지만 팀

장님은 원래 그런 걸 즐기는 사람이라 딱히 그런 생각도 없을 거예요.”

“그런 걸 즐긴다고요?”

“네. 달성하기 어려운 목표가 있을수록 불타오르는 사람이거든요. 거기 맞춘

다고 제가 고생 좀 많이 했었어요. 뭐, 그래도 몇년 같이 일했더니 이제 웬만

한 일은 다 쳐낼 수 있습니다. 하하하.”

“특이한 분이네요.”

“아무래도 좀 그렇죠?”

이런저런 이야기 나누는 사이 어느새 헌터 협회에 도착했다.

헌터 관리국에서 미리 얘기를 해둔 덕에 별다른 대기시간 없이 바로 검사를

받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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