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실프 (40/125)

      실프

유희진은 고기를 한 점 더 집으면서 덧붙였다.

“이건 진짜 안 온 애들 후회할 정도로 맛있어요.”

”그렇게 말해주시니 기분 좋네요.”

“진심입니다, 진심.”

진심이란 말을 두 번이나 하면서 강조했다.

혼자 감상하듯이 뭘 넣은 거냐, 고기가 너무 부드럽다, 소스 맛이 잘 어우러

진다 같은 말을 하던 유희진은 어느새 그릇을 깨끗이 비웠다.

그리고 조금 풀어진 자세로 앉아 시계를 보았다.

“아직 시간이 얼마 안 지났네요? 맛있어서 너무 빨리 먹었나···. 저, 사장님.”

“네?”

“혹시 여기 좀 더 있다가 가도 될까요? 한 시간 뒤에 나가기로 했는데, 왠지

여기 있는 게 편해서요. 매일 부대끼면서 살아서 그런지 이런 잔잔한 대화가

되게 좋네요.”

유희진과 제대로 대화해본 건 오늘이 처음이지만, 꽤 마음에 들었다.

대화하기 좋은 상대로 느껴졌기에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이죠. 커피라도 한 잔 드릴까요?”

“좋습니다!”

물을 끓여 여분으로 가져다주었던 커피잔에 커피믹스를 하나 탔다.

그리고 간식거리로 사두었던 쿠키 몇 개를 접시에 올려 같이 내주었다.

“감사합니다. 진짜 호강하네요.”

평화로운 침묵 속에서 나는 자잘하게 할 일을 하고, 한 명뿐인 손님은 티타임

을 즐겼다.

바삭.

버터 향이 강한 쿠키를 베어 물고 커피를 홀짝이는 모습은 정말로 편안해 보

였다.

그때 유희진이 갑자기 다른 얘기를 꺼냈다.

“사장님, 혹시 정령에 대해 아세요?”

“정령이요?”

정령을 제대로 만나본 적은 없지만 존재에 대해서는 알고 있다.

지구와 달리 아스키나 대륙의 자연은 정령이라는 존재가 권장하고 있다.

그러나 내가 그곳에 있을 때는 마계에 장악되어 정령의 힘을 거의 느낄 수 없

을 정도로 약해져 있었다.

어쨌든 지구와는 별 관계가 없을 텐데, 유희진이 먼저 말을 꺼낸 것이 흥미로

웠다.

내 반응에 그녀가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역시 모르시는구나. 최근 몇 개월 사이에 정령사라는 클래스를 가진 각성자

들이 나타나기 시작했대요.”

“처음 듣는 얘기군요.”

‘최근 몇 개월이라면··· 내가 지구로 돌아오고 난 후부터인가.’

대륙이 제 모습을 찾아가기 시작한 시점.

완전히 회복된 자연환경을 보면 정령들도 힘을 모두 되찾았을 거다.

그래서 지구에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게 된 게 아닐까 혼자 상황을 짐작해보

았다.

“크게 화제가 된 이야기는 아니에요. 새로운 클래스가 생기는 건 종종 있는

일이니까요. 제가 이 얘기를 왜 꺼냈냐면···.”

유희진이 왼손을 들어 나에게 보여주며 말했다.

검지 손가락에 초록색 보석 같은 것이 박힌 두꺼운 반지가 있었다.

“이 반지가 정령과 관련된 아티팩트거든요. 얼마 전에 던전에서 우연히 발견

했는데 엄청 신기해요. 한번 보여드릴게요.”

그러면서 손바닥이 천장을 향하도록 왼손을 움직인다.

나도 호기심이 생겨서 하던 일을 멈추고 유희진의 손을 바라보았다.

“실프.”

작게 중얼거리자, 그녀의 반지에서부터 옅은 초록색의 실오라기 같은 것이 피

어나기 시작했다.

그것들은 손바닥 위로 올라가 회오리를 일으키듯 빙글빙글 돌았다.

곧이어 약한 바람 속에서 연둣빛을 띤 작은 인형 같은 형상이 나타났다.

바람이 유희진의 앞머리를 살짝 흐트러뜨렸다.

바람의 정령 실프.

하급 정령으로 혼자서는 미약한 힘만을 발휘할 수 있는 약한 정령이다.

그러나 대륙의 자연을 위해 반드시 있어야 하는 중요한 존재이기도 하다.

눈을 감고 있던 실프의 눈꺼플이 천천히 위로 올라가며 초록색 눈동자가 드러

났다.

잠깐 눈을 깜빡인 실프가 반투명한 날개를 움직이며 유희진의 손 주변을 날아

다녔다.

“보이시나요?”

그녀는 내 쪽으로 손바닥을 가까이 내밀며 물었다.

“네. 엄청 작네요.”

“작아요?”

내 말에 유희진이 놀란 목소리로 되물었다.

왜 이런 반응인지 영문을 모른 채 대답했다.

“네.”

신난 듯 발랄하게 날던 실프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느려졌다.

실프의 눈동자가 나를 향해 움직였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자 슬쩍 눈길을 돌

린다.

그리고 또다시 힐끔 나를 쳐다본다.

뭔가 이상한 느낌이라도 받은 것 같다.

“어? 갑자기 왜 이러지? 오늘 행동이 좀 이상하네요?”

유희진이 실프에게 얼굴을 가져다 대며 말했다.

실프는 그러거나 말거나 계속 가만 서서 내쪽으로 눈알을 굴렸다.

“원래는 어떤데요?”

“그냥 제 손 주변을 날아다니기만 하거든요···. 아니, 그런데 사장님, 얘가

어느 정도 크기로 보이세요?”

“제 손바닥 크기보다 좀 작은 정도?”

“와아!”

유희진은 오른손으로 집었던 과자를 내려놓았다.

“진짜네요? 사장님 정말로 정령을 보실 수 있구나!”

아, 이게 원래 안 보이는 거였나?

정령이 다른 사람들에게 보이는 건지 아닌지는 내가 알 수 없는 부분이었다.

“그게 그렇게 이상한 일인가요?”

“아뇨, 이상하다기보다··· 길드 사람들한테 다 보여줬는데 대부분이 안 보인

다고 했거든요. 뭔가 있는 것 같긴 한데, 잘 모르겠다는 사람도 있었고, 아예

인식을 못 하는 사람도 있었고요. 그나마 S급인 성민혁이 여기 녹색 마나 덩

어리가 돌아다닌다는 정도까지 인식했는데··· 아무래도 사장님, 이쪽으로 재

능이 있으신 것 같은데요?”

사실 이건 정령술에 대한 소질은 아니다.

그냥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어느 한계치를 초과했기 때문에, 마나로 이루어진

정령 또한 자연스럽게 인식하게 된 것에 가까울 것이다.

나는 유희진에게 물었다.

“헌터님한테는 이 실프가 어느 정도로 보이죠?”

“저는 그냥 얼굴이랑 몸 형태가 보이는 정도? 팔을 위로 움직였다, 다리를 버

둥거린다, 이런 느낌만 알 수 있어요. 이목구비가 있는 것 같은데 표정까지는

보이지 않고요. 이건 아마 재능이라기보다 이 반지를 제가 끼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어요. 아! 사라지려고 한다!”

실프의 형상이 점점 흐려졌다.

“제가 직접 소환한 게 아니라 아티팩트 자체의 기능이라 이 정도가 한계예요.

전투할 때 활용하는 건 불가능할 거 같고, 그냥 이렇게 대화 소재로 잘 쓰고

있지요. 또 종종 꺼내줘야 친화도를 유지할 수 있어서요.”

“덕분에 신기한 구경했네요.”

고개를 끄덕인 유희진이 웃음기 없는 얼굴로 말했다.

“진지하게 말씀드리는 건데 정령술 관련해서 능력이 더 있는지 한번 알아보세

요. 다른 사람들이랑 비교해봤을 때 확실히 사장님은 뭔가 다르게 보시는 것

같거든요.”

“글쎄요. 있어도 보는 재능만 있는 게 아닐까 싶네요.”

“아, 그럴 수도 있는 건가? 어쨌든 가끔 보여드릴게요. 왜, 연습하거나 계속

가까이 접하다가 스킬이 생기는 경우도 있잖아요.”

“그럼 가끔 놀러 오실 때 보여주세요. 바람이 상쾌하고 좋군요.”

나는 유희진의 호의를 가볍게 받아들였다.

너무 거절해도 이상해 보일 것이다.

유희진이 손목시계을 내려다보며 일어섰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흘렀네. 이만 가서 슬슬 나갈 준비 해야겠어요. 이거 제

가 괜히 장사 방해한 거 아닌가 죄송스럽네요.”

민망한 표정을 짓는 유희진에게 나는 싱긋 웃어주었다.

“전혀 아닙니다. 종종 놀러 오세요.”

“네. 오늘 정말 잘 먹었습니다.”

얘기를 나누느라 굳이 다른 던전으로 통하는 게이트를 추가로 열지 않은 게

맞긴 하다.

그러나 이게 장사를 방해한 건 전혀 아니었다.

어차피 이제는 돈에 크게 구애받지 않아도 되는 환경이다.

손님을 많이 받는 것보다,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는 것이

이 식당의 더 큰 목적이다.

그런 의미에서 조금 전 한 시간은 참 알차게 보냈다고 할 수 있다.

계산을 마친 유희진이 떠나갔다.

나는 미소로 그녀를 배웅해주었다.

* * *

오늘 새집으로 이사를 완료했다.

원래 살던 빌라와 거리상으로는 그렇게 멀지 않은데 환경은 천차만별이다.

아파트가 아닌 한적한 분위기의 전원주택으로 들어왔는데 완전히 다른 세상

같다.

어수선하던 집 안을 모두 정리했다.

좁은 집에서 넓은 집으로 옮기니 오히려 짐 정리가 쉬워서 생각보다 빨리 끝

났다.

최지수가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집안 여기저기를 둘러본다.

“여기가 우리 집이라니···.”

벌써 몇 번째 저러는 건지 모르겠다.

왜 저러냐 싶다가도, 또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뿌듯하기도 했다.

나도 모르게 흐뭇한 표정을 짓게 되었다.

한참을 돌아다니고 자기 방을 어떻게 꾸밀지 구상하던 최지수가 다시 나를 찾

아와 말을 건다.

“오빠, 또 식당에 일손 필요하지 않아?”

“아니. 이제 안 바빠서 그냥 혼자 하는 게 편해.”

“···이제 바쁠 일 없어?”

은근히 떠보는 게 또 식당에 들어가고 싶은 모양이다.

얼마 전, 한성 휴게소를 처음 열게 된 날, 지수가 식당에서 나를 도왔다.

바쁠 걸 예상했기 때문에 미리 시간 비워두라고 얘기해뒀었다.

꽤 빡세게 부려 먹었는데, 그래도 알바비는 두둑하게 챙겨줬었다.

벌써 그 돈을 다 쓰진 않았을 텐데.

그리고 돈이 부족하면 그냥 용돈을 달라고 하지 이런 식으로 돌려 물을 애는

아니다.

그럼, 왜 다시 던전에 들어가고 싶어 하는 걸까.

떠오르는 이유가 하나밖에 없다.

“베로 보고 싶어서 그러는 거지?”

쉽게 속내를 간파하자 지수가 멋쩍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귀엽잖아. 또 보고 싶어, 베로.”

지수는 베로에게 완전히 빠져버렸다.

하도 보고 싶어 해서 종종 게이트를 열어 만나게 해주는데 그것만으로도 부족

한 모양이다.

그래도 내 일도 있고, 본인 공부도 해야 해서 다 들어주진 않았더니 이제 안

바쁘냐 돌려 묻고 있는 것이다.

“흐음···.”

그러고 보니, 이제 집안 환경이 완전히 달라졌다.

낡고 좁은 빌라가 아니라 커다란 복층 주택에 넓은 마당도 있다.

담벼락도 충분히 높다.

베로를 가끔은 이쪽으로 꺼내줘도 괜찮을 것 같다는 판단이 들었다.

“잠깐만 기다려봐.”

“와아!”

내가 뭘 하려는지 알아챈 지수가 기뻐하며 눈을 빛냈다.

나는 곧장 게이트로 들어가 베로를 불렀다.

순식간에 눈앞까지 달려온 베로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헥헥 웃었다.

“베로, 이리로 나가자.”

내 손짓에 베로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나를 올려다보았다.

여긴 내가 한 번도 나가는 걸 허락하지 않았던 게이트였기 때문이다.

고개를 끄덕이자 베로는 단숨에 게이트를 뛰어넘어 밖으로 나갔다.

타탁!

마룻바닥에 발을 내디딘 베로가 놀란 눈으로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그리고, 고개를 들고 숨을 들이마셨다.

흥분해서 큰 소리로 짖으려 한다는 걸 알아채고 나는 서둘러 녀석의 입에 검

지 손가락을 가져다 댔다.

“쉬이이잇!”

“웡.”

숨을 한번 들이마신 베로가 아주 작은 소리로 대답했다.

던전에서부터 하던 대로라 아주 자연스럽다.

“여기서는 조용히 해야 돼. 네가 짖는 것 만으로도 비각성자들은 크게 놀랄

수 있거든.”

베로는 보통 강아지가 아니었기에, 의도치 않게 큰 문제가 생길 수 있었다.

내 말에 베로가 알겠다는 듯 고개를 끄덕끄덕했다.

똑똑한 녀석이니 여러 번 주의시키지 않아도 잘 기억할 것이다.

“베로오오!”

무슨 이산가족 상봉이라도 하는 듯 달려온 최지수가 베로를 껴안았다.

“웡웡!”

베로가 작게 짖으며 꼬리를 흔들었다.

거의 꼬리가 아니라 엉덩이가 씰룩거리는 것처럼 보일 정도로 신이 나 있었다.

그때 베란다 밖으로 가랑비가 추적추적 내리기 시작했다.

“비가 오네?”

“응. 일기예보에 저녁에 비가 좀 올 거라고 했어. 많이 오진 않을 것 같아.”

지수가 어느새 발랑 뒤집어진 베로의 배를 두 손으로 마구 쓰다듬으며 대답했다.

타탁타탁.

살짝 열린 창문 틈으로 물방울이 바닥을 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파전 해 먹을까?”

최지수가 내 생각을 읽은 것처럼 먼저 말을 꺼냈다.

“나도 그 생각했어.”

비도 오고, 새로운 집에 이사도 왔고, 기분도 좋은 이런 날.

파전과 술을 빼먹으면 안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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