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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속 지켰습니다 (34/125)

      약속 지켰습니다

검사관이 결과지를 출력하며 말로 먼저 알려주었다.

“음···. 조금 복잡한 결과가 나왔어요.”

그리고 나와 강남웅 과장의 앞쪽에 종이를 펼쳐주며 손가락으로 한 부분을 가

리켰다.

그곳에는 ‘등급 : 측정 불가’라는 글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측정 불가 등급이란 게 어떤 의미인 거죠?”

내 질문에 검사관이 친절하게 대답해주었다.

“좋고 나쁘고를 판단할 건 아니고, 말 그대로 측정 불가, 특정 부분에서 정확

한 값이 나오지 않은 겁니다. 여길 보세요.”

검사관은 손가락을 옮겨 종이의 다른 부분을 짚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우선 제대로 결과값이 나온 부분부터 살펴보면, 전반적으로 1년 전 검사했을

때와 크게 달라진 점은 없어요. 신체 건강 상태는 좋아진 것 같은데 이 부분

은 사실 각성 능력과 크게 관련 있는 게 아니라서··· 헌터로서의 능력에는 변

화가 없다고 봐야겠죠.”

결과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었다.

어차피 내가 얻은 힘과 마나는 지구의 각성자들이 가진 능력과는 결이 다르다.

정확히 파악하지 못하는 게 당연한 일이었다.

검사관이 말을 이었다.

“드물게 이런 측정 불가 등급이 나오긴 해요. 그런데 현재 측정이 되지 않는

부분은 지금 기술력의 한계이기 때문에 어쩔 수가 없습니다.”

“그렇군요.”

“그래도 측정된 부분으로 등급을 추정할 수는 있지요. 일단은 F급으로 봐야

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싱긋 웃으며 덧붙였다.

“실제로 측정 불가 등급이 나오더라도 아주 일부분의 오류니까요. 추정한 등

급과 실제 능력에 큰 차이는 없다고 보시면 됩니다. 헌터증 재발급은 안 받으

셔도 되겠네요.”

“알겠습니다.”

나는 덤덤히 대답하고 협회 밖으로 나왔고, 강남웅 과장도 조용히 따라 나왔다.

그가 목소리를 낮춰 말했다.

“역시 최현호 씨의 던전은 현재 기술로 측정되지 않네요. 사실, 워낙 상식을

벗어난 거라 저도, 송 팀장님도 예상하고 있긴 했습니다. 그래도 그, 등급이

라는 것보다는 실제 가치가 더 중요한 거죠. 제가 생각할 때는, 아니 누가 봐

도 최현호 씨의 던전은 S급 이상의 가치가 있습니다.”

혹시나 F급이라는 말에 내가 상심하지 않았을까 염려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오류가 난 부분이 딱 던전과 관련한 부분일 거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이미 그것만으로도 보통 사람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의 한계를 넘어선 것이다.

그걸 넘어서는 더한 능력이 있을 거라는 생각은 하기 어렵겠지.

그렇게 생각해주면 나에게는 오히려 좋은 일이다.

“알고 있습니다.”

덤덤한 내 대꾸에 강남웅 과장이 씩 웃으며 다시 입을 열었다.

“상황이 이렇게 됐으니, 최현호 씨에 관해서는 헌터 관리국에서만 알고 있는

걸로 하겠습니다. 신상 정보는 최대한 유출되지 않는 걸 원하시니까요. 협회

측에는··· 시간이 좀 지나고 나서 알려도 될 것 같고요.”

“그렇게 해주시면 좋겠습니다. 영업을 하면서 알게 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괜히 처음부터 이목을 끌어서 귀찮아지고 싶진 않거든요.”

“그래도 헌터 관리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고 나면 아무래도 관심이 생길 수

밖에 없긴 할 겁니다.”

“알아요. 뭐, 그 정도는 제가 감수해야죠.”

강남웅 과장이 고개를 끄덕이며 시계를 보았다.

시간에 쫓기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싱긋 웃으며 말했다.

“바쁘실 텐데 이만 들어가시죠. 저도 할 일이 있어서요.”

“아, 그러십니까?”

“네. 일 마무리되시면 식당에 놀러 오세요. 송 팀장님이랑 함께.”

“오오오, 그래도 될까요?

원래라면 극히 예외적인 경우를 제외하고, 비각성자가 던전에 들어가는 건 금

지된 일이다.

지난번 관리국 사람들과 협의할 때, 앞으로 던전 식당을 어떻게 운영할 것인

지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부분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처럼 내가 자유롭게 운영할 수 있도록 밀어붙이

겠다고 송혜연이 약속했다.

거기에 더하여, 비각성자라 할지라도 나와 헌터 관리국의 송혜연이 함께 동의

할 경우, 그 사람은 던전 식당에 출입할 수 있도록 방문증을 발급해주기로 했다.

별다른 얘기가 없는 걸 보면 이것도 잘 추진되고 있는 것 같다.

“사실 그때 되게 맛있게 먹어서 또 생각이 나더라고요···.”

강남웅이 그때 먹은 짬뽕을 떠올리는 듯 입맛을 다셨다.

“스트레스 확 풀릴 만한 걸로 만들어드릴게요. 원하시는 메뉴가 있으면 오기

전에 말해주셔도 좋고요.”

“그럼 그 생각하면서 버텨야겠네요.”

피곤해 보이던 강남웅의 얼굴에 조금 화색이 돌았다.

* * *

헌터 관리국 사람들과 처음 만난 날로부터 딱 일주일이 흐른 날의 저녁.

송혜연이 나에게 직접 연락을 주었다.

- 약속 지켰습니다.

속으로 조금 놀랐다.

너무 촉박한 일정인 것 같아서, 사실 큰 기대는 하지 않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온 연락도 조금 더 기간이 필요하다는 얘길 하려는 걸 거라 예상하고 있

었다.

나는 진심으로 감탄하며 말했다.

“진짜 능력 있으시네요. 솔직히 반신반의하고 있었어요. 일주일은 누가 봐도

너무 타이트한 일정이었잖아요.”

송혜연이 작게 웃으며 대답했다.

- 가능할 거로 생각해서 약속한 거였어요. 국장님을 아주 집중적으로 설득했

고, 생각대로 잘 풀렸네요. 저희 국장님이 되게 까다로우신데, 그런 만큼 한

번 내 편으로 끌어오면 그만큼 큰 힘이 돼 주시거든요.

아무렇지 않게 말하려는 것 같은데 은근한 목소리에 뿌듯함이 묻어났다.

다만, 내가 직접 해야 할 서류 작업이 있어서 반나절 정도 관리국에 찾아가

이것저것 작성해야 했다.

적성에 안 맞는 일이지만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라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날 오후, 헌터 관리국에서 던전 식당의 존재에 대해 공식적으로 인

정한다고 공표했다.

소문으로만 퍼져나가던 이야기였다.

경험담이 늘어나고 있음에도 말도 안 된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많던 상황이었다.

폭탄선언처럼 터진 이야기였기에 소문을 믿었던 사람들도, 믿지 않았던 사람

들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헌터 커뮤니티는 사이트가 터질 정도로 많은 글이 올라왔다.

그때 내 말이 맞았었다, 왜 안 믿었었냐, 억울함을 토로하는 글도 올라왔고,

진짜인지 거짓인지 모를 경험담들이 또 한가득 쏟아졌다.

그 와중에도 일부는 누가 헌터 관리국을 사칭한 것이 아니냐고 의심하기도 했다.

‘완전 난리네, 난리.’

잠깐 외출했더니 지나가던 사람들도, 온통 던전 식당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온라인, 오프라인 할 것 없이 전 국민적인 화젯거리가 된 것이었다.

당분간은 던전 식당에 대한 얘기로 떠들썩할 것 같다.

아무래도 던전 일은 그저 남의 얘기처럼 생각하는 비각성자보다 헌터들에게

더 직접적으로 와닿겠지.

하지만 모든 것이 그렇듯이, 며칠만 지나면 화제성이 어느 정도 사그라들 것

이다.

사람들은 생각보다 빠르게 적응하고 빠르게 잊어버리니까.

- 대한민국 헌터 관리국에서 공식적으로 인정하는 순간, 국제적으로도 크게

관심을 가질 거예요.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들은 이게 얼마나 대단한 능력인지

알 테니까요.

어제 송혜연이 했던 말이다.

나는 가능한 귀찮은 일에 휘말리지 않도록 알아서 커트해달라고 요청했다.

송혜연은 흔쾌히 알겠다고 대답했다.

나 같은 특수 능력자는 국가적인 자산이나 다름없다며, 오히려 다른 나라의

제안에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아 안심된다는 말을 덧붙였다.

“크으으-“

기지개를 켜며 뻐근한 근육을 풀었다.

그거 좀 쉬었다고 몸이 찌뿌둥했다.

“오랜만에 문 열어볼까?”

일주일만의 재영업이다.

나는 눈을 감고 마계를 돌아다니는 헌터들의 기운을 감지해보았다.

* * *

열흘이 흘렀다.

요 며칠간 우연히 식당의 입구를 마주한 헌터들은 로또라도 걸린 듯 기뻐하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솔직히 좀 부담스럽네.’

던전 식당 자체가 헌터들 사이에서 너무 큰 화제가 되다 보니 기대감도 함께

커진 것이다.

그 기대감은 사냥 중 휴식하고 음식을 먹을 수 있는 공간 자체에 대한 것이었

으나, 그렇다고 음식에 대한 평가가 배제된 건 아니었다.

다들 만족하는 것 같긴 한데, 그래도 요리하는 데 약간 부담이 되었다.

나는 반응이 좀 잠잠해지기를 기다리며 매일 조금씩 손님들을 받았다.

헌터 관리국에서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강남웅과 송혜연 둘 다 정말 올 것처럼 굴었으니 아마도 아직도 바쁜 일이 끝

나지 않았을 것이다.

최대한 나를 귀찮게 하지 않으려는 것 같은데도, 종종 나에게 동의해달라거나

서명해달라는 연락이 왔으니까.

그때, 게이트 쪽에서부터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한 무리의 헌터들이 홀 안으로 우르르 들어왔다.

“드디어 찾았어!”

“고생한 보람이 있네요!”

그들은 자기들끼리 뭔가 자축하며 환하게 웃고 있었다.

‘길드에서 찾아온 건가?’

모두가 유니폼으로 보이는, 동일한 전투복을 입은 걸 보니 아무래도 맞을 것

같다.

그 중 한 남자가 앞장 서서 나에게 다가왔다.

30대 후반에서 40대 초반 정도 되어보이는 얼굴에 눈이 약간 처진 남자였다.

그가 장갑을 벗으며 나에게 악수를 청했다.

“반갑습니다. 한성 길드 길드장 한성진입니다.”

한성 길드.

대한민국 4대 길드 중 하나.

한국의 헌터들이라면 한 번쯤은 들어봤을 길드였다.

4대 길드 중 1순위로 꼽히는 길드는 가장 규모가 크고 강한 헌터가 많다는 평

을 받는 영웅 길드였다.

한성 길드는 그에 비하면 소수 정예로 이루어진 조금 작은 길드였고.

그럼에도 무시못할 저력을 가진 길드이기도 했다.

한때는 나도 한성 길드나 영웅 길드에 들어가면 좋겠다는 꿈을 꾸기도 했었다.

물론 F급 따위는 받아주는 곳이 아니었기에 그저 꿈에 그쳤지만.

나는 그의 손을 맞잡고 악수했다.

식당에 들어와서 사장에게 악수를 청하는 거 보니, 아무래도 순수하게 밥을

먹으러 들어온 것 같진 않다.

한성진이 뒤쪽의 헌터들을 스윽 한번 훑어보고는 나에게 말했다.

“식사 한 끼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동료들이 많이 지쳤거든요.”

“물론이죠. 자리에 편하게 앉으세요.”

나는 흔쾌히 대답했다.

식당에 와서 식사하겠다는 데 거부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어쨌든, 다짜고짜 목적을 밝히며 들이댈 생각은 아닌 것 같았다.

그 부분은 좀 마음에 들었다.

한성진을 포함한 일곱 명의 헌터들이 털썩털썩 식탁 앞에 앉았다.

“와아···. 힘들다 진짜.”

“쪄 죽는 줄 알았어요.”

“그러니까. 몬스터가 무서운 게 아니라 더위가 더 무서워.”

“이제 좀 살 것 같아요. 숨이 턱턱 막혔었는데.”

인제 보니 다들 얼굴이 땀범벅이다.

철컥철컥 방어구를 벗으니 옷도 젖어 있었고, 머리까지 축축한 헌터도 있었다.

물을 가져다주자 서로 벌컥벌컥 마시는 바람에 금방 동이 나버렸다.

나는 물통을 넉넉하게 더 가져다주면서 물어보았다.

“사막 던전에서 들어오신 겁니까?”

“네. 맞습니다. 더울 거라고 예상은 했는데, 그렇다고 전투복을 벗을 수도 없

어서 버텨야만 했죠. 사막일수록 맹독을 지닌 몬스터가 모래 아래에서 공격할

수 있기 때문에 오히려 더 꽁꽁 싸매야 했습니다.”

한성진이 아닌 다른 헌터가 친절하게 설명해주었다.

나는 당연히 그런 걸 모를 거라 가정하고 하는 말이었다.

“사장님, 여기 메뉴는 어떤 게 있습니까? 이왕이면 시원한 걸로 먹고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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