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정령왕 (44/125)

      정령왕

“싫어? 맛있는 건데? 안 먹을 거면 내가 먹는다?”

베로에게 가져다 댔던 초콜릿의 방향을 틀어 내 입에 집어넣는 시늉을 해보았다.

그러자 바닥에 앉아있던 녀석이 급하게 벌떡 일어났다.

“웡!”

“싫다면서?”

“웡웡.”

“줄까?”

“월!”

방금 전엔 본 척도 안 했던 베로가 순식간에 태세 전환했다.

자기 입에 넣어주려고 할 때는 모른 척하더니, 막상 빼앗길 것 같으니까 안달

이 나서 엉덩이를 들썩거린다.

하여간 웃기는 녀석이다.

“베로!”

텁!

초콜릿을 툭 던졌더니 크게 움직이지도 않고 가뿐하게 받아먹는다.

우적우적 씹긴 하는데 고개를 오른쪽 왼쪽으로 기울인다.

먹으면서도 이게 대체 무슨 맛인지 의아해하는 것 같다.

과일 같은 건 꽤 잘 먹는 편인데, 초콜릿은 영 입에 안 맞나 보다.

“삐이이잇!”

“삐이?”

“삐이이이!”

그때, 뒤쪽에서 평소와 조금 다른 슬라임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톤이 좀 높아진 게 놀라고 당황한 것 같았다.

뒤돌아 아래쪽을 내려다보았다.

두 손이 시커멓게 더러워진 슬라임들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모르고 서 있다.

입가에도 초콜릿이 치덕치덕 묻어있다.

만두는 무슨 짓을 한건지 볼과 이마까지 초콜릿으로 범벅이 되어 있었다.

체온이 따뜻한 애들은 아니다.

아마 그냥 초콜릿을 꾹 눌러서 녹여버린 모양이다.

왜 저렇게까지 지저분해진 건지 잠깐 살펴보았다.

“삐이이!”

“삐이이잇!”

호빵이와 찐빵이가 서로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부여잡고 마구 비비고 있다.

이제 보니까 이 녀석들이 자기한테 초콜릿이 묻은 줄은 모르고 다른 애들 깨

끗하게 해주겠다고 애를 썼던 것 같다.

물론 그 결과는 초콜릿이 덕지덕지 묻은 시커먼 얼굴이고.

심지어 초콜릿은 이미 좀 굳어서 쉽게 지워지지도 않는 것 같다.

물가에 편하게 자리 잡고 앉아 슬라임들을 불렀다.

“얘들아, 차례대로 이리 와봐.”

“삐익?”

만두가 가장 먼저 내 쪽으로 다가왔다.

나는 만두의 손을 물에 넣고 뽀득뽀득 씻어주고, 얼굴도 문질러 닦아주었다.

“삐이익! 삐이이이!”

가끔 간지러운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저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깨끗한 얼굴

로 다시 돌아왔다.

줄 서서 기다리던 나머지 두 녀석도 내 손을 거치고 나서 맨들맨들한 푸딩 같

은 피부를 되찾았다.

“삐이이!”

“삐잇!”

“삐이이익!”

세 슬라임은 깨끗해진 서로의 얼굴을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감탄하는 것 같다.

앞으로 초콜릿은 그냥 내가 한입에 넣어주는 게 낫겠다.

그때였다.

울렁.

한 방향으로 일정하게 흐르던 물길이 갑자기 이상한 움직임을 보였다.

물살이 역방향으로 밀려 들어오는 모양.

얼마 전 물의 정령들이 그릇을 가지고 왔을 때 이런 현상이 생겼었는데.

아무래도 손님이 오려나 보다.

멀리서부터 까르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일전에도 들어봤던 웃음소리.

물의 정령 운디네였다.

하지만 이번에 찾아온 것은 운디네들이 다가 아닌 듯하다.

멀리서부터 물줄기에 비해 거대한 물살이 빠르게 밀려들어 왔다.

슈우우욱!

물 덩어리.

그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것이 내 바로 앞에서 불쑥 솟아올랐다.

지나치게 깨끗해서 거의 감지하기도 힘든 거대한 마나가 느껴진다.

아스키나 대륙의 근간이자, 자연의 근원인 정령의 기운이다.

솟아 나온 물이 아래로 흘러내리며 제대로 모양이 드러났다.

곱슬곱슬한 머리를 허리까지 늘어뜨린, 물로 만든 조각상 같은 존재.

처음 마주하는데도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이건 물의 정령왕이다.

정령왕은 누구도 흉내 내지 못할 것 같은 우아한 움직임으로 나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십니까. 물의 정령왕 엘시스라고 합니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세계

의 구원자이자 초월자이시여.”

“최현호라고 합니다.”

내 말에 정령왕이 크게 허리를 숙여 몸을 낮추었다.

“알고 있습니다, 현호 님. 모두가 포기했던, 멸망해가는 세계를 구해주신 것

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스키나 대륙은 정령계와 밀접하게 관련 있

는 세계. 대륙에 문제가 생기면 정령계 또한 힘을 쓸 수 없게 됩니다. 저희

정령계와 대륙은 현호 님께 정말 크나큰 은혜를 입었습니다.”

“아, 예···.”

지난번 다람쥐를 만났을 때가 오버랩된다.

그저 살아남으려고 발버둥 쳤던 내 50년이 이세계의 존재들에게는 구원과도

같았던 것 같다.

“존대하시지 않으셔도 됩니다. 부디 저 엘시스를 편하게 대해주시길 바랍니다.”

정령왕의 확고한 태도에 순순히 고개를 끄덕였다.

쓸데없는 걸로 입씨름할 생각은 없었다.

“뭐, 정 그렇다면···. 그런데, 무슨 일로 나를 찾아온 거지?”

“물론, 정령계를 대표하여 감사 인사를 드리기 위해서였습니다. 저희 정령왕

들은 아스키나 대륙을 구한 영웅을 찾아 대륙 곳곳을 헤맸습니다. 미약하게나

마 남아있던 정령들의 증언에 따라 영웅의 정체가 이세계의 초월자라는 것까

지는 알고 있었지만··· 어느 순간 흔적도 없이 사라져서 낙심하고 있었습니

다. 그러던 와중에 한 실프의 제보로 현호 님께서 차원 너머에 계신 것을 알

게 된 것입니다. 요 며칠간은 대륙의 자연을 복구하는 데 너무 많은 힘을 쏟

은 터라 이리 늦게 찾아뵙게 된 점, 송구하옵니다.”

엘시스가 우아한 손동작과 함께 허리를 살짝 굽혔다.

“초월자님에 비하면 미약하지만, 힘이 필요하시다면 언제든지 힘을 빌려드릴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대륙의 자연이 거의 원상태로 회복된 만큼, 저 또한 대

부분의 힘을 되찾았습니다.”

“딱히 힘을 빌려야 할 상황은 없지만··· 뭐, 알겠어.”

“감사합니다!”

별 게 다 감사하다 싶었지만··· 그냥 넘기기로 했다.

엘시스가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현호 님, 혹시 한 달쯤 전에 대륙을 찾아주신 적이 있으십니까?”

“음···. 있었지. 잠깐이긴 했지만.”

베로와 함께 잠깐 아스키나 대륙으로 넘어가 자연을 즐기고 돌아왔던 날이 떠

올랐다.

내 말에 엘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 소문이 사실이었다니···.”

“무슨 소문이지?”

“아스키나 대륙 동부의 카람 한 마리가 현호 님으로 보이는 사람을 마주쳤다

는 이야기가 널리 퍼졌습니다.”

“카람?”

“아스키나 대륙에 서식하고, 하급 정령들과 친밀도가 높은 생물입니다. 손바

닥보다 조금 더 큰 크기에 꼬리털이 풍성하고···.”

“아아, 알겠어. 만난 적이 있지.”

그 좀 큰 다람쥐라고 생각했던 동물의 이름이 카람인 것 같다.

행동이 범상치 않아 보이더니, 역시 일반적인 동물은 아니었다.

엘시스가 입을 열었다.

“현호 님, 그렇다면 시간 되실 때 대륙에 한 번쯤 들러주시는 게 어떠십니까?

제가 대표로 찾아오긴 했지만, 그곳의 많은 생명들이 감사의 표현을 하고 싶

어 합니다.”

“아니, 거긴 무슨 소문 하나가 전 대륙으로 퍼지는 거야?”

“그렇다기보다··· 아무래도 최근 힘을 되찾은 바람의 정령들이 열심히 활동하

는 것도 있고, 또 중요한 소식이기도 해서··· 그런 것 같습니다···!”

그냥 어이없어서 던진 농담이었는데 엘시스가 진지한 얼굴로 설명했다.

“어찌 됐든 간에, 지난번 들러주신 그 장소가 영웅의 발자국이 찍힌 성지로

여겨진다고 들었습니다. 잠시라도 방문해주시기를, 대륙과 정령계를 대표해서

부탁드리겠습니다.”

“알겠어. 나중에 볼게.”

이건 또 무슨 소린지 모르겠지만 일단 대답했다.

이따가 확인해봐야겠다.

이제 볼 일이 다 끝난 건가 했는데, 엘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

아직 하고 싶은 말이 남은 것 같다.

“지금 드리고 싶은 말은 조금 개인적인 이야기인데, 혹시 들어주실 수 있겠습

니까?”

“무슨 말인데?”

엘시스가 뒤쪽으로 흐르는 물길을 살짝 바라보며 말했다.

“이 길을 따라 정령계로 물의 흘러오고 있는 건 아십니까?”

“알고 있어.”

“현호 님은 이 물로 설거지를 하고 계십니다. 그간 어디에서 오는 건지 알지

못했던 접시들을 모아뒀었는데, 얼마 전 현호 님의 위치를 알게 되면서 접시

가 이곳에서 흘러들어온다는 것 또한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제가 운다인을

통해 그릇을 돌려드렸습니다.”

“그게··· 뭐 문제가 되는 건가?”

유용하게 잘 쓰고 있는 물인데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려는 건가 싶었다.

그러나 엘시스는 서둘러 팔을 내저었다.

“아닙니다! 그런 의미로 꺼낸 말이 아니었습니다. 단지, 현호 님께서 지속적

으로 여러 요리를 만들어 드시는 것 같아서··· 작은 소망이 생겼습니다. 지구

라는 세계의 음식을 한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정령이 음식을 먹을 수가 있어?”

“물론입니다!”

대답과 함께 물로 이루어진 신체가 천천히 물가로 걸어 나왔다.

다리가 생겨나고 피부색이 변화하며 인간의 모습이 되었다.

푸른 머리와 푸른 눈동자를 가진, 지나치게 아름다운 여성이었다.

엘시스는 마치 물로 만든 듯한 독특한 질감의 옷을 입고 있었다.

“과거 아스키나 대륙에 마계의 몬스터가 밀려오기도 한참 전에, 인간의 몸으

로 모험했던 적이 있습니다. 당시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다양한 산해진미를

맛봤던 것이 좋은 기억으로 남았습니다. 혹시 가능하십니까? 물론 안 되는 거

면 조용히 돌아가겠습니다.”

말은 이렇게 하는데 눈빛에 간절함이 보인다.

“지구의 음식을 맛보고 싶다고···.”

“귀찮게 할 생각은 아닙니다. 그저 지구에서는 일상적으로 어떤 걸 먹는지 궁

금한 것이니 아주아주 간단한 것이면 됩니다.”

일상적으로 먹는 아주아주 간단한 것.

“그럼 딱 좋은 게 있지.”

마침 오늘은 한성 길드 쉬는 날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다음에 오라고 하던지, 아니면 안 된다고 하면서 돌려보냈을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은 충분히 여유가 있으니···.

나는 두 손을 맞잡고 푸른 눈을 빛내는 엘시스에게 따라오라는 손짓을 했다.

* * *

보글보글보글.

양은 냄비의 물이 거품을 내며 끓는다.

지익.

봉지를 뜯고, 수프와 건더기, 그리고 면을 모두 투하했다.

국물이 붉게 변하며 익숙하면서도 맛있는 냄새가 올라온다.

‘라면이 딱이지.’

아스키나 대륙에는 없을 맛.

그러면서도 우리가 일상에서 쉽게 만들어 먹는 친근한 음식이었다.

라면 중에서도 가장 순한 맛의 라면을 골랐고, 스프도 정량보다 조금 덜 넣었다.

이런 음식을 처음 접해보는 정령에게 한국인의 입맛은 너무 자극적일 수도 있

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요리하는 내 모습을 엘시스가 신기해하는 눈빛으로 뚫어져라 구경하고 있었다.

5분도 지나지 않아서 라면 한 그릇이 뚝딱 완성되었다.

엘시스가 조금 놀라며 말했다.

“벌써 다 된 것입니까?”

“인스턴트 식품이거든.”

“인스턴트 식품? 조리 시간을 단축시키는 겁니까? 지구에는 마법이 없다고 알

고 있었는데, 그런 것이 가능합니까? 아니, 그런 건 마법으로도 불가능할 터

인데···.”

“15년 전이면 몰라도 지금은 지구에도 마법이 있어. 인스턴트 식품이랑 마법

간에는 아무런 관계도 없지만.”

“그럴 수가 있다니···. 이곳에 대해서 잘 알지는 못하지만, 현호 님의 말씀에

따르면 지구는 정말 대단한 세상인 것 같습니다.”

감탄한 듯 고개를 끄덕이는 엘시스 앞에, 완성된 라면을 냄비째로 놓았다.

젓가락질은 하지 못할 것 같아서, 대신 포크와 숟가락을 함께 주었다.

“면이 이렇게 일정하게 꼬불꼬불한 것은 처음 봅니다. 현호 님, 이 음식의 이

름은 무엇입니까?”

“라면. 한국이라는 나라에서 엄청나게 일상적으로 자주 먹는 음식이지.”

“한 번도 맡아본 적이 없는 냄새가 납니다.”

정령왕이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먹어 봐. 한 번도 먹어본 적 없는 맛일 테니까.”

자신만만한 내 제안에 엘시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너무 꼬들꼬들하지도, 불지도 않고 알맞게 익은 면을 포크로 몇 가

닥 집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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