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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각인가 (41/125)

      착각인가

지글지글지글.

커다란 프라이팬 위에서 해물파전이 익어간다.

휘릭!

뒤집개와 손목 스냅을 이용에 단번에 뒤집어주었다.

노릇노릇한 색을 띤 단면이 위쪽으로 올라왔다.

벌써 맛있는 냄새가 난다.

내가 요리하는 사이, 지수는 막걸리를 사 오겠다며 급하게 밖으로 나갔다.

베로가 따라 나가고 싶어 했으나 그건 당연히 안 될 일이었다.

단번에 거절당하자 조금 시무룩해진 베로에게 아껴뒀던 비장의 무기를 주기로

했다.

던전에서 내 팔뚝보다 두껍고 길쭉한 뼈다귀를 꺼내왔다.

킁킁.

얼굴 앞에 가져다 대니 냄새를 맡은 베로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리고 망설임 없이 덥석 물고 구석으로 달려간다.

금세 기분이 좋아져 꼬리를 흔들며 와그작와그작 씹어먹는다.

크기가 커서 다 먹는 데 꽤 오래 걸릴 것이다.

뼈다귀는 S급 마룡의 부산물이었다.

식당을 열기 전 S급 던전을 클리어하면서 얻었던 것인데, 팔지 않고 일부 남

겨놓았다.

베로가 마계에서 마룡을 만났다면 꼬리도 못 들고 쭈글거렸을 것이다.

하지만 이미 죽은 마룡의 뼈다귀는 맛 좋은 간식일 뿐.

가끔 베로의 기분 풀어줄 용도로 쟁여놓길 잘했다.

“나 왔어!”

뛰어갔다 왔는지 빠르게 돌아온 지수가 부스럭거리는 비닐봉지 속에서 막걸리

를 꺼냈다.

거실의 좌식 탁자 위에 갓 만든 해물파전 접시를 놓았다.

통유리 밖으로 어스름히 해지는 모습이 보인다.

추적추적 내리는 비가 운치를 더해준다.

최지수가 야무지게 막걸리를 흔들고 잔에 따랐다.

꼴꼴꼴꼴꼴.

23살이면 미성년자를 벗어난 지 한참이나 됐는데, 워낙 어릴 적부터 내가 키

우다시피 했더니 계속 어린애라는 이미지가 있다.

몇 번 같이 술을 마셔봤는데도 아직 이런 모습은 좀 낯설다.

“뭐해? 안 먹고.”

지수는 벌써 파전을 우물거리고 있었다.

나도 젓가락을 들어 파전의 가장자리를 찢고 베어 물었다.

파삭.

오징어와 새우, 홍합을 모두 넣어 쫄깃한 식감과 바다의 풍미를 모두 잡았다.

여기에 익은 파 특유의 향이 함께 어우러지니 달큰한 막걸리를 한 모금 마시

지 않고는 버틸 수가 없다.

“크으으. 파전이 진짜 예술이다.”

열심히 입을 우물거리며 한마디 하는 지수를 보다가 어제 만들어뒀던 음식이

떠올랐다.

“안주 추가해야겠다.”

벌떡 일어나 부엌으로 향하자 지수가 좋다고 짝짝 박수를 친다.

냉장고에서 탱글탱글하게 굳은 도토리묵을 꺼냈다.

일견 평범해 보이지만 평범하지 않은 요리다.

이 도토리묵의 재료가 바로 아스키나 대륙에서 한가득 가지고 온 도토리였으

니까.

묵을 통에서 꺼내 부서지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칼질했다.

너무 얇으면 집기 어려우니 도톰하게, 그러면서도 한입에 들어갈 만한 크기로

쓱쓱 썰어주었다.

다음으로 채 썬 양파와 잘게 찢은 상추에 간단한 양념장을 추가하고 도토리묵

과 함께 가볍게 무쳐주었다.

넓적한 접시에 가득 담아 갔더니 지수가 만족스러워하며 말한다.

“도토리묵이네? 안주로 딱 좋다!”

“생도토리로 만든 거야. 한번 먹어 봐.”

지수에게 권하면서 젓가락을 들어 묵과 채소를 함께 집었다.

온종일 굳길 기다리느라 제대로 맛보는 건 나도 처음이다.

“으음!”

입에 넣자마자 자연스럽게 감탄하며 고개를 끄덕이게 되었다.

분명 도토리묵이 맞다.

그런데 지금껏 먹어본 것과는 조금 다르다.

훨씬 더 묵직하고 짙은 맛이라고 해야 하나.

고소하면서도 조금 쌉싸름한데, 떫지는 않다.

나만 그렇게 느낀 게 아닌지 지수도 감탄하며 묵 하나를 더 집었다.

“대박이다. 도토리묵이 이렇게 맛있는 거였어?”

동감이다.

50년을 아스키나 대륙에서 보냈지만, 당시에는 그곳에서 제대로 된 음식 재료

를 찾을 수 없었다.

식물들은 열매를 제대로 맺지도 못했고, 겨우 하나 발견하더라도 속은 다 문

드러져 있었다.

“짠 하자! 짠!”

맛있는 안주에 기분이 한층 업된 지수가 잔을 들어 나에게 맞부딪쳤다.

괜히 옛날 생각이 난다.

15년 전에 있었던 일.

내 시간을 기준으로 하면 무려 65년 전의 일이다.

너무 옛날이라 이제는 흐려져야 하는 기억인데 당시의 상황은 여전히 생생하다.

아마 모두에게 그럴 것이다.

살면서 그때만큼 충격적인 일은 없었으니까.

대격변.

게이트에서 몬스터가 튀어나왔던 그날.

수많은 사상자가 발생했고, 많은 사람들이 가족을 잃었다.

나와 동생 또한 그때 부모를 잃었다.

당시 내 나이는 17살, 지수는 겨우 8살.

둘 다 참 어린 나이였다.

혼란스러운 세상이었고, 부모를 잃은 아이가 우리만 있는 것도 아니었기 때문

에 어른의 케어를 거의 받지 못했다.

겨우 중학생의 나이에 그보다 훨씬 더 어린 동생을 돌보느라 고생 많이 했었지.

그때는 이렇게 안정된 삶을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전혀 못 했는데.

“오빠, 안 먹을 거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아냐, 아무것도.”

“얼른 먹어. 이러다 내가 다 먹겠다.”

평소에 이런 생각은 거의 하지 않는데 혼자 잠깐 센치해졌다.

아무래도 오늘 비도 오고 뭔가 분위기가 옛날 생각을 하게 만든다.

지수는 딱히 그런 것 같진 않지만.

하긴 겨우 8살 때의 일이라 나처럼 생생하게 기억하지도 못할 것이다.

처벅처벅.

베로가 반쯤 남은 마룡 뼈다귀를 물고 가까이 왔다.

혼자 떨어져 있는 게 싫었던 모양이다.

녀석은 나와 지수 사이에 자리잡아 남은 뼈다귀를 씹기 시작했다.

까드득까드득.

“아이구, 잘 먹네. 귀여운 것.”

지수가 베로의 엉덩이를 톡톡 쳐주자 더 열심히 뜯어먹는다.

우리는 빗소리와 맛있는 음식들을 안주 삼아 적당히 취할 때까지 막걸리를 마

셨다.

* * *

단발머리 여자가 큰 소리로 인사하며 식당으로 들어왔다

“사장님! 저 또 왔어요~”

.

그녀의 뒤로 머리 두 개는 더 큰 수염 난 남자가 따라 들어오며 머리를 꾸벅

숙인다.

“안녕하십니까. 고영한입니다.”

지나치게 딱딱한 인사였다.

그게 공격적으로 느껴지기보단 그냥 어색해하는 것 같았다.

유희진이 남자를 팔꿈치로 툭 치며 입을 열었다.

“한성 길드에서 같이 일하는 동료예요. 한동안 쉬다가 천천히 복귀하는 중이

라 휴게소도 이제서야 와보는 건데, 제가 여기 맛있다고, 맛 보여주려고 데려

왔어요.”

“신경 써서 만들어야겠는데요.”

“에이, 부담 주려던 건 아니고, 그때 그만큼 맛있게 먹었다는 의미에요. 아,

오늘의 메뉴는 피자인가 봐요?”

유희진이 주변 테이블을 슬쩍 둘러보며 말했다.

지난번과 달리 오늘은 손님들이 두 팀 있었다.

한 팀은 한성 길드 소속의 헌터들이었고, 한 팀은 다른 게이트에서 들어온 헌

터들이었다.

“맞습니다. 한 판 드릴까요?”

“네. 얘도 피자 좋아해요. 겉보기엔 정통 한식파 같은데 의외로 양식 좋아하

더라고요.”

“무슨 그런 말을···.”

고영한이 민망해하며 헛기침했다.

확실히 덩치도, 얼굴도 거칠어 보여서 나이프로 스테이크를 썰 것 같은 이미

지는 아니다.

“두 분 많이 친해 보이시네요.”

“알고 지낸 지 오래됐거든요. 8년 전에 같이 길드에 들어온 동기예요. 아니,

벌써 8년이라니, 징글징글하네.”

“···마찬가지야.”

두 사람이 지긋지긋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물론 누가 봐도 장난이라는 게 보인다.

그나저나 이 남자 뭔가 얼굴이 눈에 익은 것 같은데···.

잠깐 고개를 갸웃거리다 우선은 요리를 시작하기로 했다.

발효된 밀가루 반죽을 둥글넓적하게 밀어 피자 도우를 만들었다.

지금 만들 피자는 마르게리타 피자.

토마토소스와 치즈만으로 맛을 내는 가장 기본적인 전통 나폴리 피자다.

가장자리만 도톰하게 모양을 잡은 피자 도우 위에 직접 만든 토마토소스를 발

라주었다.

그 위에 모차렐라 치즈를 아낌없이 듬뿍 올리고 바질잎을 흩뿌렸다.

마지막으로 피자를 달구어진 화덕에 넣고 문을 닫았다.

안쪽에서부터 뜨거운 기운이 느껴진다.

이제 강력한 불길 속에서 피자가 완전히 익을 때까지 기다리기만 하면 된다.

“사장님! 여기 보세요!”

휴식할 텀이 생기기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유희진이 타이밍 맞게 나를 불렀다.

신선한 바람이 불어왔다.

유희진이 실프를 불러낸 것이다.

실프는 지난번 힐끔힐끔 나를 쳐다보던 것과는 또 다른 태도를 보였다.

두 손을 모으고 공손하게 인사를 하는 것이다.

“어어어! 또 행동이 이상해. 고영한, 이거 봐봐.”

“난 전혀 안 보인다니까.”

고영한이 어깨를 으쓱하자 유희진이 나에게로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아니, 진짜 희한한 게 사장님 앞에만 오면 안 하던 행동을 해요. 대체 왜 이

러는 거지?”

“그러게요. 저도 잘 모르겠네요.”

···라고 대답했지만, 조금은 알 것 같다.

아스키나 대륙의 그 다람쥐나 마찬가지로, 이 녀석도 나에게 고맙다는 표현을

하고 싶은 모양이다.

결국 대륙이 살아나면서 정령들 또한 다시 힘을 얻게 된 것이니까.

그런 얘길 이 사람들에게 할 수는 없으니 그저 모른 척했지만.

정령은 나에게 인사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사라졌다.

“아직은 이정도밖에 유지가 안 되는데, 그래도 조금씩 시간이 늘어나고 있어.

친해지고 있는 거겠지?”

“글쎄. 내 눈에는 안 보여서 모르겠다니까.”

고개를 젓는 고영한의 얼굴에서 무언가 떠오르는 장면이 있었다.

눈을 감은 창백한 얼굴에 피범벅이 되어있는 모습이 겹쳐졌다.

기억난다.

몇 달 전 골렘에게 다쳐서 던전에 들어와 쓰러져 있었던 남자였다.

‘한성 길드 사람들이었구나.’

까맣게 잊고 있던 이들의 정체를 이제야 알게 되었다.

뭐, 그때 가방에서 마석은 두둑하게 챙겼다.

이제 와서 치료비를 청구하라고 할 생각은 없다.

삐비비빅!

시간 맞춰 켜둔 알람이 울렸다.

화덕에서 피자를 꺼냈다.

테두리가 노릇노릇하게 잘 익었다.

나는 피자에 칼집을 내고 피클과 음료를 함께 챙겨 두 사람 앞에 가져다주었다.

* * *

고영한은 피자 한 조각을 집어 들었다.

붉은 토마토소스와 모차렐라 치즈가 절단면으로 흘러내렸다.

치즈가 떨어지기 전에, 그는 다급하게 피자를 입안에 밀어 넣었다.

한입 베어 무는데 치즈가 쭈욱 늘어져 몇 번 더 입을 가져다 대야 했다.

뜨겁지만 확실히 맛있다.

마주 앉은 유희진이 자기 말이 맞지 않냐는 듯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아삭.

시큼새큼한 피클이 시원한 음료를 마신 것처럼 입안을 환기시켜주었다.

고영한도 이 식당이 꽤 마음에 들었다.

한성 길드 본부 주변에 있는 식당은 이미 다 섭렵한 지 오래였다.

오래된 식당은 맛은 있지만 이제 질렸고, 새로 생겨났다 사라지길 반복하는

식당들은 별로 맛이 없었다.

그렇다고 계속 같은 메뉴만 먹는 것도 영 별로였다.

그런데 이 식당은 계속 메뉴가 바뀌는데, 무슨 메뉴든 맛은 평균 이상 하는

것 같다.

심지어 사냥 중에 들릴 수도 있다는 엄청난 이점도 있다.

아마 유희진처럼 자신도 종종 찾아오게 될 것 같았다.

만족스럽게 식사를 하면서 고영한은 가끔 주위를 둘러보았다.

이상한 위화감이 느껴졌다.

처음 와보는 곳인데 처음 온 게 아닌 것 같은 느낌.

‘착각인가?’

기억력이 나쁜 편은 아니다.

오히려 꽤 좋은 편에 속해서, 기억이 나면 났지 이렇게 긴가민가한 경우는 잘

없었다.

‘그리고 저 남자도···’

고영한이 던전 식당의 사장을 힐긋 보았다.

분명 아는 사람은 아니었다.

그런데 또 아예 모르는 사람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대체 누구인가···.

잡힐 듯 말 듯 어렴풋하게 머릿속을 맴도는 기억을 열심히 헤집었지만 잘 떠

오르지 않는다.

식사를 마치고 휴게소로 돌아온 후에도, 집으로 돌아간 뒤에도 계속해서 기억

을 더듬었다.

하나에 꽂히면 거기에 빠져드는 성향인지라 종일 뭔가에 집중하지 못하고 시

간을 보냈다.

오늘이 이틀간의 사냥을 끝마친 날이라 그나마 다행이었다.

하마터면 싸움에도 제대로 집중하지 못할 뻔했다.

해가 지고, 고영한은 잠들기 위해 침대에 누웠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흐른 후 벌떡 몸을 일으키며 소리쳤다.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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