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운
아직 클리어하려면 며칠은 더 걸릴 커다란 던전이었다.
지금 몬스터 사체를 챙기는 것이 일반적인 사냥 순서는 아니었다.
원래는 모든 사냥을 끝내고, 던전을 클리어한 다음에 몬스터 사체에서 가치가
높은 부산물만 챙겨 나가는 것이 맞았다.
가지고 다닐 수 있는 짐에 한계가 있으니 모든 것을 다 취할 수는 없었던 것
이다.
가끔 부산물의 부피가 너무 크거나, 선별하여 버리기 아쉬운 몬스터의 경우에
는, 클리어 후 아예 다른 직원들을 투입해 처리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런데 오늘은 상황이 완전히 달랐다.
‘실제로 이런 일이 벌어지다니.’
유희진은 마음이 상당히 들떠있었다.
처음으로 한성 휴게소를 이용해보게 된 것이다.
설마설마했는데 정말로 던전 식당이 존재했고, 심지어 한성 길드와 독점 계약
까지 맺었다.
이제 그곳을 통해 몬스터 부산물을 동대문역 던전까지 직통으로 운반할 수 있
게 되었다.
사체를 들고 수십 킬로를 이동해야 했던, 단순하면서도 고된 노동을 하지 않
아도 되는 것이다.
게다가 굳이 필요한 부분만 해체할 이유도 없어졌으니 살뜰하게 부산물을 활
용할 수 있을 것이다.
기존과 비교해서 혁신이라 할 수 있을 만큼 엄청나게 효율적인 방식이었다.
한 헌터가 목을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와, 오늘 컨디션이 너무 좋습니다.”
다른 헌터들도 그 말에 동조했다.
“저도 그래요. 짐 없이 싸우는 게 확실히 좋네요.”
“그렇지? 신경 쓸 것도 별로 없고, 몸이 너무 가벼워서 날아다니는 기분이야.”
바리바리 싸 들고 다녔던 포션과 비상식량, 물병들이 없으니 같은 시간 내에
평소보다 두 배는 더 기량을 발휘할 수 있었던 것 같다.
모두 만족도가 높아 보였다.
“여기, 게이트 찾았어.”
유희진이 가리킨 곳에는 휴게소의 게이트가 있었다.
아침에 미리 휴게소에 들러 스킬을 쓰고, 다시 이 던전으로 들어왔더니 게이
트가 그녀가 있는 곳에 따라온 것이었다.
도대체 무슨 원리인지는 알 수 없지만 참 신통방통한 방식이었다.
“이놈들 빨리 옮기고 우리도 쉬자.”
“네!”
한성 길드의 헌터들은 가뿐히 드레이크 사체를 들고 게이트 안쪽으로 밀어 넣
었다.
얼마 걸리지 않아 바닥의 사체가 모두 사라졌다.
헌터들이 게이트로 들어가니 안쪽에서 일하고 있던 직원들이 그들을 반겼다.
“수고하셨습니다!”
밀어 넣었던 몬스터 사체는 다른 헌터들이 차곡차곡 정리 중이었다.
이들은 동대문역과 연결된 한성 게이트에서 들어온 직원들이었다.
바로 그쪽으로 부산물을 옮겨가서 처리할 예정이었다.
짝!
유희진이 박수로 동료들의 이목을 끌었다.
“식사하고, 휴식하고, 조금이라도 삐끗하거나 무리한 거 있으면 치료도 하고,
딱 한 시간 뒤에 나가는 걸로 하자.”
“옙!”
“알겠습니다!”
평소와 달리 힘차게 대답한 헌터들이 휴게소 안쪽에 자리한 푹신한 소파에 털
썩 앉았다.
유희진은 옆에 앉지 않고 기지개를 켜며 말했다.
“혹시 식당에 밥 먹으러 갈 사람?”
“전 여기서 간단하게 먹고 그냥 좀 쉬고 싶어요.”
“저도 빨리 먹고 잠깐 눈 붙이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저희는 벌써 한 번 가봤었거든요.”
동료들의 대답에 유희진이 눈썹을 치켜올리며 되물었다.
“뭐야, 그랬어? 언제?”
“엊그제 갔었어요.”
“아, 그래? 빠르기도 해라. 알았어. 나 혼자 가봐야겠다.”
한성 길드에서 사용하기로 계약한 게이트는 총 3개.
그중 사냥터와 연결할 수 있는 게이트는 단 2개였다.
한성 길드에서는 하루에 10개에 가까운 팀들이 동시에 활동하므로, 모두가 휴
게소를 사용할 수는 없었다.
사실 길드장은 더 많은 게이트를 원했으나, 식당의 주인이 완고하게 반대하여
뜻을 밀어붙이지 못했다고 한다.
그래서 하는 수없이, 그때그때 던전의 상태, 헌터들의 컨디션에 따라 적절히
배정하기로 한 것이다.
어제까지 유희진은 휴게소가 배정되지 않은 던전에 갔었고.
“제가 같이 가드릴까요?”
머리를 붉게 염색한 남자가 몸을 살짝 일으키며 물었다.
유희진이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됐어. 나 혼자 가도 돼. 이렇게 된 거 사장님이랑 좀 친해져야겠다.”
“아, 그러실래요?”
“응. 쉬고들 있어.”
그 말에 몸을 일으켰던 헌터가 다시 털썩 누웠다.
유희진은 이런 걸로 빈말하는 사람이 아니었고 모두 그걸 알고 있었다.
“다녀오세요.”
동료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유희진은 혼자 발걸음을 옮겼다.
* * *
나흘 전부터 한성 길드에서 휴게소를 본격적으로 활용하기 시작했다
첫날에는 아침, 점심, 저녁 할 것 없이 많은 한성의 헌터들이 이곳을 방문했다.
던전 식당이 생긴 이래로 가장 많은 손님들을 맞았던 날이었다.
사실 계약사항에 내가 그들의 식사를 담당한다는 조항은 없었다.
원래는 길드장이 그들의 식사를 이쪽에서 맡는 게 어떠냐고 제안했지만, 급식
소처럼 운영할 생각은 전혀 없었기에 단호하게 거절했던 것이다.
때문에 한성 길드 본부에서 도시락을 준비하고 헌터들에게 제공하는 방식으로
운영될 것이었다.
물론, 그걸 마다하고 내 식당을 찾아올 헌터들은 당연히 손님으로 받아줄 생
각이었고.
아무래도 첫날에는 이 공간 자체에 대한 호기심 때문에 대부분의 헌터들이 내
식당까지 방문했던 것 같다.
그런 상황에 대비해서 만들기 쉬운 면 메뉴를 준비했는데도 정신이 없었다.
한성 길드원 외에 다른 손님들을 받을 겨를이 없을 정도로 바빴다.
사냥을 가거나 휴게소에서 일하지 않는 헌터들도 그냥 첫날이니 한번 찾아와
본 것 같았다.
다행인 것은 둘째 날에 인원이 절반 정도로 줄었고, 셋째 날인 어제는 더 줄
었다는 것이다.
호기심이 해소되었으니, 이제는 우르르 분위기 타서 몰려오기보다는 내 음식
을 먹고 싶은 사람들만 찾아오지 않을까 싶다.
한성 길드와 계약을 체결하면서, 길드원들에게는 상당히 할인된 가격으로 제
공하기로 했다.
그래도 돈 벌려고 일하는 것이다 보니 웬만하면 길드 자체에서 제공하는 저렴
한 도시락을 선택할 것 같다.
오늘은 좀 한산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하고 있는데, 단발머리 여자가 식당 안으
로 불쑥 들어섰다.
두리번거리던 그녀는 나와 눈이 마주치고 눈을 휘며 미소 지었다.
“안녕하세요! 한성 길드 유희진이라고 합니다. 지난번에 한 번 뵀는데 기억하
실지 모르겠네요.”
한성 길드와 계약하던 날 통성명했던 몇몇 인물들 중 한 명이라는 게 떠올랐다.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당연히 기억합니다. 식사하러 오신 거죠?”
“네. 다들 피곤해하고, 각자 바빠서 혼자 왔네요. 지금 장사하고 계신 거 맞
아요? 아, 혹시 쉬시는 데 방해한 건가···?”
“아뇨. 이제 영업 시작하려고요.”
“그럼 제가 오늘 첫 손님이군요.”
유희진이 부엌과 마주 보는 자리의 의자를 꺼내어 앉았다.
“여기 메뉴는 어떤 게 있어요?”
“매일 바뀝니다. 오늘은 스테이크 덮밥을 할까 하는데 괜찮으세요?”
“스테이크 덮밥 맛있겠네요. 하나 주세요.”
“알겠습니다.”
불을 켜고, 선홍빛을 띠는 고기 한 덩어리를 꺼냈다.
미리 소금, 후추, 오일과 각종 허브로 시즈닝 해둔 것이었다.
빠르게 달아오른 팬 위쪽에 손을 살짝 올려 열기를 느낀 후, 고기를 툭 얹었다.
취이이익-
고기의 겉면이 빠르게 익어가기 시작했다.
유희진이 말을 걸어왔다.
“헌터 생활 하는 동안에 이런 여유는 처음이에요.”
“여기 오신 손님들이 다들 그런 말씀 하시더라고요.”
대화를 하면서도 손은 양파를 썰고 마늘을 다졌다.
자신의 말이 나에게 별로 방해되지 않는다는 걸 확인한 유희진이 계속 말을
이었다.
“그 사람들은 저희 길드원들이 아니라 우연히 식당으로 들어왔던 손님들이겠
죠? 생각해보면 엄청난 행운이네요. 동시간대에 던전에서 사냥 중인 수많은
헌터들 중에 우연히 선택된 거나 다름없잖아요.”
“그보다는 원하는 대로 여길 들어올 수 있게 된 한성 길드가 더 큰 행운을 얻
은 거 아닐까요?”
반쯤 농담으로 한 말에 유희진이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아하하! 사장님 의외로 뻔뻔하시네요! 하긴 맞는 말이긴 해요. 저희는 이제
필요에 따라 얼마든지 이곳을 활용할 수 있게 됐으니 훨씬 운이 좋은 거 맞
죠. 뭐, 그만한 지출을 하긴 했지만···.”
그러고는 목소리를 조금 줄이고 손으로 살짝 입을 가리며 덧붙였다.
“저는 당연히 찬성이었는데, 반대하는 사람도 몇 명 있었거든요. 계약 자체는
좋은데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냐고. 이번 건은 길드장님이 많이 독단적으로
밀어붙였어요. 원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이번에는 진짜 꽂혔었나 봐요.”
“그건 몰랐네요.”
“모르시는 게 당연하죠, 뭐. 반대하던 사람들도 직접 보고는 인정하는 것 같
았어요.”
휘릭.
스테이크를 가볍게 뒤집었다.
취이이이익.
아직 붉은 빛을 띠던 반대 면이 팬에 닿으며 익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렇게 위아래 겉면을 먼저 빠르게 익혀서 안쪽에 육즙을 가두는 것이다.
나는 알맞게 익어가는 고기를 보며 소스를 만들기 시작했다.
유희진이 이번엔 다른 이야기를 꺼냈다.
“아, 사장님, 원래는 F급 헌터였다고 하셨죠? 사냥은 많이 해보셨어요?”
대략적인 내 정보는 한성 길드에 이미 공유된 상황이다.
게다가 유희진은 길드에서도 손꼽히는 실세인 것 같으니 모르는 게 더 이상하다.
딱히 숨길 이야기도 아니고 해서 나는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그랬었죠. 최하급 던전만 주구장창 다녔어요. 매일 고블린 얼굴 안 보면 허
전할 지경이었죠. 그리고 지금도 사실 F급이고요.”
미소 지은 채 내 말을 듣던 유희진이 깜짝 놀랐다.
“F급이요? 이런 능력을 갖췄는데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헌터 관리국에서 던전 식당에 대해 공표한 후, 내 신상에 대한 정보는 공유하
지 않고 이 능력에 대해서만 논의가 진행되고 있는 모양이었다.
“전에 없던 능력이라 뭔가 복잡한 것 같더라고요. 제대로 결론이 안 나길래
그냥 내버려 둬도 된다고 했어요. 등급 욕심은 딱히 없어서.”
“그래도 아까워요. 겉으로 내세우기엔 그래도 등급이 중요한데.”
“어차피 한성 길드랑 독점 계약도 했는데 어디 내세울 필요도 없죠, 뭐.”
“하긴 그것도 그래요.”
유희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짙은 갈색이 된 스테이크에 젓가락을 찔러넣은 다음, 다시 손등에 젓가
락을 가져다 댔다.
적당히 따뜻한 온도.
미디움 레어다.
두툼한 스테이크를 슥슥 길쭉하게 썰었다.
어두운 겉면과 달리 붉은 기를 띤 속살이 드러났다.
고슬고슬한 밥 위에 소스와 양파를 올린 후, 스테이크를 가장자리에 가지런히
놓았다.
계란을 하나 깨서, 흰자를 걸렀다.
그리고 남은 싱싱한 계란 노른자를 스테이크 정 가운데 조심히 올려주었다.
마지막으로 노른자 옆에 와사비를 조금 뿌리면 끝이다.
완성된 스테이크 덮밥은 곧장 하나뿐인 손님의 앞에 놓여졌다.
“우와, 너무 예뻐서 먹기 아까운데요?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먼저 집어 계란 노른자를 톡 터트리자 밥 아래로 노란빛이 스며들었다.
유희진은 고기를 소스에 적신 후, 젓가락으로 와사비를 조금 집어 고기 위에
올려 한입에 먹었다.
“으음!”
질기지 않고 부드러운 육질과 촉촉한 육즙, 소스의 맛과 와사비의 톡 쏘는 맛
이 합쳐졌다.
“너무, 너무 맛있는데요, 사장님?”
유희진이 눈을 크게 뜨고 입을 우물거리며 말했다.
미간이 조금 일그러져있었다.
진짜 맛있는 걸 먹을 때 짓는 표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