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계약 (36/125)

      계약

“후우···.”

한성 길드의 길드장 한성준은 책상에 앉아 한숨을 내쉬었다.

표정에는 티 나지 않지만 사실 그는 굉장히 초조한 상태였다.

‘언제 오려나···.’

3일 내로 찾아오겠다던 던전 식당의 주인이 아직 오지 않았다.

오늘이 딱 3일째 되는 날이기에 혹시라도 마음이 바뀐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

이 들었다.

이름도, 연락처도 알 수 없기에 더욱 초조했다.

일반적인 계약 건들은 사실 아래에서 모두 처리하고, 길드장인 자신은 확인

후 결재만 한다.

이렇게 직접 계약하려고 기다리는 건 굉장히 특수한 경우였다.

그는 그만큼 이번 일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보통은 사냥을 가거나 미팅을 하거나 출장을 가느라 바빴기에, 이렇게 3일째

꼬박 길드장실을 지키고 있는 것도 12년 전 길드를 창립한 이후 처음이었다.

이렇게 을의 입장으로 계약을 기다리게 하다니···.

‘젊어 보였는데, 역시 보통내기는 아닌 것 같아.’

한성진은 아직 이름을 알지 못하는 식당 주인을 떠올리며 생각했다.

사실 현재 던전 식당에 제안한 조건은 한성 길드의 재정으로 좀 무리한 부분

이 있었다.

그러나 시간이 더 흐르면 다른 길드에서도 하이에나처럼 달려들 것이었다.

이 던전의 가치에 대해 진지하게 검토한다면 절대 놓칠 수 없으니까.

지금 무리해서라도 계약을 해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헌터 관리국에서 던전 식당에 대해 공표한 바로 그날부터, 한성 길드의 모든

길드원들은 쉴 틈 없이 던전을 돌아다녔다.

오직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던전 식당의 게이트를 찾아내기 위해서였다.

한성 길드의 구역뿐만 아니라 다른 지역의 게이트도 가리지 않고 드나들었다.

사실 굉장히 힘든 일정이었고, 열흘 만에 던전 식당을 찾아낸 건 행운에 가까

웠다.

기간이 더 길어졌다면 한성 길드 내부에서도 큰 반발이 생겼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만약 이번에 만나지 못하면···.

‘또다시 그걸 반복해야 하나···.’

나쁜 인상을 주고 싶지 않아 연락처를 캐묻지 않았는데, 그게 잘못된 선택이

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일을 후회하지 않는 편인 그였으나 이번 일에는 머리가 굉장히 복잡해졌다.

따르르릉.

그때, 책상 위의 전화가 울렸다.

- 길드장님, 던전 식당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다고 누군가 찾아오셨습니다. 말

씀하신 대로 바로 길드장실로 안내했으니 금방 도착할 겁니다.

한성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가 약속을 지킨 것이다.

* * *

벌컥.

길드장실의 문에 노크를 하려고 했는데, 그 전에 문이 열렸다.

한성진 길드장이 밖으로 달려 나온 것이다.

“잘 오셨습니다!”

지나치게 반가워하는 듯한 한성진과 악수를 하고 자리에 앉았다.

곧바로 직원이 다과를 내왔다.

“생각은 정리되셨습니까?”

조심스러운 한성진의 질문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차를 홀짝이며 내가 생각해둔 계약 조건에 관해 이야기를 시작했다.

한성진은 대부분 수용하였고, 나 또한 그쪽에서 원하는 부분에 크게 불만이

없었다.

계약은 자연스럽게 성사되었다.

헌터 관리국에 공개했던 공간 중 가장 널찍한 방 하나를 한성 한성 길드의 휴

게소로 쓰기로 확정했다.

그 공간으로 연결될 게이트는 총 3개.

게이트 중 하나는 한성 길드 구역의 최하급 던전에 고정시킬 것이다.

이렇게 되면 한성 길드원들은 이 게이트를 통해 항상 내 던전으로 넘어올 수

있게 된다.

지구와 연결할 수 있는 게이트는 하나뿐이고, 그건 내 집과 연결해 혼자 자유

롭게 사용해야 하기에 생각해낸 방안이었다.

그리고 나머지 두 개의 게이트는 사냥할 던전과 연결한다.

헌터들은 그 게이트를 통해 던전에 들어와 휴식을 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그 외의 다른 게이트로는 기존에 하던 방식대로 마계를 돌아다니는 헌터들을

찾아 연결할 생각이다.

어차피 기존의 영업 방식에는 간섭하지 않기로 했으니까.

휴게소는 일주일 중 5일간 이용할 수 있도록 했고, 게이트를 연결 횟수도 정

해두었다.

나로서는 무리할 것도, 손해 볼 것도 없었고, 한성 길드 또한 그만큼 이득을

얻을 수 있을 테니 서로 윈윈인 계약이었다.

한성진이 나에게 물었다.

“그럼, 지금 바로 게이트를 만들러 가는 게 어떻겠습니까?”

“여기까지 온 김에 처리하는 게 좋겠네요.”

나는 그의 말에 동의하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길드장실 밖으로 나가면서 한성의 몇몇 길드원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눴다.

지난번 식당에서 본 얼굴도 있었는데, 다들 꽤 등급이 높은, 길드 내 주요 인

물들인 것 같았다.

그들과 함께 이동해 도착한 곳은 한성 길드 구역에 속하는 동대문역 앞의 한

게이트였다.

들어가기 전에 한성진의 설명부터 들어야 했다.

“이곳은 하급 리자드맨이 나오는 일반 던전입니다. 벌써 수년째 리셋되지 않

고 같은 던전만 나오는 게이트라 한성 길드 소유의 던전 중 가장 안정적이면

서도 드나들기 쉬울 거라 판단했습니다. 이곳에 고정 게이트를 만들어주시면

적절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어차피 한성 길드원이 드나들 게이트였으므로 나는 딱히 의견 낼 것도 없었다.

나와 한성진 길드장 외에 여기까지 함께 온 다른 헌터들도 같이 게이트로 들

어갔다.

“이쪽으로 오세요!”

“안전하게 보호해드릴 테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들은 나를 둘러싸고 경호 태세를 취했다.

내 전투 능력을 F급 수준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심지어 이들은 각성 등급부터 높은 편이라 아예 F급 헌터와 함께 다닌 적이

없는 것 같다.

지나치게 조심스러운 것이, F급 헌터를 그냥 비각성자와 동일하게 여기는 모

양이었다.

손가락 하나 까딱 않고도 처리할 수 있는 리자드맨 때문에 이런 경호를 받는

다는 게 굉장히 민망했지만 티낼 수는 없었다.

“흠흠, 여기에 게이트를 만들겠습니다.”

동대문역을 통해 들어온 게이트와 5m쯤 떨어진 거리에 내 던전으로 통하는 게

이트를 하나 만들었다.

“오오오!”

주변을 경계하던 헌터들이 나를 보며 놀라워했다.

온갖 던전과 몬스터들을 경험한 이들도 사람이 직접 게이트를 만들어내는 모

습은 처음 봤기 때문이었다.

한성진조차도 움찔 놀라는 모습이었다.

“들어오세요.”

길드원들에게 말하면서 먼저 게이트로 들어갔다.

익숙한 동굴이 나타났다.

헌터들은 동굴형 던전도 많이 다녀봤을 텐데 새삼 신기한지 두리번거렸다.

안쪽으로 조금 걸어 들어가자 두 갈래 갈림길이 나타났다.

“여기서 오른쪽으로 가면 한성 길드에서 쓸 공간이 나타나고 왼쪽으로 오시면

제 식당으로 연결됩니다. 혹시 식사하고 싶으시면 언제든지 오세요.”

“길이 이렇게 연결되는 거군요. 종종 들리겠습니다.”

내 말에 한성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오른쪽으로 길을 꺾자 모두가 내 뒤를 따라왔고, 곧 넓은 공간이 나타났다.

이곳이 바로 한성 길드에서 이용하게 될 커다란 휴게 공간이었다.

한성진이 만족스러워하며 말했다.

“생각보다 공간이 크군요! 이 정도면 충분하겠습니다.”

식당홀과 비슷한 크기의 넓은 공간이었다.

전에 한성진 길드장이 말했던 대로, 헌터들이 휴식하고 잠을 자고 짐을 놔두

고도 남을 것이다.

다른 헌터들도 두리번거리며 앞으로 자신들이 쓰게 될 공간을 둘러보았다.

나는 그들을 두고 다른 쪽 벽면에 게이트를 두 개 더 만들었다.

마계와 무작위로 연결한 게이트였다.

“이제 이 두 개의 게이트는 여러분이 사냥 갈 던전에 연결될 겁니다.”

“이쪽으로 바로 나갈 수는 없나요?”

곱슬머리 헌터의 질문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이미 동대문역 던전을 통해 들어왔기 때문에 이리로 다시 나갈 수는 없습니

다. 들어왔던 곳으로만 되돌아 나갈 수 있거든요.”

“그럼 이 게이트는 어떻게 다른 던전과 연결할 수 있습니까?”

“게이트에 스킬을 하나 사용해보세요.”

그러자 헌터는 되묻지 않고 순순히 게이트를 향해 마나를 담은 창을 한번 휘

둘렀다.

그 모습을 보고 내가 설명을 덧붙였다.

“이제 당신이 밖으로 나가 다른 던전에 들어가고, 그다음 제가 이 게이트를

이동시키면 됩니다. 게이트가 당신이 방금 인식시킨 마나에 자동적으로 이끌

리게 되거든요.”

헌터들은 새로운 사실에 신기해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싱긋 웃으며 곱슬머리 헌터에게 말했다.

“한번 시험해보시죠. 가까운 다른 던전으로 이동하시면 제가 이 게이트를 그

리로 연결시켜볼 테니까.”

내 말에 곱슬머리 헌터를 포함한 몇몇이 동대문역 쪽으로 빠르게 되돌아나갔다.

15분 정도 후, 게이트가 무언가를 감지한 듯 잘게 진동하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게이트가 이끌리는 곳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해주었다.

1분도 채 지나지 않아 검은 곱슬머리가 게이트로 스윽 들어왔다.

“오오오!”

지켜보던 헌터, 그리고 게이트를 통해 들어온 헌터들이 모두 감탄했다.

한성진은 곱슬머리가 들어온 게이트에 손을 대보았다.

그의 손은 게이트 밖으로 넘어가지 못하고 벽을 만지는 듯한 모양이 되었다.

“정말 이게 가능하군요. 아니··· 믿지 않은 건 아니지만 실제로 보니 놀라워

서···.”

놀라움을 금치 못하는 그들에게 게이트에 이름을 붙이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다.

3개의 게이트를 이용해야 하니, 자칫하면 혼란이 생길 수도 있을 것 같았다.

그렇게 한성 길드 구역인 동대문역 던전과 연결한 게이트는 한성 게이트라 부

르기로 했고, 사냥하며 이동시킬 두 개의 게이트는 1번 게이트, 2번 게이트로

단순하게 정했다.

헌터들은 경탄과 만족이 뒤섞인 표정으로 계속 던전을 둘러보았다.

나는 한성진 길드장에게 손을 내밀며 말했다.

“그럼, 앞으로 잘 부탁드립니다.”

“저야말로 잘 부탁드립니다. 식당도 자주 찾아가겠습니다.”

한성진이 내민 손을 단단히 잡고 악수했다.

던전 식당에 단골손님들이 생길 것 같다.

* * *

돈.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가는 데 없어서는 안 될 중요한 물질.

한때는 세상에 돈만큼 중요한 게 없다고 생각했다.

돈이 없어 허덕이던 F급 헌터 시절이었다.

그리고 이후 이세계에서는 돈보다 중요한 게 있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다시 지구로 돌아오게 된 나는 내가 하고 싶은 일과 어느 정도 이상의 돈벌이

둘 다 놓치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래서 요리 가격도 꽤 높게 책정했고, 그간 만족할 수준의 돈을 벌어들이고

있었다.

그런데 이건···.

“갑자기 너무 많은 돈이 생겼네.”

내 계좌에 한 번도 본 적 없는 금액 찍힌 걸 보며 중얼거렸다.

이미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될 상황이라 웬만하면 계약에 얽히지 않으려

했었다.

그런데 한성 길드에서 너무 만족스러운 제안을 해와서 결국 계약하기로 했고,

그 결정에 후회는 없다.

티 내지 않았지만, 솔직히 독점 계약인 것도 오히려 좋았다.

다른 길드와 추가적으로 계약할 생각은 전혀 없었으니까.

그러면 일도 복잡해지고 던전도 복잡해지기 때문에 관리하는 데 너무 많은 신

경을 쏟게 될 것이었다.

욕심부리거나 어디 탕진하지 않으면 평생을 마음 편하게 먹고 살 수 있을 돈

이 생겼다.

어쨌든 사회에 어울려 살아가는 사람 중 한 명으로서 마음에 여유가 생긴 건

사실이다.

그런데 막상 이걸로 뭘 해야 하는지는 모르겠다.

돈도 써본 사람이 잘 쓰는 거지, 이제 겨우 벌기 시작한 나 같은 사람에게는

한계가 있다.

하지만 한 가지, 어느 정도 돈이 모이면 빠르게 실행하려고 했던 일이 있다.

이 조그만 빌라를 벗어나는 것.

나는 천천히 좁은 집안을 둘러보았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후, 동생과 함께 오랫동안 살았던 빌라.

세월만큼 정이 들었지만, 또 지긋지긋하기도 했다.

조만간 이사할 집을 알아볼 생각이다.

스르륵.

허공에 게이트를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한성 길드와 계약한 지 이제 4일이 지났다.

현재 한성의 헌터들은 휴게소를 꾸미느라 한창 바쁘다.

오전에 가봤더니 넓은 공간을 가벽으로 분리해 헌터들의 침실을 따로 만들어

놓았다.

포션과 여분의 무기, 방어구등을 보관하는 장소도 따로 있었고, 부상 당한 헌

터를 위한 치료실도 있었다.

한성 길드는 생각보다 더 체계적으로 휴게소를 꾸려나가는 중이었다.

그동안에 나도 식당에 조금 변화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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