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할 말 있어 (38/125)

      할 말 있어

순간 상황을 이해하지 못했던 홍재훈은 몇 초가 지나서야 벌떡 일어나 환호성

을 내질렀다.

“돌아왔다! 돌아왔어!”

능력이 아예 사라진 줄 알았던 터라, 그는 복권에라도 당첨된 것처럼 기뻤다.

TV는 고장나 버렸지만 지금 이 순간에는 그마저도 관계없었다.

겨우 E급.

각성 능력 전체를 봤을 때 완전히 하위권에 속하는 능력이다.

꽤 많은 사람들이 하찮게 생각하는 등급이었지만, F급에서 승급한 홍재훈에게

는 소중하기만 했다.

어쩌면 그래서 더 등급에 민감하게 반응했던 것 같기도 하다.

돌아보면 그 열등감 때문에 항상 그의 발밑에 있는 최현호를 계속 언급하고

상기하며 스스로의 가치를 더 높이려고 애썼던 게 아닐까?

헌터가 된 후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되돌아보며 홍재훈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타이밍이 이상해.’

어째서 한 달 간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던 문제가 최현호를 만나고 온 바로

다음 날 해결된 걸까.

어제 최현호는 홍재훈이 하는 말이 무슨 소리인지 전혀 모르는 눈치였다.

그런 반응을 보고 나서는 스스로가 망상에 빠져서 헛소리를 한 것 같은 기분

이 들었다.

이번에도 잘못 짚은 것 같았다.

이제 다른 원인을 찾을 수도 없고 그냥 다 망했다는 생각으로 거의 포기했었

는데······.

‘설마 그 녀석이 뭔가 해결해준 건가?’

그렇다는 증거 같은 건 하나도 없다.

이것도 영 이상한 망상 같은데 자꾸 그런 생각이 들었다.

과거, 자신이 알던 최현호가 아닌 것 같은 희한한 느낌.

그리고 녀석이 가지게 된 새로운 스킬.

이 모든 것들이 자신에게는 수상하게 느껴졌다.

‘···모르겠다.’

몸에 이상이 생긴 원인도, 해결된 이유도 알 수 없다.

모든 게 짐작일 뿐이었다.

그러나, 그게 혼자만의 망상이라 해도 앞으로는 그 녀석 앞에서 함부로 행동

하지는 않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에 하나라도 관계가 있으면, 다음엔 결코 잘 풀리지 않을 것이었다.

다시는 이런 일을 겪고 싶지 않았다.

* * *

‘참을성이 진짜 없구나.’

이제 거의 한 달째.

저절로 홍재훈에게 걸린 제약이 사라질 때가 다 되었다.

한성 길드와의 일도 바빴고, 어차피 알아서 해결될 일이라 더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그런데 며칠 전, 홍재훈이 계속 박 씨 아저씨를 닦달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게

되었다.

본의 아니게 폐를 끼치게 된 것 같아 그냥 원하는 대로 다 알려주라고 했다.

이후 모르는 번호로 몇 번 전화가 왔는데 귀찮아서 받지 않았더니 홍재훈이

바로 집 앞까지 찾아온 것이었다.

어지간히 불안했던 것 같다.

‘지금쯤 원상 복구됐을 것 같네.’

끝까지 모르쇠로 일관했지만 대충 몸 상태를 보니 어차피 문제 생길 건 없어

보였다.

오히려 내 마나의 영향이 앞으로의 성장에 도움이 되면 됐지 부작용 같은 건

걱정할 필요도 없다.

마음고생한 만큼 정신 좀 차렸으면 좋겠지만, 사람이 그리 쉽게 바뀌진 않지.

어쨌거나 계속 볼 얼굴도 아니고 앞으로 그놈이 어떻게 살든 나와 크게 관련

있는 건 아니다.

그보다 지금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이제 말해야 할 때가 왔는데···.’

최지수가 오랜만에 집에서 쉴 모양인지 프리한 상태로 집안을 돌아다녔다.

식당에 관해 애매했던 상황들이 이제 완전히 정리되었다.

큰돈도 생겼고, 이 집을 떠나려면 함께 사는 동생과 이야기를 나눠야 하는데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아직 모르겠다.

사실 며칠 전에는 최지수가 먼저 던전 식당 얘기를 꺼냈었다.

던전과 헌터에 관한 일들은 비각성자에게도 큰 관심거리였다.

평소에는 멀게만 느껴져도 일상의 안전과 밀접하기도 하고 그 자체로 흥미롭

기 때문일 것이다.

최지수의 경우는 내가 헌터였기 때문에 더 관심을 가진 것 같기도 하다.

물론 크게 관심 없는 사람들도 있긴 하지만.

말 나왔을 때 얘기할 것을, 순간 당황하는 바람에 얼떨결에 넘어가 버렸다.

“흠, 흠.”

지나가는 최지수 옆에서 살짝 헛기침했다.

보는 둥 마는 둥 관심 없이 지나가 버린다.

“크흠, 흠.”

조금 더 큰 소리를 냈더니 그제야 나를 쳐다본다.

“···왜? 나한테 뭐 할 말 있어?”

고개를 끄덕이자 이상하다는 표정을 짓는다.

“그냥 말을 하지 갑자기 왜 그래? 무슨 심각한 일인 거야?”

“우리 이사 가야 할 것 같다.”

“···아니, 왜? 아직 계약 기간 남았잖아. 주인아저씨가 나가래?”

최지수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심각하게 되묻는 것이, 큰일이라도 난 줄 아는 모양이다.

일부러 놀리거나 할 생각은 없었는데 서두를 좀 잘못 꺼낸 것 같기도 하다.

“그게 아니라 돈이 좀 생겨서. 넓은 데로 옮기자는 말이지. 여긴 둘이 살기에

도 좀 좁잖아.”

“돈이 생겼다고? 일 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음, 그 일이 좀 많이 잘 풀렸거든. 길드랑 계약도 하게 됐고.”

말을 할수록 최지수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식당이 길드랑 계약을 해? 아, 점심 제공하기로 한 건가? 근데 그게 오빠랑

크게 상관이 있어? 월급은 그대로일 거 아니야?”

“사실 그 식당이 내 거거든. 너도 아는 곳인데···.”

“무슨 소릴 하는 건지 이해가 안 가.”

나는 대략적인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최지수는 내 말을 들으며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러니까 오빠가 그 던전 식당의 주인이라는 말이지? 그때 그 사고 이후

로 이상한 능력을 얻게 된 거고? 아니, 그런데 그게 말이 되나?”

믿기 어려운지 벌써 세 번째 같은 질문이었다.

하긴, 평범한 F급 헌터였던 가족이 갑자기 세상에 존재하지도 않았던 능력을

얻게 되었다는 걸 당장 받아들이기는 어렵겠지.

게다가 시답잖은 장난도 많이 치던 남매사이니까 이게 농담인 건지 진담인 건

지도 헷갈릴 것이다.

나는 그냥 무작정 게이트를 만들고, 얼떨떨한 최지수를 밀어 넣었다.

“어? 어어어?”

순식간에 주변의 풍경이 익숙한 집안이 아니라 동굴형 던전으로 바뀌었다.

“으어어어?”

말하는 법을 잊은 듯 최지수가 이상한 소리를 내며 나를 돌아보았다.

“이 안으로 들어가면 내 식당이 있어.”

“지, 진짜야? 아니, 근데 이거 내가 들어가도 되는 거야?”

“당연하지.”

이미 헌터 관리국과 최초에 얘기할 당시, 동생의 출입 권한에 대해서는 결론

을 냈었다.

뭐, 몰래 들어오는 거야 누가 알겠냐마는, 혹시나 일손이 모자랄 때 써먹을

생각으로 얘기해둔 것이었다.

최지수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이미 공식적인 던전 방문 권한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미쳤다···. 말도 안 돼.”

비각성자인 지수는 당연히 던전에 처음으로 들어와 보는 것이었다.

놀라움이 가라앉자 두 눈이 설렘과 흥분으로 반짝거렸다.

입을 다물지 못하고 두리번거렸다.

역시 말로 하는 것보단 보여주는 게 잘 먹힌다.

“여기가 그 던전 식당인 거야? 어떻게 이럴 수가 있어!”

최지수는 간간히 나를 보고 황당하다, 대체 뭘 숨기고 있었던 거냐는 등의 말

을 하며 식당을 구경했다.

얼핏 탓하는 것처럼 들리지만 표정을 보면 입꼬리는 내려올 줄을 모른다.

식당을 보여주는 걸로도 이런 반응인데, 한성 길드에 얼마나 받았는지까지 알

려주면 아주 기절할 것 같다.

그때 코너 쪽에서 보일 듯 말 듯 살랑이는 꼬리가 보였다.

오늘은 한성 길드와 미리 얘기해두었던 휴일.

이 던전에 다른 사람은 없다.

그래서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게 된 베로가 이쪽까지 나와 있었던 거였다.

아무도 없을 줄 알았는데 최지수가 들어와 있는 걸 보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몰

라하는 것 같다.

‘···둘이 만나도 상관없을 것 같은데?’

베로는 내 명령 없이 누군가를 공격하지 않고, 녀석 정도면 직감적으로 내 혈

육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최지수는 비각성자라 오히려 케르베로스라는 몬스터에 대해 알지 못하고.

서로에게 위해가 될 일은 없다.

“너 강아지 좋아하지?”

“어? 완전 좋아하지.”

벌써 이 상황에 적응한 건지 최지수가 평상에 털썩 앉으며 대답했다.

“여기서 좀 큰 개를 키우는데 한번 볼래?”

“뭐? 진짜? 귀여워?”

“귀엽고 크고 똑똑하지.”

“볼래! 어딨어?”

최지수가 던전에 들어왔을 때보다 더 눈을 빛내며 벌떡 일어섰다.

“베로!”

“웡!”

내 부름에 기다렸다는 듯 베로가 풀쩍 뛰어들었다.

그리고 정확히 나와 최지수의 사이에 착지했다.

“꺄악!”

순간 놀란 지수가 다시 평상에 주저앉았다.

위협할 의도는 전혀 없었던 베로가 주춤 뒤로 한 발짝 물러났다.

단순히 내가 불렀다는 것에 너무 신나버린 모양이었다.

“베로. 갑자기 뛰어들면 안 돼. 그것도 처음 만나는 사람이잖아.”

“워우우···.”

베로가 조금 주눅이 들어 고개를 살짝 숙였다.

심장을 부여잡은 자세로, 최지수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베로와 나를 번갈아보

며 물었다.

“강아지··· 강아지 맞아? 너무 큰 것 같은데?”

네 다리로 선 상태에서 내 키 높이보다 아주 조금 작은 베로였다.

최지수와는 눈을 마주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대충 비슷해.”

“무는 건 아니지?”

“당연하지. 베로, 여기는 내 동생 최지수, 그리고 이 개는 베로라고 해.”

“베로···.”

놀란 것도 잠시, 베로를 보는 최지수의 눈빛에 두려움은 없는 것 같았다.

예상은 했지만, 역시 동물이 크다고 해서 겁먹는 애는 아니다.

몬스터란 걸 알면 또 모르겠지만, 친해진 다음 알게 되면 관계없겠지.

“혹시 만져봐도 돼?”

“나 말고 베로한테 물어봐.”

내 말에 베로와 최지수가 눈을 마주쳤다.

베로가 나 이외의 사람을 이렇게 마주한 것은 처음이다.

손님들이 오긴 했지만, 초반에 가끔 위협하기만 했고, 나중에는 혹시 모를 트

러블을 방지하기 위해 마주치지 않도록 했었다.

게다가 나와 상당히 닮은 여자였으니, 베로에게 얼마나 신기하게 느껴질까.

방금 전의 실수로 행동이 현저히 조심스러워진 베로가 지수와 거리를 유지하

며 눈만 깜빡거렸다.

아무래도 자기 나름대로 관찰하고 있는 것 같다.

“···베로?”

지수의 목소리에 베로의 꼬리가 살랑거리기 시작했다.

“내가 널 만져봐도 될까?”

나한테 말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부드러운 목소리에 베로가 헥헥 웃는 표정이

되었다.

눈알을 굴려 나를 살짝 보길래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베로가 머리를 약간 낮추며 지수에게 한 걸음 다가갔다.

지수는 조심스럽게 오른손을 베로의 머리 위에 올렸다.

“부드러워···.”

진심으로 감탄한 목소리로 스르륵스르륵 머리를 쓰다듬는다.

덩치가 커서 마냥 억셀 것 같지만 실제로 베로의 털은 굉장히 부드러운 편이

었다.

베로는 스르륵 눈을 감고 머리를 더 가까이 들이댔다.

“귀엽다···.”

솔직히 동물을 무서워하는 사람이 보면 귀엽다는 말이 나올 외형은 아니다.

전체적으로 털도 검고 덩치도 크고, 웃을 때 보이는 이빨은 날카롭다.

하지만 이목구비 자체만 보면 꽤나 귀여운 느낌이 있었다.

교감할 때 표정까지 더해지면 여느 강아지 못지않다.

최지수도 그 부분을 잘 알아본 모양이다.

“너무 귀여워···!”

여전히 조심스러운 손길로 베로를 쓰다듬으며 최지수가 억눌린 목소리로 말했다.

아무래도 지수는 던전 식당보다 베로를 더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다.

* * *

흙바닥에 드래이크 수십 마리가 쓰러져 있다.

한바탕 전투를 끝낸 헌터들이 주변을 둘러보았다.

갑자기 추가로 몬스터가 튀어나올 수도 있어서 경계 태세를 풀지 않은 것이었다.

함께 주변을 둘러보던 유희진이 헌터들에게 고개를 돌리고 입을 열었다.

“이쪽은 마무리된 것 같은데, 좀 쉴까?”

“네!”

“좋습니다.”

반색하며 반기는 헌터들을 보고 유희진이 싱긋 웃었다.

“가는 김에 이놈들도 옮기자.”

그녀의 손가락이 향한 곳은 바닥.

곳곳에 흩어진 드레이크 사체를 옮기자는 의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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