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풍
나는 조금 달라진 식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오는 건 식당 한쪽에 자리한 널찍한 평상이다.
원래는 홀에는 식탁과 의자만 놓여있고, 남은 공간이 많았는데, 그곳을 평상
으로 채운 것이다.
평상 위에는 좌식 테이블을 두어서 좀 더 편하게 식사할 수 있는 자리를 마련
했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부엌 한켠에 생겨난 커다란 화덕.
던전에서는 전기를 쓸 수 없어서 오븐도 사용할 수 없다.
그래서 오븐 대신 화덕을 설치했다.
이거면 더 강한 불로 다양한 요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또 마계와 통하는 게이트도 대충 만든 나무 간판이 아닌 좀 더 그럴싸한 간판
을 만들어 주었다.
‘이제 헷갈려하는 손님도 좀 줄겠지.’
헌터 관리국에서도 철저히 알렸으니 혹시 모를 이중 던전 게이트와 혼동은 없
을 것 같다.
사실 식당 전체 인테리어를 해볼까 하다가 생각을 바꿨다.
던전 안의 식당이라는 고유한 특징이 사라지는 건 영 좋지 않은 판단인 것 같
았으니까.
나는 만족스럽게 식당을 둘러보고 다시 발걸음을 옮겨, 집으로 연결된 통로
사이에서 벽을 보고 섰다.
이 벽은 내가 마나로 만들어둔 문이다.
마치 동굴 벽처럼 보이고, 남들이 만지면 단단한 벽처럼 느껴지지만, 이걸 만
들어낸 나는 쉽게 통과할 수 있다.
자연스럽게 벽을 통과하자 그곳에 또 다른 통로가 나타났다.
“헥헥.”
들어가자마자 문가에 앉아있던 베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나를 반겼다.
내가 빨리 들어오길 기다리고 있었던 거였다.
요즘 길드와의 일로 좀 바빠져서 크게 신경을 못 써줬던 것 같다.
“베로야, 오랜만에 밖에 나가볼까?”
“웡! 웡!”
내 말에 베로가 벌떡 일어나서 내 주변을 빙글빙글 돌았다.
너무 좋아하는 걸 보니 더 미안해졌다.
나가는 김에 늘 나가는 마계가 아닌 다른 세상에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정을 내리자마자 나가서 먹을 음식을 준비했다.
베로를 위한 소고기 덩어리를 챙겼고, 내가 먹을 샌드위치를 빠르게 만들었다.
삶은 계란을 으깨고 마요네즈와 잘 섞어 빵 사이에 가득 채워주면 간단하면서
도 맛은 제대로인 샌드위치가 완성된다.
“베로, 이쪽으로 나와 봐.”
나는 아스키나 대륙으로 향하는 게이트를 열며 베로에게 말했다.
오랜만에 둘이서만 외출하는 것이 꽤 즐거운지 베로의 꼬리가 더 빠르게 흔들
렸다.
게이트를 넘어가자 나온 것은 지난번에 한 번 봤던 언덕이었다.
따라나온 베로가 신기한지 눈알을 또르륵 굴렸다.
“웡웡!”
그리고 나를 올려다보며 짖었다.
마계와도 다르고, 그리고 과거 아스키나 대륙과도 다른 밝은 분위기의 세계였다.
이런 풍경을 본 적이 없는 베로였으니, 놀랍고 신기할 만도 했다.
이곳은 이제 딱히 위협될 게 없는 평화로운 세상이었다.
아니, 굳이 따지자면 마계의 몬스터인 베로가 여기 온 것이 이 세계 동물들에
게 위협적으로 느껴지지 않을까.
아무래도 태생적으로 타고난 마계의 기운이 있으니.
물론 이 녀석이 그런 행동을 하진 않을 거다.
그때였다.
데구르르르.
작은 돌멩이 같은 게 굴러와서 발끝에 톡 부딪혔다.
뭔가 싶어 집어 들고 보니 도토리였다.
고개를 돌려 도토리가 굴러왔던 방향을 보았다.
“···이게 뭐지?”
그곳에는 도토리가 거의 내 허리 높이까지 한가득 쌓여있었다.
그것도 정확히 내 게이트 옆에.
설마···.
도토리를 보니, 자연스럽게 이곳에서 만났던 다람쥐가 떠올랐다.
지난 번에 나에게 감사 인사를 했던 그 다람쥐.
자기 먹을 걸 이렇게 언덕 한복판에 보란 듯이 쌓아놓을 이유는 없을 텐데.
“베로야.”
“웡?”
처음 보는 푸르른 자연에 흥분해서 땅을 마구 파고 있던 베로가 뒤돌아보았다.
“이거 아무래도 나 주려고 두고 간 것 같지?”
도토리를 가리키며 물어보았지만 고개만 갸웃거린다.
그래. 베로가 뭘 알 거로 생각하고 물어본 건 아니었다.
주변을 둘러보았다.
베로가 있어서 나타나지 않는 건지, 원래 이곳에 사는 녀석이 아닌 건지 그
다람쥐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도토리를 챙겨가기로 결정했다.
고마움의 표시로 가져다 놓은 거란 생각이 들었다.
만약 아니라면 다음에 다른 걸로 갚아주든지 해야겠지만.
‘도토리묵을 만들어 볼까?’
생도토리로는 만들어 본 적이 없는데, 더 싱싱하고 맛있을 것 같다.
베로를 보니 그 잠깐 사이 열심히 땅을 파고, 구덩이에 얼굴을 묻은 채 킁킁
냄새를 맡고 있었다.
“일단 앉아서 좀 쉬자.”
“웡!”
베로가 나에게 풀쩍 뛰어왔다.
녀석과 함께 언덕 끄트머리로 걸어갔다.
그곳에 크고 울창한 나무 한 그루가 있어서 기둥에 기대어 앉았다.
적당히 그늘이 생겨 시원했다.
보기만 해도 속이 탁 트이는 것 같은 풍경을 보며, 챙겨온 샌드위치를 까서
베어먹었다.
부드러운 계란과 마요네즈, 폭신폭신한 빵이 조화롭게 입안에서 어우러졌다.
달칵.
치이이이익!
챙겨온 탄산음료도 한 모금 마셔주었다.
내가 샌드위치를 먹는 사이, 베로도 옆에 얌전히 앉아 고기를 뜯었다.
선선한 날씨에 아름다운 풍경.
맛있는 음식과 옆에 앉은 베로까지.
이게 바로 사람들이 그렇게 원하는 힐링이 아닌가 싶다.
어느새 고기를 다 먹은 베로가 잔디에 턱을 붙이고 눈을 감았다.
살랑거리며 내 팔에 닿던 꼬리의 움직임이 점점 느려졌다.
도로로롱.
도로로로롱.
베로는 덩치에 안 맞게 귀여운 소리를 내며 잠들었다.
내 옆이라 마음 편하게 잠든 녀석은 나중엔 혼자 으르릉거리기도 뭘 먹는 꿈
을 꾸는지 쩝쩝대기도 했다.
그리고 뭔가를 쫓는 건지 다리를 바둥거리다가 번쩍 눈을 떴다.
머리를 조심스럽게 쓰다듬어 주자 다시 잠들었다.
그렇게 한참이나 편안한 시간을 즐기고, 베로가 완전히 깨어난 후에 도토리를
챙겨 던전으로 돌아갔다.
* * *
홍재훈은 초조함에 손톱을 물어뜯었다.
“여기 사는 거 진짜 맞아?”
그는 혼자 중얼대며 처음 와본 동네의 오래된 빌라 앞을 서성거렸다.
박 씨 아저씨를 조르고 졸라 겨우 최현호의 연락처와 집까지 알아냈다.
아무리 전화를 해도 받지 않아서 하는 수 없이 집앞까지 찾아오게 됐다.
최근 한 달간 정신적으로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몇 주 전, 그는 자신의 몸 상태에 최현호가 관련 있을 거로 생각하고 헌터 관
리국에 신고했다.
그런데 뭐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 건지, 관리국에서는 오히려 그놈의 던전
식당을 공식적으로 인정했다.
최현호에게 어떤 제재가 가해진 것 같지도 않고, 자신은 여전히 스킬을 쓸 수
없어 돈도 못 벌고 있다.
헌터 관리국에 추가로 신고를 넣어봤으나, 형식적인 답변만 돌아왔다.
하지만 홍재훈은 최현호 말고 다른 이유를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
물론 그 자신도 정확히 어떤 관련이 있냐고 누가 묻는다면 제대로 대답할 수
없을 것이다.
그저 답답한 상황에 탓할 누군가가 필요한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이거라도 계
속 파고들어야 했다.
홍재훈은 최현호의 연락처를 알려달라고 매일매일 박 씨 아저씨를 달달 볶았다.
그렇게 해서 결국 엊그제 연락처와 주소까지 얻어낸 것이다.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받지를 않아서 이곳까지 직접 찾아왔다.
박 씨 아저씨도 동호수까지는 모른다고 해서, 하는 수없이 이렇게 빌라 앞에
죽치고 있어야 했다.
어제는 마주치지 못해서 오늘로 이틀째 이러고 있는 거였다.
수상해 보였는지 지나가던 동네 주민 몇몇이 이상한 눈으로 쳐다보기았다.
다행히 아직 신고는 하지 않은 것 같지만, 며칠 더 이러고 있으면 경찰을 부
를지도 모르겠다.
홍재훈은 괜히 눈치를 살피며 이리 갔다 저리 갔다 자리를 옮겼다.
그때, 골목 코너를 돌아 나오는 인영이 보였다.
양손에 장바구니를 들고 들어오는 남자.
최현호였다.
뭐가 그리 즐거운지 콧노래까지 부르고 있다.
홍재훈은 다리가 꼬여 한번 넘어질 뻔하기까지 하며 다급하게 최현호에게 다
가갔다.
그를 발견한 최현호가 우뚝 멈추어 섰다.
“어? 웬일이냐?”
최현호가 크게 놀라지도 않으면서 물었다.
“최현호, 너지?”
“뭔 소리야?”
씩씩거리며 말하는 홍재훈을 최현호는 그저 이상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모르는 척하지 마라. 너를 만나고 난 이후로 스킬을 못 쓰게 됐어. 딱 네 식
당에서 나온 직후부터.”
“스킬을 못 쓴다고? 그런 건 힐러한테 가야 하는 거 아닐까?”
“이미 할 수 있는 건 다 해봤어. 이제 남은 건 너밖에 없다고.”
처음 최현호를 범인으로 떠올렸을 땐 너무 열받고 짜증이 났다.
당연히 자신보다 아래라고 생각하던 F급 놈이 좀 막 대했다고 복수라도 한 건
가 싶었다.
다시 만나면 제대로 혼쭐을 내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생각이 다른 쪽으로 흘러갔다.
문제가 해결되지 않고, 아예 뭐가 문제인지 힌트조차 찾을 수 없으니 갑갑해
미칠 것 같았다.
이제는 제발 최현호가 한 짓이길 바라는 지경까지 왔다.
만약 그게 아니라면 정말로 답이 없는 상황이기 때문이었다.
“아니, 난 진짜 모르겠는데. 그게 용건이야? 다른 할 말 없으면 들어간다? 할
일이 있어서.”
홍재훈은 어깨를 으쓱하는 최현호의 팔뚝을 붙잡았다.
“자, 잠깐. 그러지 말고. 얘기를 좀 해보자.”
그의 입에서는 자기도 모르게 절절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야, 나 좀 도와주라. 나 진짜 헌터로 먹고 살아야 된단 말이야. 이 길밖에
없다고. 각성해가지고 회사도 때려치우고 나왔는데 이제 와서 내가 다시 어디
취직하겠냐. 겨우 E급으로 승급해서 숨통 좀 트였는데···. 그동안 섭섭했던
거 있으면, 내가 사과할 테니까···.”
사실 이렇게 애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제대로 따져보고 어떻게든 이 문제를 해결하는 게 목적이었다.
그런데 말을 꺼내고 보니 한 달간 마음고생했던 것이 점점 속에서 올라오는
듯했다.
괜히 서럽기도 하고 억울하기도 하고 자신의 상황이 불쌍하기도 했다.
갑자기 울컥하며 눈가가 뜨거워졌다.
홍재훈은 눈에 뭐가 들어간 척하며 옷소매로 슥슥 눈을 닦았다.
최현호가 그를 보며 한숨을 내쉬고 입을 열었다.
“뭔지 모르겠는데 너무 집착하지 말고, 들어가서 마음 편하게 좀 쉬어. 얼굴
색이 안 좋아 보인다.”
“······.”
단호하게 말하는 최현호를 더 붙잡을 수가 없었다.
이상하게 함부로 행동하기가 어려웠다.
과거에 최현호에게 이런 느낌을 받은 적 있었던가?
단연코 없었다.
다들 당연하게 최현호를 무시했고, 파티에 끼는 걸 반기지 않았고, 눈치도 심
하게 줬다.
최현호는 그런 취급을 묵묵히 받아들였지 딱히 반응하지 않았다.
이렇게 대하기 어렵다는 느낌이 든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아니, 생각해보면 얼마 전 던전 식당에서 한번 비슷한 느낌이 들었던 것 같기
도 하다.
홍재훈은 점점 더 혼란스러워졌다.
‘···진짜 얘가 한 게 아닌가?’
애초에 자기 자신도 100%의 확신을 가지고 찾아온 건 아니었기 때문에 계속
발뺌하니 점점 혼란스러워졌다.
헌터 관리국에서도 연관관계가 없을 거라고, 뭔가 착오가 있었을 거라고 말하
지 않았던가.
어쩌면 절망적인 상황에 빠져 혼자 말도 안 되는 생각에 사로잡혀 버린 걸지
도 모르겠다.
결국, 홍재훈은 말없이 뒤돌아 터덜터덜 걸었다.
스카이라인 뒤쪽으로 노을이 지고 있었다.
인생이 뭔지 모르겠다.
언제까지나 발밑에 있을 줄 알았던 최현호는 던전 식당으로 대박 나게 생겼
고, 헌터로 잘 먹고 살 수 있을 줄 알았던 자신은 완전히 길을 잃고 말았다.
그날 밤, 홍재훈은 홀로 진탕 술을 마시고 청승맞게 굴다가 잠들었다.
아침에 눈을 뜬 그는 습관적으로 스킬을 사용해보았다.
몸에 이상이 생긴 후로, 혹시나 능력이 돌아오지 않았을까 하며 스킬을 쓰는
것이 아침 일과가 된 것이다.
“라이트닝 애로우.”
파지지직!
순식간에 나타난 흰 화살이 TV를 향해 날아갔다.
“···.어?”
홍재훈은 멍하게 두 손을 내려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