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지
번뜩 떠오른 생각 하나에 풀리지 않았던 과거의 퍼즐 한 조각이 정확히 맞춰
졌다.
잠시 잊고 있었던 일이었다.
신입 길드원과의 실습에서 일어났던 사고.
그때, 그들은 거의 정신을 잃어가는 상태에서 힘겹게 이중 던전 게이트로 피
신했다.
‘그대로 죽은 목숨이라 생각했었는데···.’
놀랍게도 정신을 차리고 보니 누군가 그들을 치료하고 죽까지 가져다주었다.
운이 좋았다는 말로 간단히 넘기기 어려운 일이었다.
여러 가지로 이해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거의 한 달가량 조사를 진행했으나 외부에서 들어온 다른 헌터의 흔적은 전혀
찾지 못했다.
또한 다른 길드원들이 다시 던전에 들어갔을 때는 이미 게이트가 사라진 상태
였다.
생각해보면 거기서 죽이 튀어나오는 것도 상식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었고.
그 모든 미스터리가 이 던전 식당의 존재 하나로 풀리는 것이다.
이 식당이 운영되는 독특한 방식을 생각해보면, 밖에서 누군가 들어온 흔적을
찾을 수 없는 게 당연했다.
생각할수록 확신이 생겼다.
목소리가 익숙했던 것도 그때 몽롱한 상태에서 대화했었기 때문일 것이다.
‘생명의 은인이었구나···!’
생각보다 길어진 병원 치료 기간 동안, 그는 그때 그들을 치료해준 이름 모를
은인에게 더더욱 감사하게 되었다.
그의 주치의와 힐러가 그때의 빠르고 적절한 응급조치가 아니었다면, 부러졌
던 발목이 지금처럼 멀쩡히 회복될 수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던 것이다.
드디어 감사 인사를 할 수 있게 되어 정말 다행이었다.
그러나 동시에 낮에 혹시나 좋지 않은 인상을 준 게 아닌지 걱정도 되었다.
성격이 워낙 무뚝뚝한 편에다 자신과 큰 교류는 없을 것이라 생각해서 인사만
하고 말았는데···.
고영한은 이걸 어떻게 만회해야 하나 한참을 고민하다 잠에 빠져들었다.
* * *
“···사장님, 안녕하십니까.”
양손 가득 무언가 싸 들고 찾아온 덩치 큰 남자.
턱수염이 부담스러운 고영한이었다.
“안녕하세요. 그런데 이건 뭐죠? 저 주시는 겁니까?”
“그게··· 선물입니다.”
“선물이요? 왜요?”
의미를 알 수 없는 행동에 되물었더니 어물쩍 입을 연다.
“감사의 의미로···.”
이 사람이 나한테 감사할 일이 뭐가 있지?
잠깐 의문이 들었으나 금방 깨달을 수 있었다.
‘눈치챘구나.’
뭐, 생각해보면 그렇게 유추하기 어려울 일도 아니니까.
그리고 고영한은 역시나 내가 생각한 대로 말하기 시작했다.
“저와 신입 길드원들이 목숨을 빚졌습니다. 조금만 더 생각해봤으면 던전 식
당의 존재가 확인되었을 때 바로 알아챌 수 있었을 텐데···. 이제서야 감사
인사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아예 확신하고 있다.
딱히 먼저 아는 척 할 생각은 없었지만 그렇다고 모른 척 할 이유도 없었다.
“별일 아니었습니다. 그냥 상황이 그렇게 돼서 조치를 취했던 것뿐이지···.
다만 하나 말씀드리자면, 앞으로는 수준에 맞는 던전에 다니시는 게 좋겠습니
다. 등급이 얼마든 한 번 실수하면 그대로 끝장날 수도 있는 거니까요.”
나는 고영한에게 진심을 담아 충고해주었다.
욕심내지 말고 내 수준에 맞는 던전에만 들어갈 것.
만년 F급 헌터로서 반드시 지켜왔던 철칙이었다.
그 덕분에 F급이면서도 치명적인 부상은 피할 수 있었던 거고.
자만하지 말아야 한다는 건 등급에 관계없이 모든 헌터가 명심해야 할 점이다.
“아, 아니, 그때 그건 수준에 안 맞는 던전이 아니라 그때 뭔가 착오가···.”
“됐어요. 이미 지난 일인데 저한테 굳이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게 아닌데···.”
고영한이 어울리지 않는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가, 다시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아무튼 저는 은혜를 받은 게 있으면 두 배로 갚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게
다가 목숨을 빚졌습니다. 저뿐만 아니라 신입 길드원들까지도요. 그건 결코
이런 물질적인 걸로 갚을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건 잘 알고 있습니다. 혹시 더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어떻게든 갚겠습니다.”
우직해 보이는 외모처럼 신의를 중요시하는 성격인 것 같다.
이렇게까지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필요한 게 딱히 없다는 말에도 고영한은 우뚝 서서 뭐든 돕겠다는 소릴 하고
있다.
그냥 돌려보내기엔 꽤 고집이 센 사람인 것 같다.
“그럼 그냥 가끔 식당 일이나 도와줘요.”
“겨우 그걸로 괜찮겠습니까?”
“딱히 필요한 게 없어요.”
“···알겠습니다. 언제든지 불러주시면 시간 내도록 하겠습니다. 조만간에 그
때 같이 들어왔던 신입 헌터들과 같이 인사 오겠습니다.”
“네, 뭐···.”
이러나저러나 관계없는 일이라 적당히 대답하고 넘겨버렸다.
고영한이 나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 하나 여쭤보고 싶은데, 혹시··· 그때 바깥에 있던 골렘도 사장님께서 처
리하신 건지···.”
“아뇨. 저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어요. 이 던전이 아니면 그냥 F급 헌터나 다
를 게 없죠.”
어깨를 으쓱하며 대답하자 고영한은 당황한 듯 말을 덧붙였다.
“기분 상하게 하려던 말은 아니었습니다. 그냥 정황상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
각에··· 오해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저도 그냥 있는 그대로의 사실을 얘기한 거예요. 기분 나쁜 거 아닙니다.”
“다행이네요···.”
표정이 풀어진 고영한이 안도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꽤나 적극적으로 자신의 필요성을 어필한다.
“사장님, 혹시나 식당에 문제가 생길 경우는 제가 최대한 처리해드리겠습니
다. 부담 갖지 말고 말해주세요. 정말로 큰 빚을 져서 어떻게든 도움이 되고
싶어서 그러는 겁니다.”
대충 봐도 친화력 좋은 사람은 아닌 것 같았는데, 상당히 노력 중인 듯하다.
뭐, 도와주겠다는 것까지 거절할 이유는 없다.
“알겠습니다.”
고개를 끄덕이자 고영한의 표정이 미세하게 밝아졌다.
* * *
달그락달그락.
열심히 설거지하는 호빵이와 찐빵이, 그리고 만두.
쪼그만 녀석들이 수세미를 들고 접시를 박박 닦는 모습이 참 기특하다.
열심히 하는 건 참 보기 좋은데··· 사실 문제가 조금 있다.
나는 녀석들의 옆에 쪼그려 앉아 천천히 접시 개수를 헤아렸다.
“접시가··· 또 없어졌네.”
“삐이이이···.”
“삐잇···.”
“삐이이익···.”
세 슬라임들이 당황한 소리를 내며 흠칫 동작을 멈췄다.
서로 얼굴을 마주 보다가 내 앞에 나란히 서서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숙
인다.
엄청난 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는지 지나치게 심각해 보인다.
뭐라고 할 의도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아니, 혼내려고 한 말이 아니야. 열심히 하는데 안 되는 건 어쩔 수 없지.”
아무리 마나를 주입해 인간의 모습을 만들었다고 해도, 슬라임은 슬라임이다.
몬스터 최약체 답게 힘이 달리기도 하고 몸집이 작다 보니 이런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었다.
이래저래 접시를 옮기고 씻다가 손에 힘이 빠져 놓쳐버리면, 접시는 그대로
물살에 휩쓸려 떠내려가고 마는 것이다.
그렇게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일, 이주마다 하나씩은 놓치다 보
니 벌써 10개 이상 분실된 것 같다.
물론 새로 사서 채워 넣으면 되는 거긴 한데, 개선할 방안이 없는지 고민해볼
필요는 있겠다.
그래도 다행히 깨뜨린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삐이···.”
“괜찮다니까. 진짜 뭐라 그러려던 게 아니야.”
괜찮다는 말에도 호빵이는 고개를 들지 못했다.
별생각 없이 중얼거린 건데 지금껏 이런 얘기를 꺼낸 적이 없다 보니 조금 충
격이었나 보다.
아무래도 은근히 신경쓰고 있었던 모양이다.
나는 호빵이의 몰랑몰랑한 어깨를 토닥토닥 두드려주었다.
사실 처음에는 세 슬라임을 세트로 묶어 비슷한 생물로 여겼는데, 보다 보니
얘네도 성격들이 좀 달랐다.
호빵이는 뭔가 맏이 같은 느낌이 있었다.
다른 애들보다 한 발짝 더 나와서 책임이라도 지려는 듯한 태도였다.
달그락, 달그락, 달그락.
그때 이상한 현상이 발생했다.
물길을 거슬러 다가오는 흰 물건들.
분명히 내가 잃어버린 그릇과 접시들이다.
아무리 던전 안이라지만 무슨 연어도 아니고, 자연의 법칙을 거스르는 그릇들
의 모습은 기이하기 짝이 없었다.
그러나 곧 그릇들 아래에 울렁거리는 뭔가가 있다는 걸 알아챘다.
“정령이구나.”
물의 정령 운디네.
푸른 피부의 정령들이 물속에서 열심히 그릇을 밀고 당기며 내 쪽으로 가져오
는 것이었다.
슬라임들 또한 다가오는 그릇들을 발견하고 기뻐하며 삑삑거렸다.
‘이런 상황은 예상하지 못했는데.’
이 물길이 정령계와 연결되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냥 물이 정령계를 순환하면서 정화되는 거라고만 생각했지, 이렇게
물의 정령이 직접 모습을 드러낼 줄은 몰랐다.
운디네들은 그릇들을 땅 위로 밀어 올려주었다.
총 16개.
잃어버린 그릇이 모두 제자리로 돌아왔다.
“고마워.”
자기들끼리 까르르 웃던 운디네들이 수줍은 듯 손을 들어 입가를 가렸다.
그리고 그중에서도 가장 크기가 큰 물의 정령 하나가 물가로 가까워졌다.
중급 정령 운다인인 것 같다.
상체만 물 밖으로 나온 운다인은 한 손을 가슴에 올리고 우아하게 고개를 숙
이며 인사했다.
그리고 물속에서 돌돌 말린 양피지를 불쑥 꺼내 나에게 내밀었다.
마법이 걸려 물에 젖지 않는 양피지였다.
끈을 풀고 열어보니 제국어로 짧은 편지가 적혀있었다.
‘나를 만나보고 싶다고···?’
물의 정령왕이 접촉해온 것이었다.
정중한 뉘앙스로 적힌 편지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될 것 없다.
오히려 어떤 존재인지 궁금해서 한번 만나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찾아와도 좋다고 전해줘.”
내 말에 운다임은 다시 한번 가슴에 손을 올려 인사했고, 뒤쪽에서 지켜보던
운디네들은 미션을 성공시킨 것처럼 흥분하며 기뻐했다.
슬라임들은 돌아온 그릇들을 소중하게 챙긴 다음 정령들을 보았다.
“삐이?”
“삐이이···.”
“삐이···?”
손가락으로 서로를 가리켰다가 정령들을 가리키기를 반복했다.
그러면서 고개를 갸웃거리며 신기해했다.
근원부터 다른 존재들이었지만 언뜻 보니 푸른빛 피부와 인간과 비슷한 형상
이란 점이 조금 비슷해 보이기도 했다.
크기만 따지자면 머리가 허벅지까지 닿는 슬라임들이 훨씬 크지만.
물의 정령들 또한 슬라임 인간들을 신기한 눈으로 바라보았으나 가까이 다가
오지는 않았다.
운디네들은 운다인의 손짓에 따라 함께 꾸벅 인사한 후, 까르르 웃으며 다시
물길을 따라 떠나갔다.
* * *
그날 오후, 오랜만에 헌터관리국의 송혜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 현호 씨, 잘 지내시나요? 던전 식당 관련한 서류가 오늘부로 모두 결재되었
어요.
“생각보다 오래 걸렸네요. 고생 많으셨습니다.”
- 그렇긴 한데, 다른 안건들에 비하면 엄청 빠르게 단축시켜서 끝낸 거예요.
사실 고생하긴 했는데 꽤 재밌었어요. 업무 능력이 두 단계 정도 성장한 거
같은 느낌?
얼핏 뼈 있는 농담처럼 들리지만, 정말로 재미를 느꼈을 가능성이 높았다.
최측근인 강남웅 과장이 정말로 일을 즐기는 사람이라고 했으니까.
“시간 되실 때 식당 한 번 찾아오세요. 맛있는 음식 대접할테니.”
- 안 그래도 남웅 과장이 식당 갈 때 자기도 꼭 데려가라고 신신당부를 하더
라고요.
“하하, 두분 같이 오세요. 언제든 환영입니다.”
그날로부터 일주일 후, 저녁 시간대에 송혜연 팀장과 강남웅 과장이 정말로
던전 식당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